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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연(燕)의 쟁투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20. 19:35
사마천의 <사기> 권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따르면 '연나라는 밖으로는 만맥(蠻貉)의 압력을 받았고, 안으로는 제(齊)나라·진(晉)나라와 국경을 함께 하며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던 변방의 가장 약소한 나라로서 여러 번 멸망의 위기를 겪었다'고 되어 있다. (燕外迫蠻貉 內措齊晉. 崎嶇彊國之閒 最為弱小 幾滅者數矣)
즉 연나라는 춘추시대를 거치며 멸망하지 않고 존속되기는 했으되 강국 제나라와 진(晉)나라에 치었는데, 그나마 멸망하지 않은 것은,
1. 제나라가 여러번 도와줌
2. 진나라가 한·위·조의 세 나라로 분리되며 세력이 약화됨
3. 만맥의 침략이 나라의 존망을 위협할 정도는 되지 않았음
정도의 이유를 들 수 있는 것이다. <사기>에서 말하는 만맥, 즉 맥족 오랑캐는 맥족의 고조선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연나라의 장성은 북·서로 압박해 오는 고조선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었다.
전국시대 '연'의 위치 최근 북경 방산유리하(房山琉璃河) 유적지에서 발견된 연나라 청동 제기
아무튼 위치상 연나라는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던 관계로 자주 충돌했다. 까닭에 연(燕)은 한국사와 가장 연관성이 있었던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로 사서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래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 과연 두 나라의 국경은 어디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고조선의 영토를 비정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학자 리지린*의 학설을 신봉할만하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두 나라의 국경은 기원전 5~4세기 때까지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였고,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서쪽 영토를 상실한 후로는 요동성 대릉하가 국경이 되었다.
* 리지린은 1960년대 초기 북경대학 고힐강(顧頡剛, 1893~1980)에게서 고조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조선 전문가로서, 한국전쟁 때 납북된 위당 정인보의 학설을 계승한 학자로 보인다. 그는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에 주석된 요수를 요하로 인식하고, 지금의 요동 해성(海城)을 험독(險瀆)으로 이해하여 그곳을 준왕과 위만의 치소(治所)였던 왕검성, 즉 고조선의 수도로 보았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후한 응소(應邵)는 왕검성에 대해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인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왕검성에 대한 한대(漢代)의 거의 유일한 지적인데, 리지린은 험독을 요동 해성으로 보고 고조선의 (후기) 수도를 평양이 아닌 해성으로 비정했다. 따라서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는 자연히 요동반도에 국한된다. (※ 그런데 엉뚱하게 북한이 평양의 단군릉을 개축하고 지금의 평양을 단군왕검의 아사달이라 확정해 버리는 바람에 노력이 무색해졌다)
연나라는 <사기>의 내용 대로 처음에는 제(齊)나라와 진(晉)나라와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였으나 제환공 시절 제나라의 군사력을 빌려 고죽국 땅의 남부를 차지하면서부터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고조선은 서쪽 방면으로의 확장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결국 다른 방편으로써 동남부로의 확장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동 지방의 부족 국가들을 점차적으로 복속시켜 나갔고,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수도를 아예 조양(朝陽)에서 요하 근처 요양(遼陽)으로 옮겼다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고죽국의 위치 고조선의 최대 영역과 조양의 위치 요녕성 조양시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비파형 동검 / 조양시 십이합영자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로, 고조선의 청동검이라는 설명은 물론 없다. 적봉, 우하량, 조양은 홍산문화권의 중심지이다. / 조양은 아침 햇살이라는 뜻으로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과 상통한다. 요양시(랴오량시) 타완촌 옛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기 거푸집 뒷면의 고조선인 얼굴 / 예의 상투를 틀고 있다. 1990년 위의 거푸집이 출토된 곳
연나라와 고조선과의 갈등은 매우 오래되었으니, <위략>에 따르면 기원전 323년경 천자국인 주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제후국인 연나라 역왕도 스스로 왕을 칭하였고, 즈음하여 고조선의 조선후(侯)도 왕을 칭했다.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323년경 고조선은 명실공히 왕국이 되었고 이것이 기원전 108년 멸망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자 연나라가 발끈하여 고조선을 치려했고, 고조선 왕 역시 연나라를 치려 했으나 신하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양 측은 군대를 물리고 화해를 한 적이 있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의 쇠약을 보았고 연나라는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들었다. 그러자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쳐 주나라 왕실을 받들려하였으나 대부 예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였고 연나라도 포기하며 공격하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약소국 연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하니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많은 실전을 치루면서 얻은 당연한 결과였다. 연 소왕(기원전 313~279년)이 즉위할 무렵만 해도 연나라는 제나라의 속국 신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소왕은 요즘 표현으로 도광양회(韜光養晦)하며 힘을 길렀고 기원전 285년 유명한 악의 장군이 제를 공격하여 멸망 직전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나 소왕이 기원전 279년에 사망하고, 뒤를 이은 혜왕이 제나라의 계략에 빠져 악의를 의심하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에 위험을 느낀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하고 제나라는 실지(失地)를 회복하게 되는데, 연나라가 이처럼 강성해지자 이번에는 고조선을 쳐들어온다. 이른바 '진개(秦開)의 침입'으로서, 사서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쟁이자 국제전이기도 하다.
