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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시 발견된 한반도 왜왕의 무덤
    잃어버린 왕국 '왜' 2021. 4. 22. 22:02

     

    올해 벽두에 전남 해남에서 고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기가 발굴됐다. 전방후원분은 문자 그대로 앞쪽은 네모지고 뒤쪽은 원형인 무덤 형태를 말하는데, 까닭에 장고형 고분이라 하기도 하고 열쇠구멍형 고분이라 불리기도 한다.(아래 광주 월계동 고분 참조) 이번에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그간 발견된 전남지역 13여 기의 전방후원분 중 가장 큰 규모(봉분 길이 82m 높이 9m)로 발굴의 성과 역시 가장 기대되는 무덤이었다.    

     

     

    이번에 발굴된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 전방후원분 / 전방분은 길이 38m, 폭 22m, 높이 8m이며 후원분은 길이 44m, 높이 9m로 전방분보다 약 1m 정도 높게 축조 되었다.(위키백과 사진)
    광주광역시 월계동의 전방후원분 / 좌우 2기로 왼쪽은 길이 45m, 오른쪽은 35m이다. 영산강 지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93년과 95년 발굴 결과 전방후원분으로 밝혀졌다.(위키백과 사진)
    월계동 전방후원분의 항공사진 / 장고형 고분, 열쇠구멍형 고분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조선 데이타베이스)

     

    오랫 동안의 수수께끼였던 그 무덤은 오래전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껏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학술 조사가 없어 많은 그간 사람들이 무덤이 열리기를 고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덤이 관계 기관에 의해 발굴되었다.(2020년 10월~2021년 2월) 하지만 발굴결과는 공개되지 않았고 무덤도 다시 흙에 덮여버렸다. 까닭에 무덤이 열린 사실조차 알 수 없었고, 다만 현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 지난달 한겨레 신문에서 그 사실을 보도하며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마침내 열린 무덤방 (한겨레신문 사진)

     

    말한 대로 이 수수께끼의 무덤은 소리 소문 없이 열렸다 닫혔다.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겨레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유는 간단했다. 무덤 내부가 5~6세기 일본 고분과 너무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발굴을 담당한 고고학자들은 긴장했고 얼마 후 작업이 중단되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괜히 섣부른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우파 세력에 이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다시피 임나일본부는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학설로 일본 우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까닭에 왜색(倭色) 짙은 이 무덤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으로 작용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으니, 2019년 한반도 남부의 고대 전방후원분에 대해 대서특필한 요미우리 신문과, 1996년 충남 보령에서 한반도에서는 드문 (반면에 일본에서는 흔한) 주구묘(봉분 주위에 도랑을 두른 무덤) 형식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일본 NHK에서 헬기까지 띄워 특집으로 다룬 사실은 한반도의 왜색 무덤에 대한 일본 우파의 관심을 실증한다.(☞ '임나일본부의 정체 II - 나주 옹관 무덤의 주인은?')

     

     

    임나일본부의 정체(II) - 나주 옹관 무덤의 주인은?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서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게 되면 거대한 고분들이 쉽게 눈에 잡힌다. 고분들은 어림잡아 백여 기로, 그것들이 너른 들판 가운데 위치하기도 했지만 군집을 이루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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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도 그런 걸 경계했을지 모른다. 말한 대로 이 무덤은 1990년대 두 차례 도굴을 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번 발굴에서 개배(뚜껑 달린 접시) 10점과 그 안에 든 조기 등의 생선뼈와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육류 유기물 덩어리가 검출되었는데, 이에 발굴자였던 조근우 연구원장(마한문화연구원)의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는 언급이 있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와의 관계를 아주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울러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는데, 무덤 내부에 판석을 마련하고 할석(깨뜨려 다듬은 돌)을 쌓아 벽체를 만드는 형식은 일본 북(北) 규슈와 사이토바루 고분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대 석실분의 형식이었다. 게다가 천장과 벽체에는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의 주칠 흔적이 남아 있었던 바,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의 한겨레신문 보도에  주목했다. 

     

     

    방산리 전방후원분 내부 모습 / 한겨레신문의 보도를 전재한 일본 '야후 뉴스'의 사진이다.
    일본 사이토바루 고분군 고분의 내부 /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일본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시(西都市)에 있는 3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으로, 전방후원분 31기, 방형분 1기, 원형분 약 300 기가 혼재한다.

     

    한국이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는 고대 무덤의 존재에 대해 일본에 쫄리는 이유는 임나일본부에 대항하는 논거를 아직 마련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무덤을 서둘러 덮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언제까지 모르쇠로 버틸는지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한심하고 딱하기 그지없다. 이와 같은 행보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니, <삼국사기>는 가짜이고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하는 일제시대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의 주장에 맞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셈이다.

