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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생서와 경성호국신사가 있던 후암동 해방촌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10. 8. 21:44

     

    용산구 후암동은 조선시대 전생서(典牲署)라는 관청이 있던 곳이다. 전생서는 국가의 여러 제사에 사용될 짐승을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관아로서, 이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일대가 전생동이나 전생서동, 혹은 발음이 와전된 정성세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인 <한경지략>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보다 소상히 실려 있다.
     
    전생서는 숭례문 밖 남부 둔지방(南部 屯智坊) 목멱산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창설하였고, 희생물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정청(正廳)은 간줄헌(看茁軒)이라 하며, 곁에 연못이 있어 정자를 일컬어 불구정(不垢亭)이라 한다.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의 <간줄헌기>(看茁軒記)가 있다. 살펴보자면 우리나라에는 양(羊)이 없으나 이곳에서만 양과 고력(羖䍽, 흑염소)을 길러 제향에 공급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단지 염소만 있고 양은 없어졌다. 생우(牲牛)로는 종묘(宗廟)에는 검은 소를 쓰고, 문묘(文廟)에는 성(騂, 붉은 소)을 쓴다.
     
    전생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이후 비어 있는 간줄헌을 일본인 의인(義人)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가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로 사용했다.(1921년) 가마쿠라 보육원은 일본의 사회사업가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가 1896년 도쿄 가마쿠라에 설립한 보육원으로 1913년 중국 뤼순(旅順)에 이어 1921년 서울에도 지부를 냈는데 소다 가이치가 경성지부장으로 보육원을 운영했다. 지금의 후암동 영락보린원의 전신이다. 
     
    앞서 '조선의 고아들을 돌본 의인(義人) 소다 가이치'에서도 언급했지만, 소다 부부는 국가 지원금도 없고, 당시의 세계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국제 지원금마저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갖은 어려움 속에도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이와 부모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 보육했고, 부인 소다 다키코는 영아들의 젖동냥까지 다녔다. 아래 사진은 1927년 발간된 <조선사회사업요람>에 수록된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의 모습으로 그들 부부가 고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면 전생서 간줄헌과 그 부속건물들은 1927년까지는 확실히 존속했다. 
     
     

    영락보린원 입구의 전생서 터 표석
    영락보린원
    간줄헌 현판이 보이는 1927년 사진

     
    일제강점기에는 후암동 일대에 쓰루가오카(鶴岡)라는 이름의 일본인 고급주택지가 형성되었다. 일본인들은 주택지로서 조선총독부가 가까운 남산 자락을 선호했는데, 쓰루가오카는 조선총독부가 있는 왜성대보다도 인기있는 소문난 주택지였다. 왜성대는 북향이었던 반면 쓰루가오카는 산기슭의 정남향으로, 전망이 우수하고 바람이 잘 통하며 햇빛을 오래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좀 산다는 왜인들은 모두 후암동으로 몰려들었으니, 우선은 경성의 월 스트리트 남대문로와 서울역이 가까웠고, 남대문과 용산을 잇는 전차노선이 있다는 교통의 편리성도 한몫하였다. 
     
    당시는 일대를  삼판통(三板通· 미사카토)라고 불렀는데, 조선토지경영주식회사의 미요시 같은 인물들이 요지를 선점해 분양하며 심판통 쓰루가오카의 건축 붐을 선도했다. 그 쓰루가오카의 흔적은 후암동 여기저기 남아 있어 굳이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곳곳에서 눈에 띄니 언뜻 일본 지방도시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후암동 일대에서 소위 적산가옥이라는 왜식집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흔히 판재를 이용한 왜식집과 달리 당시의 첨단공법인 콘크리트를 사용한 때문으로, 특히 1930년대 지어진 후암동  244번지 일대의 조선은행 사택단지 내 집들은 지금도 짱짱하다. *
     
    * 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직원 사택단지는 총 23동 35호였다. 그 집들은 직급에 따라 7가지로 나뉘었으며 호당 26평~ 82평으로 단독주택형과 연립주택형이 있었다. 간부들은 단독주택형에, 평사원들은 연립주택형에 살았으며, 그 외 합숙소도 있었다. 이들 주택은 통칭해 문화주택으로 불리었는데, 부대시설로 놀이터와 테니스코트 및 스케이트장까지 만들어졌다.  
     
