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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별궁 자리에 지어진 원구단과 조선호텔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3. 14. 05:09

     

    최근 다시 남별궁(南別宮)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좀 더 포괄적인 정보(<조선시대 남별궁의 평면 구조와 변화>/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를 가지고 구글 어스를 검색을 해본 것인데 역시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다. 호텔 근방의 표지석과 일치하는 셈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은 남별궁을 허물고 1897년 그 자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인 원구단을 건립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자리였을까? 남별궁은 대체 어떤 곳이길래.....? 

     

     

    남별궁 터에 남은 유일한 옛 건물 황궁우
    이종서의 논문 ≪조선시대 남별궁의 평면 구조와 변화≫에 실린 남별궁 지도
    남별궁이 있던 자리

     

    남별궁이 있던 소공동은 조선초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동네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경정공주가 살던 집을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부른 까닭으로, 그 이름이 파생된 사연은 좀 슬프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명나라는 신생국 조선이 혹시라도 북원(北元, 북쪽으로 쫓겨간 원나라)에 붙을까 신경을 썼는데, 어느 날 그 차단 방법을 찾았다. 조선 국왕의 딸을 명나라 황족과 혼인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 이방원은 경정공주의 혼인을 서둘렀던 바,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면서 혼수로서 숭례문 안에 큰집을 지어준 것인데, 1583년 선조의 아들 의안군이 거주하면서 200여 칸의 대저택으로 개축되었다. 까닭에 이 저택은 임진왜란 때는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왜군들의 숙소가 되었고, 그 이후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명군의 숙소로 쓰였다. 1953년 10월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는 자주 이 집을 찾아가 명나라 장수들을 대접했던 바, 자연히 왕의 궁밖 거소(居所)를 의미하는 별궁(別宮)의 이름이 붙여져 남별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집은 왜란 이후로도 내내 중국 관원들을 대접하는 장소가 되었으니, 특히 칙사를 대접하는 영빈관으로 쓰여 사신 접대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영접도감과 예빈시(禮賓寺)가 아예 남별궁 안으로 옮겨지기까지 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남별궁 안 명설루(明雪樓)에는 글 좀 쓴다 하는 사신들의 시(詩)와 부(賦) 등이 걸려 있어 이를 모사하려는 선비들의 학구적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는데, 정반대의 이미지인 추쇄도감(推刷都監, 도망 간 관노비를 잡는 기관) 또한 남별궁 안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인즉 다분히 이채롭다. 

     

     

    드라마 ≪추노≫는 도망간 노비를 잡는 추노꾼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소재로써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남별궁에 있어 추쇄도감은 그저 곁방 신세였을 테고 주 기능은 역시 영빈관이었으니, 혹자는 이곳을 가장 높은 집이라는 뜻의 옥상궁(屋上宮)으로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은 임금이 있는 궁보다 더 큰 권세를 행사하였던 바, 낮에는 그들에게 바쳐지는 뇌물을 실은 수레가 청계천 광통교까지 이어졌고, 밤이면 성상납을 위해 행차하는 고관들의 애첩과 기생들의 가마가 줄을 이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중국총판상무위원공서(中國總辦商務委員公署)라는 기관도 그곳에 있었다. 이 길고 낯선 이름의 기관은 또 뭘까? 바로 청나라 공사관이다. 앞서 말했듯 중국은 정동의 각국 공사관이 사용한 '○○국공사관'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속국인 조선에 대해 다른 나라와 동등한 명칭을 공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남별궁 내에 '중국총판상무위원공서'라는 우월적 이름의 외교관저를 마련했다. 과거 남별궁에서 칙사를 모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대접하라는 뜻이었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필두로 이후 정동에는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벨기에(1901년) 등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들어서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를 형성했다.(괄호 안은 수교한 해임) 하지만 청국공사관은 저 혼자 남별궁 내에 위치하며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견지했다. (앞서 말했듯 이는 무능한 조선 정부가 자초한 일이었던 바, 특별히 중국을 원망할 일은 아니다)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제작한 ≪봉사도(奉使圖)≫ 속의 남별궁 / 네 차례나 조선을 방문했던 아극돈(1685-1756)은 세 번째 방문 때 사신 임무의 수행 과정을 그린 봉사도 스무폭을 제작하였는데 이 그림이 1999년 북경대 교수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정정남의 논문 ≪임진왜란 이후 남별궁의 공해적(公廨適) 역할과 그 공간 활용≫에 실린 남별궁의 건물 배치도
    과거에는 이곳에 위의 건물들이 있었다.
    정동 민겸호 대감의 집을 구입해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의 효시가 된 미국공사관
    미공사관 건물은 놀랍게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보수 전 사진임)
    정동에서 가장 화려했던 프랑스공사관
    프랑스공사관은 창덕여중에 터를 알리는 안내문만 남았다.

