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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마토 왜(大和倭)와 도래인
    잃어버린 왕국 '왜' 2024. 11. 28. 00:18

     

    '한반도 왜(倭) 실재론'으로 마음이 기울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사료들을 다 긁어 분석해 보아도 고대 왜국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그것이 6세기경 신라에 밀려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왜가 된 것인데, 이는 훗날 금나라에 밀린 요나라가 서진(西進)해 서요(西遼)라는 나라를 세운 것과 같은 양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진짜 역사는 사장(死藏)되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가짜 역사만 남았다.  

     

    한반도의 왜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은 1986년 도쿄대 교수인 인류학자 하니하라 가즈로(埴原和郞)의 주장으로 구체화된다. 하니하라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외양 등을 토대로 5세기 경의 도래인(渡來人) 수를 컴퓨터로 계산했다. 근거는 4세기까지의 일본 주민인 조몬인은 남방계 몽골로이드로서  머리가 앞뒤로 긴 장두(長頭) 단신(短身)의 특징을 가졌고, 반면에 한반도와 만주 사람은 단두(短頭) 장신을 보인다는 점이다.*

     

    * 한반도·만주인 중 장두형은 22명에 1명 꼴에 불과하며, 이 같은 장두형은 서양인들이 대종을 이룬다.(머리가 길다보니 아무래도 얼굴이 작고 입체적으로 보이지만 연면적은 비슷하다) 따라서 동양인은 모두 단두형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세계에서 단두형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 일대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알프스 일부 지방 정도이다.

     

     

    단두형
    장두형
    우리나라의 장두형(왼쪽)과 단두형(오른쪽) 인간

     

    하니하라의 주장은 흔히 '백만인 도래설'로 불린다. 조몬시대 말기(BC 300년경) 일본 본토의 약 7만6천 명이었던 인구가 나라시대(AD 700년경)에는 약 540만 명으로 늘었다는 것이니, 이러한 결과치는 1천년 간의 인구증가율이 연 0.4%를 넘는 것으로 세계 각지 초기 농경지대의 인구증가율 0.1%를 훨씬 상회하는 엄청난 수치이다. 즉 외부로부터의 러시가 없다면 나타나기 힘든 수치인 것이다.  

     

     

    하니하라의 베스트셀러들
    '일본인의 원류'는 핵 DNA로 조문인과 도래인을 분류한 책이다.
    치아를 이용해 분석한 책도 있다.
    하니하라 가즈로(1927~2004)
    '백만인 도래설'을 바탕으로 한 하니하라의 저서들

     

    하니하라의 산술에 의하면 1천년 후 조몬인의 인구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20만 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540만 명 중의 나머지 420만 명은 도래인이나 그 자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산하면 나라시대 일본 인구의 약 78%는 도래인이 차지하게 되는데, 그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왜인이었을 것이다. 하니하라는 이 계산을 근거로 야요이시대에 약 10만 명, 고분시대에는 약 100만 명의 도래인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련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의 유전자는 본래 본토인인 조몬계의 것은 30%에 불과하고, 70%는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계의 것인데, 나라 · 오사카 등 서부지역은 도래계의 비율이 훨씬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언뜻, 고대에 이와 같은 대규모 이주가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실연해 본 결과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주 수단인 배는 창녕 비봉리 패총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통나무 배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침판도 없이 어떻게...?  통나무 배로 남해 대해(大海)를 건너는 일은 분명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부산에서 보이는 쓰시마섬(50.5km)을 목표로 노를 저어 건너가고,  쓰시마섬에서 보이는 이키 섬을(50km)을 목표로 건너 간 후, 거기서 다시 일본 본토(20km)로 건너가면 된다. 이후 규슈에 정착할 것인가, 세토내해(瀨戶內海)를 타고 긴키(기나라 · 오사카 등지)로 갈 것인가는 취사선택이다.   
     
     

    2008년 경남 창녕 비봉리 패총에서 발견된 8천년 전의 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창녕 패총의 배
    김해박물관에 복원 전시된 배
    게놈 분석에 의하면 야요이 문화를 일으킨 야요이인(弥生人)은 한반도에서 건너 왔다.
    한반도에서의 문화 전파 방향
    이 만화에서는 일본인이 제 입으로 도래인이 일본인에 비해 훨씬 진보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측의 연구에 따르면 한·일 교류는 우리 교과서가 말하는 삼한시대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니,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문물의 교류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써 서부 규슈에서 발견된 한반도식 '이음낚시바늘'을 든다. 한일 양국에서 함께 출토된 이 '이음낚시바늘'의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는 기원전 6000년까지 소급된다. 일본에서는 이 결합법을 신석기시대의 도래인이 가르쳐 주었다고 보고 있다.  반면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일본 규슈 고시다카에서 나는 흑요석이다. 
     