     

    통돌 문짝이 엎어진 채 드러난 방산리 고분의 무덤방 입구
    석실 내부 / 길이 너비가 각각 4m가 넘고 천장 높이가 2m에 달하는 큰 방이다.(참고로 무녕왕릉 무덤방은 너비 2.4m, 길이 3.7m, 높이 3.1m이다)
    정비된 입구 모습
    사이토바루 고분 13호분 입구/ 내부는 공개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입구는 방산리 고분과 거의 같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앞서 말한 대로 본래의 왜국(倭國)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는 것뿐이다. 아울러 이것은 그간의 왜곡됐던 역사를 바로 잡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고대의 왜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고,(아래 지도) 그러한 까닭에 신라를 빈번히 침범할 수 있었으며,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의 진실이기도 하다.(☞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의 한판 승부')

      

     

    3세기경 왜의 위치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 <후한서> 동이전
     
    한은 대방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瀆盧國與倭接界) - <후한서> 동이전

    * 바다를 보고 마주하고 있으면 접(接)이나 계(界)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접'은 '접해 있다'는 뜻이고 '계'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 전문 보기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힌다 - 신라를 침략한 왜인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의 극우단체들에 의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다시 들춰지고 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4세기 일본을 통일한 야마토 정권이, 구체적으로는 진구(神功)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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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동원해 백제와 왜를 쳤던 것이니, 앞서도 말했거니와 왜가 한반도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는 팩트를 그대로 대입하면 비문의 해석은 따로 연구할 것도 없고 왈가왈부할 것도 없다. 아래와 같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신라 땅에) 오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 

     

     

    *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 전문 보기

     

    광개토대왕비문 속의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

    광개토대왕비문에 기술돼 있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붙은 고구려와 왜(倭)의 한판 승부 우리나라 전래의 역사 기록이 박약함은 앞서 '기록의 중요성'에서 충분히 떠들었다. 그 중 몇 줄을 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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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우리의 사학계는 그저 숨기기에만 급급하고 임나일본부를 내세우는 일본의 공격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팩트를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통설이 모두 뒤집히게 되는 바, 말할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오게 되고, 지금까지의 무지와 나태, 왜곡된 역사와의 타협 등을 인정해야 하므로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류 사학계의 버티기는 이제 한계에 이른 듯하다.

     

    * 이른바 재야사학자라는 사람들도 북방영토를 넓히는 데만 몰두해(그래서 지금은 어느덧 시베리아까지 진출했다) <일본서기>와 같은 1차사료의 연구에 소홀하다. 상대를 공격하려면 상대에 대해 연구해야 하거늘 웬 이상한 자료들만 잔뜩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 학계도 별 다를 게 없는 바, 까닭에 작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야심적으로 개최했던 가야 특별전은 임나일본부의 선전장으로 변모해 지탄을 받았고, 예정된 일본 순회전시도 취소되는 망신살 뻗치는 일이 생겨났다.

     

     

    가야특별전 '가야본성, 칼과 현'에 전시된 가야 갑옷
    가야특별전 '가야본성, 칼과 현'의 게시물 / 우리로서는 생소할 뿐더러 납득이 힘든 내용과 지명들이다.
    그밖에도 일본 사료에 의존한 내용들을 앞세워 큰 지탄을 받았는데 다행히도(?) 코로나 사태로 전시가 중단되었고 흐지부지 폐지되었다. 왜'와 가야와의 관계 정립은 사학계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다.

     

    앞서 말한 이마니시 류는 동경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한 사람으로 조선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교육한 조선사편수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자였다. 또 조선사편수회의 회장이었던 아리요시 쥬이치(有吉忠一)와 고문이었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위에서 말한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 발굴에 모두 참여했고, '대일본 황조(皇祖)의 발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 축조된 이 무덤군이 만세일계(萬世一系, 왕계가 한 뿌리로 이어짐) 일왕가(日王家)의 발상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3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던, 그리하여 중국에 그 점령지를 자신의 속국으로 인정해 달라는(언감히 백제까지 포함하여) 국서를 중국 송나라(중국 남조의 송, 420~479년)에 보내기까지 했던(☞ '<삼국사기>와 <송서>에 등장하는「왜」& 신묘년 기사') '왜'는 한반도에 있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대일본 황조(皇祖)의 뿌리라고 말했던 3세기 후반에 축조된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왜왕 무덤은 어불성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에 그들은 조선의 역사에서 '왜'를 아예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왜는 전설의 '신공황후(神功皇后)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세운 식민지, 즉 임나일본부로 만들었으니 신화가 역사로 둔갑하는 저자거리 재담꾼의 저급한 사례를 엘리트 학자가 답습한 것이었다.

     

    그런 자들이 '한반도의 왜국'을 가르칠 리 만무했을 터, 그들에게 배운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두계(斗溪) 이병도( 1896~1989) 이하의 모든 학자들이 '한반도의 왜국'의 존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배운 후학들 역시 '왜'의 존재를 알 길 없었는데, 가끔 튀어나오는 '한반도의 왜'는 위처럼 애써 무시했다.(지금 펼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왜'는 분명 한반도에 있었고 3세기 말~4세기에 걸쳐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앞서 말한 해류를 타고 자연스럽게.