     

    하지만 청국공사관 중국총판상무위원공서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문을 닫아야 했다. (다만 조선 내 중국 거류민을 위한 영사관은 허용되어 과거 위안스카이의 군대가 주둔했던 명동 2가 83번지 일대로 옮겨가 자리를 잡는다. 현 중국대사관이 있는 그곳이다) 수천 년 동안 한민족에 군림하던 중국이라는 존재는 그렇듯 어느 날 갑자기, 마치 거짓말처럼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가장 기쁜 사람은 아마도 조선국의 국왕 고종이었을 것이다. 우장칭(오장경) 딩루창(정여창) 마젠충(마건창) 위안스카이(원세개) 등에게 시달림을 받던 고종은 드디어 두 발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단 잠을 자던 고종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황제의 상징인 대원수 정복을 입고 만군을 지휘하는 꿈이었다. 인간의 간절한 희망은 가끔 꿈으로 투영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물론 중국총판상무위원공서가 존속했다면 그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겠지만 그곳의 중국인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대원수 정복을 착용한 고종 황제 /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찍은 사진으로 여겨진다. 이때만 해도 젊어보이나.....
    1900년대 초의 사진에서는 팍 삭아 그간의 마음 고생을 짐작케 해준다.
    프로이센식 전투모를 쓴 고종 황제 / 1900년 사진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다른 나라 황제 / 독일의 빌헬름 2세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다. 고종은 1906년 빌헬름 2세에게 을사늑약의 원천무효를 호소하는 밀서를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고, 1907년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한 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지만 효력을 거두지 못했다.

     

    1895년 6월 20일, 고종은 때마침 올라온 예조판서 김병국의 상소에 답해 원구단을 짓도록 하였다. 장소는 과거의 남별궁 자리로, 중국총판상무위원공서의 중국인들이 떠나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당대의 최고 도편수 심의석은 장정 1,000명을 동원해 중국의 천단(天壇)을 모방한 원구단을 지었다. 천단은 중국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대부(大夫)는 사직(社稷)에 제사 지낼 수 없으며 제후는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는 법..... 고종이 원구단을 짓겠다는 것은 곧 황제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

     

     

    건설 중인 원구단 사진 / 가운데가 원구단이며 아직 철거되지 않은 남별궁 전각이 보인다.
    완공된 모습

     

    즉위에 앞선 1897년 8월 17일, 고종은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채택하고 이어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꾸었다. 바야흐로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0월 11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에 아가 하늘에 제사 지낸 후 제위(帝位)에 올랐다. 조선왕조 500년 만에 첫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니 이름하여 대한제국 광무황제였다. 이후 후궁 엄씨가 낳은 태자 이은(李垠)은 왕으로 호칭되어 영친왕이 되었고, 을미사변 때 시해된 민왕후는 추책(追冊)되어 명성황후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고종의 황제즉위식 사진은 경운궁(덕수궁) 대안문(대한문) 앞의 운집한 인파와 행렬 모습뿐, 그밖에는 변변한 게 단 한 장도 없다. 하지만 기록은 이 황제즉위식을 일본 경찰들과 기마대가 호위했다고 전하는 바, 청일전쟁 이후 일본과 청국이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문 제1조의 내용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재차 말하거니와 그 1조의 내용의 대단히 달콤하다.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무서운 구절임에도 조선은 아무런 생각없이 남이 수확한 실과(實果)의 단맛을 누리고 있었다. 전에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도 중국에 고명사신을 보내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이번에는 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제국이 되었다. 당시의 즉위식 광경을 전한 <독립신문>은 '대황제 폐하께서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시고 금으로 칠한 연에 올라 환구단까지 행차하시어.....'라며 요란을 떨었지만, 푸른 눈의 한 선교사는 그 위태로운 즉위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세상 어떤 나라의 황제즉위식이 이보다 초라하겠는가. 

