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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 왜성대공원과 한양공원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 4. 22:36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은 인천항 개항 초기인 1888년 인천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조성한 각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이다. 각국공원이란 명칭은 이 공원이 주변 조계지에 사는 외국인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듯 보이는데, 공원을 설계한 사람도 우크라이나인 사바틴이다. 이 공원은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전경과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자유공원에서 본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
    맥아더 동상 앞 광장의 석양
    각국공원 내의 존스터 별장과 독일회사 세창양행의 숙소

     
    서울 최초의 공원은 종로 탑골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시기가 명확지 않으니, 입구 안내문에서는 공원 조성 연대를 1890년대라고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있다. 기타 대부분의 책에서도 '당시 개항장의 해관(관세청)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고빙되었던 영국인 총세무사 죤 브라운(Brown, J. Mcleavy)이 1897년 탑골공원 조성을 건의하였고 설계까지 맡았다는 썰'을 정설처럼 말하며(한국사 능력시험에서조차) 1890년대 조성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앞서도 지적한 대로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친일 김홍집 내각에 의해 임명된 브라운은 1896년 김홍집이 타살되고 내각이 붕괴되며 힘을 잃었다. 그리고 친러노선의 이범진·이완용(그도 처음에는 친러파였다) 내각에 의해 해관 총세무사에서 해촉되고 1897년에는 러시아인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바, 브라운은 공원개설의 건의까지는 몰라도 설계를 맡을 개제는 못되었을 듯 보인다. 
     
    실제로도 1899년 4~5월에 발행된 신문기사에서는 공원 조성으로 야기된 정부와 주민들 간의 마찰을 보도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민가 철거와  보상금 문제로 생긴 갈등으로서, 이를 보면 적어도 1899년 5월까지는 공원부지조차 마련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촬영 시기가 분명한 아래의 사진들이 그것을 증명하는 바, 탑골공원의 조성 시기는 1900년대 초가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1898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모델을 세워놓고 찍은 사진 / 공원 공사는 시작도 안 됐다.
    1902년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사진 / 주변 민가는 철거됐으나 공사는 시작되지 않은 듯하다.
    1903년 11월 공사중인 파고다공원을 찍은 영국 특파원 잭 런던의 사진

     
    그렇게 보면 서울 최초의 공원은 1897년 현 예장동 8번지 남산 북쪽의 현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에 조성된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의 수교 후 조선측의 뭉기적거림에 바로 공사관을 개설하지 못하고 1880년 들어서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에 공사관을 개설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정부는 일본 공사관의 사대문 안 입성을 노골적으로 꺼렸던 바, 도성 내 공사관 개설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임오군란으로 인해 청수관 내 공사관이 불탔고, 이를 기화로 1882년 8월 16일 비로소 입성해 남산 북쪽 자락 현  숭의여자대학교 부근에 자리한 이종승(李鐘承)의 집을 임시 공사관으로 삼았다.
     
     

    서대문 금화초등학교 정문 왼편의 청수관 터 표석
    청수관 내에 있던 천연정(왼쪽)과 향상회관 / 1923년

     
    <경성부사(京城府史)>에 따르면 이 공사관은 1884년 4월 16일까지 사용되었고 이후 종로 박영효의 집으로 옮겨졌다가 1885년 1월 12일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데, 그간 이곳 왜성대(임진왜란 때 왜군이 둔병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에는 상인과 같은 민간 일본거류민이 자리를 잡게 된다. 우선은 공사관이 곁에 있었고, 그곳을 지키는 일본군대까지 주둔하고 있어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거주지로 여겨진 까닭이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가(1894년까지 848명)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분위기가 싹 바뀌게 되니 청일전쟁 후에는 1,839명으로 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1906년에는 11,724명으로 불었는데, 이에 일본인들은 진고개(왜성대에서 명동성당에 이르는 길)까지 진출해 주거와 상행위를 하게 되었다. 
     
     

    <경성부사> 제2권 (1936)에 수록된 1895년경의 왜성대 모습 / 남산자락 일본공사관 아래로 일본인 주택이 가득하다. 일본공사관 건물 자리에는 1906년 통감관저가 들어서게 된다.
    1900년대 일본공사관 사진 / 공사관 아래 있던 일본인 가옥들이 철거되고 담장이 둘러 쳐졌다.
    2025년 촬영된 옛 왜성대의 흔적

     
    1937년 조선지방행정학회에서 출간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에 따르면, 거류 인본인들의 수가 불어난 1897년, 경성일본거류민의 오랜 숙원이었던 공원 설치의 논의가 있었다. 그 청원을 당시의 일본공사 카토 마스오(加藤增雄)가 맡아 경성부윤(서울시장)과 교섭한 결과 동년(同年) 3월 17일, 앞서 말한 갑오역기념비(甲午役記念碑)를 중심으로 약 3천 평의 땅을 영구임대하게 되었다.
     