'진개(秦開)의 침입'은 <위략>과 <사기>에 모두 기록이 보인다. 다만 그 내용이 조금 상반되는 부분이 있으니, <위략>에는 '연(燕)이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고조선 서쪽 지방을 침공해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은 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즉 '흉노의 인질로 잡혀 있던 연나라 장수 진개가 흉노의 신뢰를 받고 풀려난 후 연나라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키니 동호는 1천여 리나 후퇴하는데, 이후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여러 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에는 '연나라의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그 땅 일부를)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고 기술돼 있다.
대개 우리의 사서는 진개가 고조선 땅을 칩입해 2천리 영토를 빼앗은 것처럼 기술하나, 위 기록을 종합해 보면 훗날의 진번 땅인 동호(東胡, 고조선 서북쪽에 위치한 나라로 구체적인 종족명은 알 수 없다)와 고조선을 공격해 얻은 땅이 모두 2천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아무튼 연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해 국경을 만번하(滿番汗)까지 전진시키니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 때까지 중국과의 국경으로 유지되었다. (기원전 107년 우거왕 때 한나라 사신이 죽은 곳도 이곳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면 고조선은 연나라에 빼앗긴 요서와 요동 상당수 지역을 수복하는데 실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에는 연나라를 압박했던 만맥(蠻貉)의 세력이 왜 이렇듯 약해졌을까? 그게 그 말이겠지만, 고조선의 힘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연나라 세력이 강해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사서인 <삼국지 / 위지 동이전 한조>를 보면 조선은 여전히 자존심만은 굽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조선의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였다.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이후 진· 秦이 천하를 통일하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 조선왕 부·否가 즉위했다.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친조하지는 않았다)
연(燕)의 장성 소구성(蓟县城)이라 불리는 연의 장성은 훗날 명나라 때 개축된 것이나 최초의 장성은 동호(東胡)와 만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만맥은 물론 고조선이고 동호는 거란족으로 짐작된다.
앞서 말한 대로 연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맷집이 강해짐과 동시에 전투력이 향상됐고, 고조선은 주위의 고만고만한 나라들만 상대한 탓에 전투력의 진전이 없었다. 만일 국경분쟁이 일어나 북한과 중국 랴오닝성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아무리 전쟁 준비를 오래 한(물론 남한을 상대로서) 북한이라 해도 랴오닝성 지방군에게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두 지역은 덩치와 인구도 비슷하지만 랴오닝성의 군대는 결국 중국인민해방군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고조선의 영토 기원전 300년경의 확장된 연의 영토 기원전 260년 확장된 연의 영토
이는 흥미 있는 가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나라가 맞붙는 일은 없을 것이니, 북한 정권이 스스로 무너져 중국인민해방군이 진주하는 날에도 그저 무력하게 당할게 될 것이다. 압록강 건너 진군하는 중공군 탱크에 포 한발 못 쏴 본 채 말이다. 한민족의 역사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시종일관 이렇게 설정돼야 하는 게 심히 못마땅한데, 어떤 중국 새끼는 미래의 그날을 생각함인지 과거 한사군의 영토를 아래 지도처럼 그려놓기도 했다.
한사군의 영토 1 한사군의 영토 2 삼국시대 위나라에 속한 동쪽 영토 / 북한을 완전히 들어먹겠다는 속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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