     

    양양 오산리 출토 이음낚시바늘 / 국립춘천박물관

     
    이상으로 볼 때 고대부터 한반도에서는 바다를 건너 빈번히 일본열도를 출입했음을 알 수 있는데, 4세기 한반도의 왜(倭)가 멸망한 이후로는 왜인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야마토 왜(大和倭)를 건국하였다. 이때 전방후원분 축조기술도 전래되었은 물론이요, 지상 최대를 지향하는 엄청난 규모의 무덤 축조에는 식민지인들의 노동력이 소요되었음도 물론이다. 차제에 앞서 어떤 분이 '또 다시 발견된 한반도 왜왕의 무덤'에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 반박한 글을 해명할까 한다. (전문을 옮겨본다) 
     
    세계 최초의 전방후원분은 240~260년 무렵에 일본 나라현 아스카 지역에 축조된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입니다.그 규모만 해도 높이가 30m에 길이가 276m인 대형 고분입니다. 일본 아스카 왕궁 바로 옆에 있는 산맥 아래에 지어진 고분인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방후원분들이 그 일대에 지어지면서 일본 열도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다가 한국의 남부 지방에도 5세기-6세기에 축조되게 된 것입니다. 전방후원분 자체가 야마토 정권의 성립을 알리는 것이고, 그의 전파가 야마토 정권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첫번째 고분부터 한반도 고분과는 규모가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이 대단했다는 이야기죠. 하시하카 고분만 아셨어도, 한반도 왜가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정권을 만들었다는 황당한 주장은 안 하실텐데요. 많이 안타깝네요
     
    성의 있는 댓글이지만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분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 '임나'와 '왜'ㅡ 왜 '왜'를 두려워하는가?'에서 거론한 바 있다. (아마도 이 글은 읽지 않으신 듯하다) 그리고 하시하카 고분보다도 훨씬 큰  다이센(大仙) 고분도 사진과 함께 올려(고분시대의 다른 무덤들과 더불어) '한반도 왜'와의 연관성을 설명한 바 있다. 재론하자면 다이센 고분은 외관 525m, 봉분 길이 305m, 후원(後圓)의 지름 249m, 높이 34m의 세계 최대 무덤으로, 흔히 닌코구(仁德)천황(257~399)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5세기경 축조된 고분으로 실제 주인공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라현 야마노베노미치(山の辺の道)의 하시하카 고분
    세계 최대 고분인 오사카 다이센릉 고분

     
    이것은 우리가 경주 신라시대 왕묘의 피장자를 거의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확실한 무덤은 태종무열왕릉, 원성왕릉, 흥덕왕릉 정도이고, 나머지 53개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삼국은 통틀어도 '꼼짝 마'는 지석이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 정도) 일본도 같은 상황을 보이고 있는 것인데, 다만 위의 분이 말씀하신 대로 하시하카 고분이 길이 28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240~260년 무렵에 축조되었다는 것은 그저 전하는 말에 불과하고 사실은 다이센 고분에 조금 앞서는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 일본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이다. 역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야마토토토히모모 소히메노 미코토(倭迹迹日百襲姫命)의 묘지로 알려져 있는데, 야마타이 국의 여왕 히미코의 묘지일 가능성도 있다 하고, 한편으로는 야마토토토히모모 소히메노 미코토와 히미코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야마토토토히모모 소히메노 미코토는 이른바  왜국대란(倭國大亂) 시기의 인물로 다케하니야스히코노미코토(武埴安彦命)의 반란이나 키비쓰히코노미코토(吉備津彦命)에 의한 우라(温羅) 정벌, 다케메나카와와케(武渟川別)에 의한 이즈모후루네(出雲振根) 살해 등과 연관시켜지기도 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이 왜국대란을 도래 왜인(倭人)과 본토인과의 분쟁으로 여기고 있다.
     
    앞서 '교토국제고 교가에는 동해 바다를 건너 야마토 왜를 세운 왜국의 역사가 실려 있다'에서도 말했거니와, 지금 일본에서는 야마토 정권이 3~4세기 경 성립했다는 학설은 아예 폐기되고, 7세기가 정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일본내 역사 시험문제에서 고대국가 성립 시기를 3~4세기로 하면 정답이었지만 지금은 오답 처리된다. 3~4세기 경 강력한 중앙집권제 나라의 건국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철의 제련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3세기 고분으로 알려진 호케노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살포(撒布)나 구로즈카 고분에서 Y자형 유자이기(有刺利器)는 설령 그 고분을 3세기 것으로 인정한다 해도 같은 3세기 것인 신라·가야의 것에 앞설 수 없다. 만일 동시대의 것이라 하면 틀림 없는 수입품이다. 당시 제련기술이 없어 철(鐵) 소재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에서 한반도의 것에 앞선 철기를 가졌다면 어불성설이니 일본학자들조차 그와 같은 무모한 주장을 펴지 않는다.
     

     

    경남 함안 출토 유자이기와 가야의 철갑옷
    경주 덕천리와 대구 서변동 출토 유자이기
    경주 구정동 출토 유자이기
    경남 함안 출토 매매용 철정

     
    이에 관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그대로이다.
     
    "변한에서는 철(鐵)이 생산되어 한(韓) ⋅ 예(濊) ⋅ 왜(倭)가 모두 와서 사갔다. 여러 시장에서의 매매는 모두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錢)을 쓰는 것과 같았다. 또한 변진은 철을 두 군(郡: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 
     
     중국 삼국시대(220~265)의 정사(正史)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얘기라는 것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인데, 다만 이 시기에 왜(倭)가 한반도에 존재하는 나라였다는 사실 만큼은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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