    지금도 후암동 244번지에는 '한국은행 직원 공동숙소'로 등록된 지번이 여럿 존재하는데, 그 속에 2006년에 준공된 '한국은행 직원 공동숙소 후암 생활관' 건물이 있어 괜스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위 자료에 따르면 조선은행은 후암동 일대에 약 2만 평의 땅을 소유했다는데 그 지분 중의 일부가 지금도 전해오는 모양이다. 
     
    해방 후 이 집들은 적산가옥이라고 불렸다. 적산(敵産)은 '적들이 남기고 간 재산'이는 뜻이다. 후암동 적산가옥 중 대표적인 건물은 역시 지월장(指月藏)이다. 지금은 유명 게스트 하우스로 변모한 이 집은 규모가 워낙에 방대한지라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별장'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서선식산철도주식회사(西鮮殖産鐵道株式會社) 상무이사 니시지마 신조의 사택이었다.  

     
     

    게스트 하우스 지월장
    지월장의 담장
    옛 지월장 문으로 여겨지는 후미의 옛 대문

     

    이처럼 삼판통의 일본인이 늘자 그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도 여럿 생겨났던 바, 삼판소학교(지금의 삼광초등학교), 용산중학교,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수도여자고등학교의 전신)가 대표적인 일본인 학교였다. 당시 후암동에 살았던 일본인이 얼마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후암동에 현재 남아 있는 적산가옥이 300여 채도 넘는다고 하는 바, 많은 수의 일본인이 거주하였음은 분명하다.   

     
     

    카페로 전용된 적산가옥
    동화책 속에서 나온 듯한 삼광초등학교 옆의 적산가옥
    지금도 고급주택처럼 보이는 적산가옥

     
    앞서도 여러 번 설명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곳에는 반드시 신사가 형성됐다. 삼판통의 일본인들 역시 신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중일전쟁에 즈음하여 '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라는 국가 차원급 신사로 변모했다. '게세 고고쿠진쟈'(경성 호국신사)라고 불렸던 이 신사는 악명 높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 지부 격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죽은 자들이 합사되었다.
     
    나아가 호국 영령을 추모한다는 명분 속에 한국인의 혼을 망가뜨리는 일환으로도 사용되었던 바, 한국인 지원병을 이끌어내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도구로도 쓰였다. 즉 그들의 침략전쟁에서 한국인이 전사했을 경우 이곳 경성호국신사에 위패를 모셔 기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의 신사가 대부분 국비나 거류 일본인이 갹출한 기금에 의해 설립된 것에 반해 경성호국신사는 한국인에 대한 강제 의연금이 징수됐고 근로보국대란 이름의 노동력이 징발되었다. 
     
    경성호국신사는 1941년에 착공해 1943년에 완공하였는데, 1941년 7월 7일의 기공식과 진좌제(준공식)에는 이광수, 모윤숙, 노천명, 정비석 등의 친일파 문인들이 참석하거나 축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신사는 해방과 더불어 사라졌지만 1943년 완공된 신사 진입로 표참도(表参道) 계단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후암동 108계단이라 불리는 이 계단의 중앙에는 2017년 주민들의 편의를 위한 경사형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다. 이 에스컬레이터는 2018년 완공되었으며 1~4층을 24시간 운행한다.   

     
     

    옛 경성호국신사 표참도 108계단 입구
    승강기로 인해 지금은 계단이 반으로 나뉘어졌다.
    왼쪽 계단
    오른쪽 계단
    계단 끝에 위치한 경성호국신사 계단 안내문
    계단을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예쁜 이정표와 오래된 골목
    계단 위에서 내려본 서울

     

    당시 경성호국신사의 규모는 2,2000평으로 지금의 보성여자중학교, 해방교회, 해방촌성당, 신흥시장 일대가 모두 속했는데 신사 본당은 현재의 해방타워 자리에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이 본당 터에는 평양에서 내려온 숭실학교가 설립됐다. 일제강점기 평양 숭실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된 강한 민족정신의 사학으로 한국전쟁 후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신사 자리에 세워져 1970년대까지 존속했다.
     
    해방타워 빌딩 계단 주변에서는 경성호국신사와 숭실학교에 관한 안내문을 볼 수 있는데, 학교의 연혁과 함께 우리에게 익숙한 조만식, 윤동주, 함석헌, 김소월, 이중섭, 주기철, 한경직 등이 이 학교를 다녔음을 알려준다. 아울러 신채호, 이광수, 염상섭, 유명모 등이 선생으로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해방타워 앞 옛 숭실학교 알림 표석
    숭실학교 터 안내문
    경성호국신사 안내문

     
    해방 후 이곳 후암동 언덕에 자리 잡은 사람은 비단 숭실학교 인사들만이 아니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한 사람들과 빨갱이가 싫어 월남한 이북사람들이 대거 생활 터전을 마련했다. 그 일대가 해방촌으로 불리게 된 계기이다. 그들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주인 없는 옛 신사 땅이 이제는 기댈 언덕이 되었던 까닭인데, 이후 월남민 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이주민들이 몰려들며 오랫동안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로서 자리매김했다.
     
