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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사년 벽두에 찾아본 남산 갑오역기념비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 1. 20:36

     

    앞서 '서울의 노기(乃木) 신사'라는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것이 2019년 12월로 벌써 5년 전이다. 이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남산 노기신사 터를 들렀는데, 일대는 여전히 공사 중이다. 여기서 일대라 함은 남산 밑 예장동 8번지 부근의 옛 조선총독부 터, 노기신사 터, 경성신사 터, 갑오역 기념비 터 등으로,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일대 16만7000㎡에는 미래 창조산업, 즉 확장현실(XR), 영상, 미디어, 웹툰, 게임 분야를 지원할 산업별 인프라 6개소가 2027년까지 조성될 예정이다.  이른바 '서울 창조산업허브' 계획이다. 

     

     

    서울  창조산업허브 공사 현장 앞의 푯말
    공사 중인 옛 노기신사 터

     

    여기서 옛 조선총독부 터, 노기신사 터, 경성신사 터에 대해서는 누차에 걸쳐 언급되었던 바, 오늘은 갑오역 기념비 터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겠다. 서울 창조산업허브가 완공되면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설치됐던 장소에 대해서는 최소한 표석 하나는 설치되겠지만  갑오역 기념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을 것이다. 이제껏 그래왔는데, 새삼 이것을 주목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념비는 우리 민족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바, 을사늑약 120년이 되는 2025년 을사년을 맞아 사라진 그 기념비를 돌이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우선 뜻부터 설명하자면 '갑오'는 갑오농민전쟁, 즉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을 말하며, '역'(役)은 전쟁을 의미하는 일본어이다.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노 에키,(文祿の役) 정유재란을 게이초노 에키(慶長の役)라 부른다. 분로쿠와 게이초는 저들의 당시 연호이다. 

     

    그렇다면 1894년 갑오년과 제국주의 일본과는 무슨 관계가 있어 남산 입구에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일까? 아래 푯말 밑에는 그에 대한 짧은 설명이 붙어 있다. 일단 그 설명과 갑오역 기념비의 모양새를 보자. 

     

    '갑오역'은 1894~1895년 청일전쟁을 뜻한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일본군 전사자 일부의 유골을 남산 북부 언덕에 비밀리에 묻고 추모 기념비를 세웠다. 

     

     

    위 푯말의 정면
    1899년 세워진 갑오역 기념비
    갑오역 기념비와 주변 / 왼쪽으로 명동성당과 일본 절 동본원사, 오른쪽으로 조선통감부 건물이 보인다.
    1908년 왜성대 공원이 조성된 후의 사진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기념비는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봉기에 진압군으로 참여한 일본군 및 그 봉기로부터 촉발된 청일전쟁 기간 중 사망한 일본군의 충혼비이다. 당시 서울에 살던 일본 거류민들은 왜성대 일대의 거류민을 중심으로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중 죽은 일본군의 충혼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3,000원(圓)의 기부금을 모았다.

     

    그들은 그 돈으로 오사카 포병창에 제작을 의뢰하였다. 오사카 포병창은 대구경 화포를 주로 제작하던 아시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으로, 그에 걸맞게 큰 포탄 위에 뾰족한 창검을 세운 기념비를 주조했다. 이 기념비는 군함에 실려 인천으로 운반됐고 다시 경성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 거주 지역인 왜성대에 세워졌는데, 위 장소가 특별히 지정되었던 것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파견한  제5사단  오시마(大島義昌) 소장 휘하의 혼성 여단(일명 오시마 여단)의 포대가 포를 설치했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목할 것은 이때가 1899년으로 조선의 주권이 버젓이 살아 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조선이 식물국가로 전락한 때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6년 전인 1899년에 일본은 이 흉물스러운 기념물을 제멋대로 세웠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기념비 아래 양화진 등지에 가매장되었던 일본군 전몰자의 유골을 옮겨 파묻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이 대한제국의 수도 경성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함에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을 정도로 이미 대한제국은 무기력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황실은 전제주의 러시아 짜르제(制)를 흉내 낸 일극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미쳐 있었고, 신하들은 딸랑거리며 사익(私益)만을 챙겼으며, 언론은 그 일극체제를 칭송하는 데 필력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가 근대적 입헌군주제를 향해 나아가고 바로 옆나라 일본마저 그것을 지향해 나아가고 있었음에도 오직 대한제국만이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전 근대적인 러시아 짜르제를 받아들여 황제 일극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벽두 <황성신문>은 "금년은 광무 4년이오, 금일은 1월 1일이라. 큰 뿔 술잔을 들어 황제폐하의 만세와  황태자 전하의 천세(千歲), 2천만 동포의 문명을 축하하노라"는 논평을 냈다.

     

     

    1904년의 고종 황제 / 미국인 윌라드 디커먼 스트레이트가 찍은 사진이다.
    숏다리가 두드러지는 황제 사진 / 그 무렵의 강국 프로이센식 투구와 복장을 갖췄음에도 전혀 황제다운 위엄이 실리지 않는다. 황태자는 더 쪼다 같다,

     

    그 황제 폐하와 황태자는 결국 나라를 일본에 들어 바쳤고, 조선은 총알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나라가 넘어갔다. 세계 망국사에도 이런 경우가 드물 터인데,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은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짐은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국가를 양도할 것을 결정했노니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민생 복리를 위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대일본제국 통감 데라우치와 잘 상의하여 협정하고, 여러 신하들은 짐이 뜻을 세운 바를 체득하여 받들도록 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황제로서의 마지막 말이었다. 

     

    황제의 위임장을 받은 총리대신 이완용은 남산 통감부로 가 통감 데라우치와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했다. 온갖 오욕이 점철된 그 장소는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경성신사 오르는 계단만이 옛날을 말해준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새해 벽두, 그 계단 및 새로이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의 절규가 새겨진 통감부 통감관저 터를 거쳐,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정책이었던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 터까지 걸어보았다. 일부러 찾아온 호젓한 길이건만, 그럼에도 마음은 내내 답답하고 무릎까지 아파온다. 

     

     

    일제강점기의 조선통감부 / 1906년 설치된 통감부는 1910년부터 총독부가 되었고 1926년까지 사용되다가 이후 경복궁 앞 신청사로 옮겨졌다.
    '서울  창조산업허브'가 조성 중인 통감부 터 / 멀리 옛 경성신사 계단이 보인다.
    옛 경성신사 계단 및 갑오역 기념비가 있던 곳
    숭의여대 본관 화단의 경성신사 초석
    숭의여대 본관 자리에 있던 경성신사
    일대의 지도 / 노기신사 터, 경성신사 터, 갑오역 기념비 터. 부속 신사로 텐만궁(天滿宮), 이나리신사(稲荷神社), 하치만궁(八幡宮)이 있었.다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 터
    당시의 굴욕을 지켜봤을 통감관저 앞 은행나무
    토지조사기념비 터 / 1927년 7월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정책이었던 토지조사사업의 완결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가 있던 곳이다.
    토지조사기념비는 1966년에 철거되고 1969년 6월 반공청년운동기념탑이 세워졌다. 해방 후 건국과정과 한국전쟁 중 희생된 17,274위의 위패를 묻었다.
    이곳 목멱산방 아래 반공청년운동기념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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