    사실 일본은 1892년부터 왜성대 일본인 거주지 부근에 공원 부지의 임차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공원(Public Park)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바, 논의가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다 청일전쟁이 끝난 2년 뒤인 1897년에 영구임대 계약이 체결된 것을 보면 일본의 조선에서의 위상 강화가 여실히 증명된다. 갑오역기념비가 1899년 왜성대 공원 부지에 세워지게 된 것도 왜성대 공원 조성과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갑오역기념비 / 왜성대 공원 내에 세워진 일본군 전몰위령비로, 이 사진은 1907년의 것이다.

     
    왜성대 공원에 세워진 가장 두드러진 시설물은 경성신사(京城神社)다. 거류 일본인들은 1897년 공원부지의 영구임차가 성사되자 3백 원(圓)을갹출해 거류지로부터 공원에 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다. (현 리라초등학교 교정을 통해 숭의여대로 들어가는 직선 도로로 지금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해인 1898년 3천 원을 갹출해 대신궁(大神宮, 현 리라학원 자리)이라는 신사를 만들었고, 일본의 대빵 귀신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미카미) 이하 3명의 귀신에 봉사(奉祀)했다.
     
    아울러 휴게소와 분수, 주악(奏樂)이 가능한 공연무대가 꾸며졌고 벚나무 600그루가 식재되었다. 여기까지는 제법 공원다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1913년 대신궁의 사격(祠格)이 승격하며 1936년 경성신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위치도 현 숭의여대 본관 자리로 옮겨 크게 지어지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울러 주변으로 천만궁(天滿宮), 팔번궁(八幡宮), 도하사(稻荷社), 종무소 등의 부속건물이 지어지며 공원의 본래 기능이 상실되었다.
     
    어찌 됐든 일대는 해방 이후에도 공원용지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었던 바, 어쩌면 일대에 공원이 조성돼 서울 최초의 공원으로 기념될 뻔했다. 하지만 자유당 시절 공원용지로서 학교 설립이 불가능했던 이곳을 무임소 장관 박현숙이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압박해 건축 허가를 얻어냈다.
     
    이 자리에 장로교 계통의 숭의학원이 들었는데, 당시 경성신사 철거 과정에서 누군가 주초 몇 개를 보존해 반면교사로 삼는 뜻 있는 일을 해냈다. (숭의여대 본관 화단 앞에 주초가 있다) 이후 숭의학원은 1986년 삼풍백화점 소유주로 유명한 이준에게 넘어갔다가 삼풍백화점 참사 4년 뒤인 1999년 영안모자가 인수했다.  
     
     

    경성신사
    경성신사 배전
    경성신사 참도(參道)였던 숭의음악당 앞 계단 / 숭의음악당 자리에는 신사를 관리하는 종무소가 있었다.

     
    한양공원은 남산 자락에 지어진 두번 째 공원이다. 일제는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남산일대를 경성공원 부지로 고시하고 1910년에 왜성대 공원 서쪽 기슭에 공원 하나를 더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한양공원이다. 그 표석이 2002년 케이블카 승장강 부근 수풀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승강장 100m 위쪽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곳이 옛 한양공원 자리라고 오인되나 표석은 공원 중앙에 있었다. 한양공원은 훗날의 남산신사(조선신궁)를 포함한 30만 평의 방대한 규모였다. 
     

    한양공원 표석
    표석 주변 / 표석 높이는 165cm, 좌대는 55.5cm이다. .
    안내문

     
    한양공원은 1908년 왜성대 부지와 마찬가지로 경성부로부터 영구 임대했다. 이후 1910년 동쪽과 서쪽 2개의 지구로 나눠  여러 인공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던 바, 대표적으로 조선의 객사를 흉내낸 청학정이라는 건물을 지었고 부근에는 황조정을 지었다. (청학정 자리에는 1920년 조선신궁이 조성되며 신사의 본전인 신전이 들어서고 황조정 자리에는 배전이  들어선다) 황조정 아래  아래의 골짜기는 앵곡(櫻谷)이라 칭해졌고 그 아래 쪽으로는 전관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지어졌다.
     