    그 중심지에 신흥시장이 있었다. 신흥시장은 해방촌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이 점철된 곳이자 활력을 제공하는 곳으로 일대에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가내수공업이 번창했다. 그중에서도 이른바 '요꼬'라고 불리던  스웨터 공장의 생산량은 전국 물량의 30% 정도를 점유했고, 사설 담배 공장에서 만들어낸 이름 없는 담배는 남대문시장에서 불법 유통되던 인기상품이었다. 하지만 노동집약적인 이 산업들은 1990년대 이후 제조공정의 자동화 및 유입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쇠퇴하고 신흥시장은 시장의 기능을 잃고 급거 쇠락하였다.
     
    그러던 곳이 최근 핫플이 되었다. 문화의 다양성과 사라진 옛것에 대한 막연한 향수 같은 것이 북촌과 서촌, 이화동 등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발길을 늘렸듯, 이곳 해방촌에도 젊은이들이 몰리며 인근의 이태원, 녹사평로와 연결되는 문화 중심거리가 된 것이다. 하마터면 슬럼화될 뻔한 이 거리에 찾아온 뜻밖의 변화가 기쁘기 한량없다. 해방촌의 진가는 해가 지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을 이르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몰리는 신흥시장 길
    신흥시장 내 골목길
    이 해방촌 오거리 길은 어떨 때는 떠밀려다닐 정도다.
    해방촌 오거리의 마을버스 / 여기는 마을버스도 귀염.
    해방예배당
    해방예배당은 월남민이 세운 교회이다. 당시 이북에는 이남보다 개신교인이 훨씬 많았다.
    헤방촌성당도 중심에서 빠질 수 없다.
    오거리 골목의 낡은 적산가옥도 웬지 정겹다.
    GeniusJW의 후암동 야경 사진
    Adobe Stock의 후암동 야경 사진
    2018년 8월22일 임준영 작가가 찍은 해방촌 신흥시장 거리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동네의 새 이름이 된 후암동(厚岩洞)은 한자 그대로 ‘두꺼운 바위’라는 뜻이다. 남산 자락의 크고 두터운 바위가 많은 이 지역을 마을사람들은 예전부터 '두텁바위골'로 불러왔는데 그 이름을 따 후암동이 된 것이다. 신사 자리와 적산가옥이 남아 있으며, 해방촌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머물렀던 이곳 후암동의 문화 다양성은 들여다볼수록 놀라운 구석이 있다. 아래 사진들은 그 후암동에서 서울역 쪽을 향해 걸으며 눈에 뜨이는 건물들을 두서없이 찍은 것으로, 어쩌면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를 현대사의 떠도는 편린들이다. 
     
     

    후암동 종점에서 보이는 투텁바위길과 남산
    건축가 나상진이 1963년 설계한 후암동성당
    후암동 성당의 안쪽
    성당 입구의 시기를 알 수 없는 건물
    막다른 골목길에서 마주한 적산주택들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의 집들
    바로 옆의 일본 창고를 개조한 집
    카페로 보이는 집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중한 근대건축물
    갑자기 나타난 네덜란드 집
    얘는 일본 천수각 같음.
    이해인 수녀의 시 '어느 날의 단상 I'이 쓰여 있는 올리베타노 성베네딕트 수도회 대문 기둥
    십자가와 전봇대가 컨트라스트를 이루는 골목
    수퍼 간판이 인상적인 어떤 건물
    서울역 대로변에 위치한 대비가 인상적인 두 건물
    후암동 바하이 한국본부 / '바하이교'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서 '여호와의 증인'과 함께 성공한 신흥종교로 꼽힌다.
    이건 또 뭐여? / 참고로 집어넣은 미국 샌디에이고의 바하이교 사원이다.
    샌디에이고 바하이교 사원의 부감
    연꽃 사원으로 유명한 인도 델리의 바하이 템플도 넣어봤다.
    이건 웬 자유당시대? /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올 법한 건물이 '후암상회'라는 어울리는 현판을 달고 있다. 바로 옆 선술집도 그 시절 분위기가 물씬하다. 바하이 한국본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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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