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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 셔블 · 설울 · 서울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1. 8. 20:37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기하게도 서울은 다른 지명과 달리 순수한 우리말이라 달리 한자로 쓸 수가 없다. 그런데 또한 신기하게도 그 뜻을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더불어 어원을 아는 사람도 없다. 그저 옛부터 수도(Capital)를 서울이라 불렀다는 것 정도만 정설로서 통용되니, 미국의 서울은 위싱톤 D.C이고 일본의 서울은 도쿄이며 대한민국의 서울은 서울이다.
외국 사람도 서울을 '서울', 혹은 이에 가깝게 부르니 서구권에서는 '쎄울'(Seoul)로 발음하고, 아랍어로는 '씨울'('سيول')또는 '쑤울'('سول')이며, 일본에서는 '소우루'(ソウル)이다. 알바니아어로는 '서울'(Sëul)로 정확히 발음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쇼엃', 혹은 '셔엃'이라 부른다.(지방마다 좀 다르다)
다만 중국이 그렇게 부른 지는 겨우 20년 전으로, 중국은 오랫동안 서울을 한성(漢城, 간체자:汉城)이라 표기하고 '한청'(Hànchéng)이라 부르다가 2005년부터 서울시가 추천한 '으뜸 도시'라는 뜻의 수이(首爾, 간체자:首尔)를 택해 Shǒu’ěr로 발음하는데, 내 귀에는 '쇼헗', '셔엃', '쑈엃' 등으로 들린다.(흔히들 '서우얼'로 표기하는데, '서우얼'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중국이 오랫동안 통용된 한성의 표기를 바꾼 것은, 국제 사회에서 통일된 명칭 사용의 중요성 느낀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에 '수이'(首爾) 추천하고 그렇게 표기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인데, 중화권에서도 사실 불편을 느껴온 까닭에 이를 받아들여 '수이'를 채택했다. 이를 테면 서울대학교로 가야 할 우편물이 한성대학교로 가거나, 중요 문서가 한성화교학교로 발송된 경우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성북구 삼선동 삼군부 총무당 뒤의 한성대학교 건물 또 흔히들 조선시대에는 수도 서울을 한양(漢陽)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한성(漢城)으로 주로 표기됐으며 의외로 '서울'로 발음됐다. 16세기 표류해 온 하멜도 시올(sior)이라 불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서울'이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도읍을 의미하는 단어로 고착화되어 쓰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그것이 무려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유명한 '처용가'로, 양주동 박사의 해석본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셔블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서울 밝은 달에 밤 늦도록 놀며 지내다가)
드러자 자리 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둘은 내 아내 것이었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대 내해다마난 아자날 엇디하릿고
(본디 내 것이다 만은 -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우리가 잘 아는 '처용가'는 <삼국유사>에 나오며 과거 양주동 해석본이 교과서에도 실렸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 886)이 지방 순행 중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행차했다가 나쁜 일기 속에서 동해 용이 거느린 일곱 아들을 만나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 중이 한 아들이 헌강왕을 따라 수도로 가게 되는 바, 그가 곧 처용이다.
처용은 서울에서 급간이란 벼슬과 아름다운 아내를 하사받았다. 이후 어느 날 처용이 서울의 밤을 늦도록 즐기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침실에 가랑이가 네 개였다. 어떤 놈이 아내와 통간했던 것인데, 이를 본 처용은 화를 내는 대신 즉석에서 작사 작곡한 위 노래와 함께 춤을 추며 물러났고, 처용의 관대함에 감복한 상대는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했다는 스토리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참고로 말하면, 처용은 신라에 장사하러 온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人)으로, 당시 중앙아시아의 상권을 장악했던 소그드인은 멀리 신라와도 교역해 <삼국사기>에 속독(束毒, Sogd) 등의 춤을 남기기도 했다. 소그드인 사람들은 상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중국 당나라의 용병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니 안사(安史)의 난을 일으킨 안록산(安綠山)도 소그드인이었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크루다지바의 <왕국과 도로 총람>이란 책에서도 신라에 정착해 사는 서역인이 언급된다.
원성왕(재위 783~798) 능묘 앞의 서역인상 산낭(算囊)이라는소그드 고유의 주머니를 달고 있어 소그드인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처용가'는 말한 대로 번역문이고 <삼국유사>에는 당연히 한문(이두식 한문)으로 수록돼 있다. 거기서 '셔블'이라 번역된 부분은 동경(東京)으로, 원문은'東京明期月良'이다. 그렇다면 왜 양주동은 이 문장을 '동경 발기다래'라 하지 아니하고 '셔블 발기다래'로 번역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벌(徐伐)을 ᄉᆡᄫᆞᆯ, 즉 서라벌로 해석한 주인공으로 서라벌에서 서울이 연유됐다고 주장했다.
※ <훈민정음>에 있었던 순경음 비읍(ㅸ)은 진작에 사라졌다. (순경음·脣輕音이란 훈민정음 제정 당시 쓰인 자음으로 입술을 거쳐 나오는 가벼운 소리라는 뜻이다)
계림에서 바라본 금성(金城) / 멀리 첨성대가 보인다. 신라 수도는 서라벌, 금성, 계림, 동경, 경주 등의 변화를 겪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백과사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거, 서울이 '徐蔚'(서울)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여지승람>에 서울(徐蔚)이 서벌로 불렸다가 후에 서울로 변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는 것인데, 서울특별시 공식 블로그에서는 徐蔚(서울) 혹은 徐兀(서올)에서 음차되었다고도 설명한다.
또 서울특별시 블로그에서는 서울 토박이 배우 오현경(1926~2024)이 들었다는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성계가 정도전과 함께 백악산(북악산)에 올랐는데 그때가 3월이라 주변 산에 모두 눈이 쌓여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땅이 마치 눈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설울'이라고 했다가 서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유사한 설화가 인왕산 선바위 앞 안내문에 쓰여 있어 앞서 소개한 바 있다.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도록 설계하려 하였고, 정도전은 성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하였다고 한다.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하여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덧붙이자면, 태조 이성계는 선바위를 둘러싼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다툼에 선뜻 어느 쪽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폭설에 한양이 잠기는 꿈이었다. 깨어나 보니 정말로 눈이 쌓여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가 한양 도성 자리를 둘러보는데, 그동안 눈이 녹았다. 그런데 아직 선바위 쪽은 눈이 녹지 않았던 바, 눈이 녹은 곳을 기준으로 성을 쌓게 되었다. 서울 도성의 안과 밖은 이렇게 생겨났다고 전해지며, '서울'이라는 지명도 이때 나왔다고도 한다. 즉 설(雪) 울타리라는 뜻의 '설울'로 불리다가 서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무속의 메카 인왕산 선바위 / 풍화와 차별 침식으로 특이한 모양이 형성됐다. 선바위 뒷면 / 본래 앞뒤가 따로 있지는 않았겠지만..... 한양성벽 인왕산 구간 / 선바위는 성벽 바깥쪽에 위치한다. 아무튼 '서울'의 역사는 장구하니 <용비어천가> <월인석보(1459)> <두시언해(1481)>를 비롯한 수많은 15~16세기 한글 문헌에도 '셔ᄫᅳᆯ'(서울)이 등장하며, <하멜표류기>에서도 서울은 시올(sior)로 기록됐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우리가 '서울'을 공식 수도의 표기로 삼은 것은 해방 이후로 채 80년도 안 된다. 조선시대에 서울은 한성부,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京城府)였으며 1946년 8월 15일, 서울헌장이 공포되며 서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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