     

     

    해류에 쓸려 온 규슈 사가현 가라스(唐津) 해안가의 한국 쓰레기
    같은 형태의 고분이 나타나는 한반도 남부 지역과 사가현 지역
    전방후원분의 발굴 지역
    북(北)규슈 고분군과 사이토바루 고분군(●)
    사이토바루 고분군 / 일본사학계는 이마나시 류의 주장에서 조금 후퇴해 북규슈의 고분은 3세기 말부터 6세기까지 축조된 무덤으로,(吉村靖德, 九州の古墳, 2015)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4세기 전반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北鄕泰道, 西都原古墳群, 2005) 한반도 왜인의 이주 시기와 더욱 일치된 결과이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항공 사진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위치
    사이토바루 고분 206호분
    사이토바루 고분 206호분 내부
    사이토바루 고분 170호분
    170호분에서 출토된 배 모양 토기
    시기적으로 볼 때 왜인들이 타고 온 배가 분명하거늘 이것을 신공황후가 삼한정벌 때 타고 간 배라고 선전하고 있다. 미칠 노릇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학계에서는 이렇다 할 대응 논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게 학문하는 나라냐?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전방후원분
    경남 고성 송학동의 전방후원분 /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왜국의 영역이 이곳까지 미쳤다는 방증이다. 내부를 주칠한 석실이 있었고 야요이계 토기가 발견되었다. 아래와 같이 명확한 전방후원분의 모습을 보였으나 안에 3개의 석실이 있었다고 해서 해방 후 3개의 봉분으로 탈바꿈됐다.
    일본은 1917년 일찌감치 이 고분을 발굴해
    야쓰이 세이이치라는 자가 이 그림을 그렸다. 안에 3개의 무덤이 보인다.
    그걸 일본을 의식해 이 따위로 복원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해남 방산리 전방후원분 / 80년대 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을 당시에는 자연 지형의 언덕으로 간주해 관리 대상에서 제외됐고 그런 사이 두 번 도굴을 당했다. 이마나시 류의 주장대로라면 일왕가의 조상이 여기 잠든 셈인데도.....
    연구원 측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처로 폐쇠했으나 5~9월 무덤 주구(도랑)의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기대해볼 일이다.
    海南北日面方山里にある長鼓峰古墳の外見。前方は四角形で後方は丸い墳墓の形である古代日本特有の墓の前方後円墳の典型的な形だ//ハンギョレ新聞社
    하지만 일본은 위처럼 한계레 신문 보도를 주목하고 있다. 한겨레신문은 "장고형 고분에서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철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 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며,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위에서 찍은 방산리 고분이다.

     

    ※ 이에 대해 영남대 인류문화학과 정인성 교수는 다음과 같은 반박의 글을 SNS에 올렸다. 

     

    한겨레 기사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자 일파민파가 되었다.
    마치 한국 학계와 당국이 호남의 전방후원분을 발굴 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고 주장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피장자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있을 뿐 한국학계에서는 이를 정확히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평가한다. 이를 주제로 해마다 국제학술대회를 주최하는데 은폐라니..저 고분도 조사후 고분 연구자들에게 아낌없이 공개 되었다. 다만 코로나 시국이라 공개행사가 축소된 것 뿐이었다.


    발굴이 끝난 고분은 활용 방침이 정해질 때까지 발굴구덩이를 복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뒷처리이다. 최근에 발굴된 쌍릉이고, 함안이고 창녕이고 모두 조사 후 복구처리하였다. 특히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판 고분은 안전상의 이유로 즉시 복구하는 것이 관례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 했는데 이 역시 엉터리이다.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 중에서 비교적 큰 고분이라 해야한다.
    삼국시대에 영산강 유역권에 일시적으로 전방후원분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학계의 상식이다. 반면 당연한 것처럼 일본열도에도 많은 수의 고인돌과 한반도식 목관, 목곽묘가 축조된다.


    오히려 반성해야 될 것은 이러한 교류와 상호작용의 고고학적 흔적을 학자들이 앞장서 침략과 식민지배의 당위로 삼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100년전 영산강 유역에서 처음 전방후원형 고분을 발굴했던 야쓰이는 이를 근거로 즉각 왜인을 소환하고 왜의 시대를 주창했다. 이마니시 등은 경주에서 신공황후를 열망하고 영남전역에서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아서 과몰입하지 않았던가. 제국군대가 남대문을 차지한 것이 자랑스럽고 1500년전의 영광이 재현된 것이라 광분하지 않았던가. 신라고분의 기원이 일본에 있다는 주장에는 말을 잃게 된다.


    지금의 한국학계를 폄하하기 이전에 이런 일본인 관학자들의 비학문적인 태도를 먼저 지적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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