     

    한양공원에 조성된 조선신궁 / 1925년 사진
    남산 쪽으로 본 조선신궁
    조선신궁 배전
    발굴된 배전 터 / 2020년 11월, 시범 공개 때 찍은 사진
    조선신궁 터의 1950년대 사진 / 조선신궁은 일제가 패망하며 신체(≒신주)는 일본으로 공수되고 건물은 스스로 불태우며 사라졌다. 이후 진주한 미군이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자신들의 예배처를 만들었다. (서울시립박물관 자료)

     
    한양공원 역시 1925년 조선신궁이 완공되며 공원의 역할을 상실하였다. 조선신궁에 대해서는 2020년 11월 남산공원 회복에 즈음해 쓴 '남산신사(조선신궁) 자리를 돌아보다'를 비롯해 이미 여러 차례 글을 올렸기에 새삼 덧붙일 말이 적다. 다만 위에 소개한 한양공원의 표석에 대해서만 몇 마디 짚고자 하는데, 우선 그 글씨는 이제껏 알려진 것과 달리 고종의 글씨가 아니라(위 안내문에도 잘못 쓰여 있다) 순종의 글씨로서, 당시 황제이던 순종은 1910년 5월 29일 공원 개원식에 친히 '한양공원(漢陽公園)'의 편액을 써 하사했다.
     
    아울러 그는 '청학정(靑鶴亭)', '황조정(黃鳥亭)', '전관정(展觀亭)'의 이름을 적은 염필(染筆) 을 하사하여 이 일본인 공원의 완공을 축하하고 빛냈다. 이것이 언뜻 이상하게 여겨질는지 모르겠으나 정확히 3개월 후 나라까지 일본국왕에게 양도하는 칙령을 발표할 황제이니 그 예행연습이라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2002년 이 표석이 발견될 때 뒷면은 쪼아져 판독이 불가능했으나 1925년 조선신궁 일대를 찍은 사진집 속 사진으로 내용이 해독되었다. 
     
    표석 뒷면은 메이지(明治) 45년(1912)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내용이나 반일 감정에 훼손된 듯하다. 사진집은 1937년 발간된 <은뢰(恩賴, 미타마노후유)>라는 이름의 양장본으로, 조선신궁 어진좌 십주년기념(朝鮮神宮 御鎭座 十周年記念)으로서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讚會)에서 편찬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陽公園記
    京城朝鮮之大都而闕觀游也久矣士民以爲/ 憾焉歲在於明治戊申有志胥謀設一大公園/
    相地于南山西端林壑蓊欝之處以請官允可/ 乃役夫經工撤土石而衷崇痺則崖峭而開道/
    路築月阿造風階再閱年而成命名曰漢陽公/ 園四時之景備眺望最佳矣莫哉京城居留民/
    團從有志之請管理之至于今日乃勒有志之/ 氏名以傅後
    明治四十五年三月 京城居留民團民長 古城菅堂

     
    한양공원기
    경성은 조선의 대도시이나 보고 즐길 곳을 결여한 지 오래인지라, 사민(士民)이 이를 유감으로 여겼더라. 그리하여 때는 메이지(明治) 무신년(1908년)에 유지들이 일대 공원을 설치하기로 서로 모의하여 남산 서쪽 끝산림이 으슥하고 옹울한 곳에 자리를 정하면서 관(官, 한국정부)에 윤가(允可)를 청하였고, 이에 인부를 부려 공역을 거쳐 토석을 걷어내고 숭비(崇痺, 높고 낮은 곳) 곧 애초(崖峭, 낭떠러지와 가파른 곳)를 고르게 하며 도로를 열고 월아(月阿)를 짓고 풍계(風階)를 만들어 재열년(再閱年, 2년 이상이 걸리는 것)에 완성이 되니 명명하길 한양공원이라 하였는데 사시의 경치가 조망을 갖추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니리오. 경성거류민단이 유지의 청에 따라 금일에 이르기까지 이를 관리하였는데, 이에 유지의 씨명으로써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명치 45년(1912년) 3월 경성거류민단 민장 코죠 칸도

     
    여기에 등장하는 경성거류민장 코죠 칸도(古城菅堂, 1857~1934)는 경성의사회장(京城醫師會長) 출신으로 30여 년에 걸쳐 경성 재계의 실세이자 일본인 거류민사회의 거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찬화병원(贊化病院, 진고개 소재)을 운영했던 그의 동생 코죠 바이케이(古城梅溪, 1860~1931) 역시 의사 출신인데, 앞서 '간송 전형필과 필적했던 고미술품 애호가들'에서 말했던 광화문네거리 칭경비전 앞 만세문(萬歲門)을 자신의 집 앞으로 옮겨 놓았던 장본인이다.
     
     

    표석의 뒷면
    한양공원비는 정부지정 문화재가 아닌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양공원비는 본래 공원 중앙에 있었을 것이나 조선신궁 공사로 인해 남산3호터널 입구 독수리상 부근 언덕쯤으로 밀렸다가 2002년 재발견되었다.
    칭경비전 앞 만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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