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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광동 보광사와 둔지미 부군당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2. 25. 23:37

     
    전국에 보광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이 적지 않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파주 보광사로, 대웅보전을 비롯해 은근히 많은 국가유산을 보유한 사찰인데, 최근에는 보광사 동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모두 9개의 국가유산을 자랑하게 되었다. 보광(普光)은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이 널리 사해에 미친다'는 뜻이라고 하니 사찰명으로는 더 없이 적합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보광사 대웅보전
    2023년 보물로 지정된 보광사 동종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남양주 천마산 아래에서도 보광사를 만날 수 있으니 남양주시 화도읍 수동리의 보광사가 그것이다. 이 절은 일반인에게는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계곡에서 추사 김정희의 글씨들을 대면할 수 있는 뜻밖의 장소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글은 사찰 입구 다리 앞 바위의 '碧波洞天'(벽파동천) 및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는 '石丈(석장)과 '紫蓮臺上'(자련대상)'이나, '찾아보면 더 있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계곡이 깊다. (☞ '임하필기에 기록된 천마산 보광사 중수기')
     
     

    입구 바위의 '碧波洞天'(벽파동천) 각자 / 벽파동천은 '푸른 물의 별천지'라는 뜻이다.
    한겨울에도 물을 콸콸 뿜어내는 경내 약수 터 / 불상 아래 서수(瑞獸)의 입에서 물이 나온다.
    보광사 대웅보전과 칠층석탑
    삼성각 앞 보호수 반송
    그림 같은 해우소
    김정희와 이유원의 글씨를 만날 수 있는 계곡

     
    오늘 말하려는 보광사는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에 있는 보광사다. 이 사찰은 신라 진흥왕 때 보광국사가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때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서울 보광동의 연원이 되었을 정도의 깊이는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은 무후묘(武侯廟)와 보광사가 한 데 엉겨 있어 이곳이 제갈공명의 사당인지 전래의 사찰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입구에도 '무후묘제전위원회'와 '보광사'라는 두 개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보광사 가는 길 / 이 같은 골목을 몇번이나 거쳐야 한다.
    이윽고 나타난 주택가 속 보광사

     

    무후묘는 물어보나마나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무후, 즉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모시는 사당임에 틀림없다. 남산에 있는 와룡묘처럼 이곳에도 제갈량의 사당이 들어선 것인데 언제 들어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관계자로 보이는 분께 물어보니 (스님 같지는 않다) 무후묘는 원래 용산 둔지방(屯芝坊) 둔지미 내에 있었으나 구한말 일제가 둔지미에 일본 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이곳 보광동으로 말려오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둔지미 마을은 현 용산 대통령집무실 서쪽에 있었다.

     

     

    둔지미 무후묘의 본래 위치 / 입구에 '일본방위연구소'의 지도를 게시했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둔지미에 일본 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하며 일대를 용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둔지미라는 우리의 고유지명은 상실되었고, 또 그곳에 살던 주민들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던 바,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옮겨간 곳이 당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였다.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둔지미에는 마을 토속 사당인 부군당과 제갈량 사당인 무후묘가 따로 있었으나 보광리로 오며 두 사당이 합쳐졌다고 한다. 

     

     

    무후묘
    입구의 안내문


    그렇다면 부군당은 보광사 산신각 같은 데에 흡수된 것일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으니 보광사는 산신각 같은 부속 건물은커녕 본당마저 있는 둥 없는 둥 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현무문(玄武門)이라는 현판을 이고 있는 문 안에는 단 두 동의 건물이 있는데 하나가 위의 무후묘요, 다른 하나가 아래의 건물이다. 보광사 건물이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사찰의 당우라기 보다는 무후묘의 관리를 위해 지어진 건물 같아 보인다. 당황스럽다고 할까, 황당하다고 할까?

     

     

    보광사라 일컬어지는 건물 / 왼쪽은 무후묘

     

    사실 이 같은 황담함은 사전에 예견돼 있었다. GPS를 켜 보광동 보광사를 검색하니 사찰 대신 보광동 무후묘가 나타났고, 부근에 가서도 절을 찾으려고 주택가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는 수고를 몇 번이나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같은 반전이 흥미롭기도 하다. 생각도 못한 무후묘를 볼 수 있는 덤도 얻었다.

     

    사당 안에는 가운데 제갈공명를 모셨고, 좌우에 산신, 당할머니, 청장군, 홍장군의 그림이 모셔져 있다. 흡사 제갈공명이 우리의 토속신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양새다. 위 설명문에 따르면 둔지미 마을 원주민의 후손들이 중심이 된 무후묘제전관리위원회가 조직되어 음력 10월 1일에 유교식 제사가 행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둔지미 마을 원주민의 후손들이 왜 제갈공명을 제사 지내는지...?  이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미치지 않는다. 

     

     

    중앙의 제갈무후
    좌측의 산신, 당할머니
    우측의 청장군, 홍장군
    마당의 일본식 석등
    후문에서 본 전경

     

    더 이상 물으면 곤란할 듯해 그쯤에서 보광사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훝어보았는데, 가면 갈수록 빈집이다.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빈 집이 너무 많고 또 너무 오래 방치된 듯해 을씨년스러움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하다. 이어 보광동 입구에서 만난 국적을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중앙아시아인들과 그저 무덤덤하게 스쳐갔는데, 또 다른 무리인 중국인들에게서는 언뜻 공포감이 느껴졌다. 왜 일까? 

     

     

    보광동의 비어 있는 집들
    보광동 입구의 이국적 거리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가 토종의 부군당을 잠식하고 전통의 보광사마저 시하(侍下)로 둔 현실을 목도한 오늘, 문형배 헌재소장대행이 엉겁결에 토설한 문제의 헌법재판소 TF에 4명의 중국인이 포함돼 있다는 내용의 커뮤티니에 대한 천재현 공보관의 해명이 있었다.

     

    천 공보관은 현행법상 헌재에는 외국인이 취직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중국인 침투 의혹이 있는 헌재 TF 명단을 공개하라'는 The Pubiic의 요구에는 '법률상 금지되어 있다'며 거부했다. 외모가 너무도 중국인인 이진 공보관의 출생지를 알려달라는 요구에도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여전히 뭔가 미심쩍다. 정말로 헌재에까지 중국인들이 침투한 것일까? (기사 출처 : 더퍼블릭/ https://www.thepublic.kr)

      

    문제의 인물들 / 성왕은 2014년 시진핑 서울대 연설 때 통역 서비스가 되는 헤드셋을 홀로 끼고 있지 않으면서도 다 알 알아듣고 즐거워 박수를 치고 있다. 오훤은 자신이 졸업했다는 서울 관악구 인헌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기이하게도 사진과 이름이 없다.
    이진 공보관 / The Pubiic 펌
    이진 공보관 관련 스카이데일리 기사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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