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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왕산의 근거 박약한 국사당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1. 5. 21:26

     
    국사당(國師堂)은 조선시대 국가의 제의(祭儀)를 행하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신당이었다. 하지만 국사당과 설립과 관련돼 전래되는 이야기들은 국가적 차원의 것은 아니니, 민간 무속신앙으로 일환으로 조선초 국사(國師)였던 무학대사를 모셨던 까닭에 국사당이라 불렀다는 설과 함께, 태조 이성계에 얽힌 노파 부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이 존재한다. 후자에 대한 상세는 이러하다.  
     
    함경도 영흥(永興) 어느 마을에서 비를 만난 이성계가 모와 딸이 사는 허름한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피곤에 지친 이성계가 잠시 눈을 붙였는데, 집이 무너지며 대들보 세 개가 몸에 덮치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깬 이성계가 집주인 할머니에게 꿈 얘기를 하자 왕이 될 것이라는 해몽이 나왔다. 몸 위에 대들보 세 개가 얹힌 것은 한문으로 王 자를 뜻하니 필시 왕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딸이 그것이 말이 되냐고 따졌다. 엄연히 고려의 왕실이 있는데, 이 손님이 어떻게 왕이 되느냐는 논리적 항의였다. 그러자 노파가 이성계에게 버릇없는 딸의 뺨을 때리라 하였고 이에 이성계는 엉겁결에 따귀를 후려쳤는데 그만 딸이 죽고 말았다. 노모는 이로써 액땜은 했으니 오늘 일은 상호 발설하지 말자며 손님을 보냈다. 훗날 왕이 된 이성계가 그 집을 찾아보니 흔적도 없었고, 노모와 딸을 기리기 위해 한양 목멱산에 사당을 세운 것이 국사당이라는 전설이다.
     
     

    남산 국사당 / 아트코리아 방송 DB
    철거 직전의 국사당 / 1925년 6월 15일 자 <동아일보> 사진

     
    뭔가 빌려온 구석이 있고 찜찜한 구석도 있는 전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것이 전설의 속성이니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다. 아무튼 그런 토대 위에 지어진 건립 연대 미상의 이 사당은 1920년 일본인이 남산에 한양공원을 조성하며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5년 조선신궁이 세워지며 결국 철거되었다.
     
    조선신궁은 일본 귀신들의 대빵이자 일왕가(日王家)의 직계 조상신으로 모시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1912년에 죽은 메이지 일왕을 합사한 신사인 바, 조선의 무속신에 봉사(奉祀)하는 국사당과는 양립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국사당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가 최근 남산 팔각정 옆에 표석이 세워졌다.  
     
    여러 곳의 글을 살펴보면 이곳 남산 국사당이 인왕산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 인왕산에 있는 현재의 국사당은 역시 건립 연대가 불명확하며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집에 측간이 덧붙여진 형태다. 그런데 이곳 안내문의 내용은 위에 소개된 기존의 것들과 다르니, "조선시대에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것은 목멱신사로도 불렸다. 경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도 이곳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다"는 사뭇 높은 격을 과시하는 투의 글이 쓰여 있다. 
     
    아울러 19세기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 국사당 이름과 무신도에 대해 언급했다고 부기되어 있다. 그 무신도는 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 인왕산 국사당은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고 안에 걸린 모두 21점의 무신도는 모두 살펴보았다. 무신도는 신당 정면 및 좌우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다. 다만 사진을 찍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래 전의 국사당 사진
    나무위키의 국사당 사진
    국사당 안내문
    나무위키의 국사당 내부 사진

     
    일전에도 말한 대로, 밖에서 건물 사진을 찍으려고만 해도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박수무당 청년이 득달같이 달려들며 사진을 찍지 말라며 무섭게 소리를 질러댔던 바, 무신도 촬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어차피 대화가 되지도 않을 듯해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에 사진 촬영을 문의한 결과, 인왕산 국사당은 문화재가 아니라 민속자료에 속하고, 성격은 굿을 하는 굿당이며, 개인 건물이라 자신들도 가타부타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등의 자료를 통해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21점의 무신도는 1)창부씨, 2)곽곽선생, 3)별상님, 4)산신, 5)군웅대신 6)최영장군, 7)호구아씨 8)아태조(혹은 공민왕) 9)무학대사, 10)삼불제석 11)나옹화상, 12)칠성신, 13)용왕신 등인데 창부씨를 포함한 몇 점을 제외하고는 조악했으며, 채색도 날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질적인 면에서 볼 때 앞서 소개한 부군당 그림보다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국사당 무신도 원래 그림 아니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발견했다. <동아일보>, 1987년 7월 23일의 기사를 어느 분께서 캡처했던 것인데, 내용을 읽어보니 '역시 그랬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기사의 내용은 국사당 무신도가 남산에 있을 때와 현재의 그림이 다르다는 것으로서, 민속학자 등의 전문가가 남산 국사당에 걸렸던 전(前) 무신도의 사진과 면밀히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그림이 나중에 그려졌을 개연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즉 남산에 있던 무신도는 그곳 국사당이 훼철되면서 함께 사라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지금 인왕산의 것은 건물도 옛 국사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 집인 것이며, 그림도 전래의 무속도가 아닌 현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17호는 지정 취소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1992년 8월 가짜 황자총통 사건의 흑역사가 있다. 당시 해군본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사용된 화포인 별황자총통을 인양했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총통의 포신에는 "만력병신년(1596) 6월 제조한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 造上 別黃字銃筒)", "귀함(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는 명문까지 있어 학계는 물론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이에 총통은 곧  국보 제274호로 지정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골동품상이 만든 가짜임이 드러났던 바, 해군과 문화재청은 개망신을 당하고 국보지정은 취소되었다. 현재 국보 제274호는 영구결번 중이다.  
     
     

    총통 발견 기사
    총통에 새겨진 가짜 글씨
    가짜임을 보도한 1996년 6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
    남산 와룡묘 / 남산 중턱의 와룡묘는 중국의 제갈무후(제갈량)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성시기는 블명확하다. 중국 사람을 모신 사당은 있지만 우리의 국사당은 사라진 현실이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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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