     

    그로부터 10년 후 황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폐위되었다. 그리고 그가 천고(天告)의식을 갖고 제위에 오른 역사적인 원구단은 완전히 헐리고 일제가 건립한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다. 1913년 일제는 조선의 성공적 합병과 통치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박람회 성격의 기념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했는데,(이때 흥화문을 비롯한 많은 전각이 헐린다) 이에 필요한 숙박편의시설의 마련을 위해 원구단을 헐고 호텔을 건립한 것이었다. 

     

    조선철도호텔 자리에는 현재 웨스틴조선호텔이 들어섰으며, 그 과정과 경위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최근 '조선호텔 소유주'라는 검색어가 가끔 올라오는데 앞의 글을 검색하면 알 수 있다. ☞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

     

     

    완공된 조선철도호텔
    조선철도호텔과 황궁우
    조선철도호텔 테라스에서 본 황궁우 / 지금 웨스틴조선호텔 뷰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조선철도호텔 커피숍 / 커피를 마시는 여인은 그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이다.

     

    *  그 장소의 표기에 대해 원구단이 옳으냐, 환구단이 옳으냐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직 가려지지 않고 있다. '圜'은 '돌릴 환'으로도 쓰이고 '둥글 원'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원구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의미처럼 둥근 것은 곧 '하늘'을 의미하므로 당연히 원구단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거의가 동의하는 듯해 나도 그렇게 바꾸었으나, 문화재청에서는 위 <독립신문>의 기록 등을 근거로 환구단을 고집하고 있어 개운치는 않다.

     

    원과 환의 뿌리 깊은 혼란 / 1947년 한국은행에서 미국조폐국에서 찍어낸 1, 5, 10, 100, 1000환 지폐에는 '원'이라는 화폐단위가 기재돼 있다. 이 화폐들은 '원'으로도, '환'으로도 불리며 1953년 화폐개혁 때까지 사용됐다.
    다시 환으로 돌아온 화폐단위 / 1953년 2차 화폐개혁 이후로는 다시 '환'이 됐다. 園은 화폐단위일 때만 특별히 '환'으로 쓰였는데, 3차 화폐개혁 때도 '환'이 쓰이다가 1962년 4차 화폐개혁부터는 한자 園이 사라지고 '원'으로 표기됐다.  

     

    고종이 황제 즉위를 기념해 정궁 경운궁의 새로운 정전(正殿)을 마련하고자 만든 석조전(石造殿) 또한 1987년 착공되었으나 고종은 완공을 보기 전 폐위됐고,(1907년) 완공된 그 해(1910년) 12월에는 대한제국이란 나라조차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종의 야심작인 원구단과 석조전은 모두 그렇게 비운의 건물이 되었고, 일제는 석조전을 총독부미술관 건물로 이용했다. 

     

     

    석조전은 영국인 하딩이 19세기 서양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장대한 건물이다. 하지만 그저 돌로 지었다는 의미뿐인지라 왠지 이름이 없는 건물 같다.
    이씨 황실을 상징하는 파사드의 오얏꽃 문양이 선명하나 건물이 완공됐을 때는 이씨 왕조는 물론 나라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1904년 화재가 나기 전의 경운궁 모습으로 이때는 중화전이 중층 전각으로 되어 있다. 뒤에 보이는 서양식 건물은 구성헌으로 그 앞쪽에 석조전이 건립되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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