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광진구 능동의 유릉과 건축가 나상진의 클럽하우스

기백김 2023. 8. 26. 22:47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은 유릉이 있던 곳이다.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와이프였던 순명비 민씨(1872~1904)의 능으로서, 본래는 유강원(裕康園)으로 불렸다가 1907년 8월 순종이 황제에 오르며 순명비 민씨는 황후(순명효황후)로 높여졌고 유강원도 유릉으로 승격하였다. 서울 광진구 능동은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어린이대공원 내에는 유릉에 쓰였던 석물들이 남아 있는데, 안내문에는 '순명비 유강원 석물'로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설명이나, 이곳의 유릉이 순종 사후인 1926년 경기도 남양주 홍유릉(홍릉+유릉)의 유릉으로 옮겨 가 남편인 순종과 합장됐으므로 앞서 부르던 유강원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 같다. 유릉이 두 개가 되면 헛갈릴까 봐 그랬을까? 하지만 고종의 와이프 민왕후(명성황후)의 무덤이 있던 청량리 홍릉은 남양주 홍유릉으로 옮겨 간 후에도 여전히 홍릉이니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도 준다. 
 
 

유릉의 석물
석물 안내문


순명비 민씨는 1882년(고종 19) 순종의 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다. 순명비 민씨의 아비는 당시 세도가였던 좌찬성 민태호이고 오빠는 민영익이다. 그 두 사람은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칼을 맞았으나 아비는 죽고 오빠는 살았다. 그들이 칼을 맞은 것은 여흥 민씨 수구파의 대가리들이기 때문이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는 몰락하였고, 이후로도 민씨 세력은 내내 영달을 누렸다. 까닭에 순명비 민씨도 천수를 다하였다면 민왕후(명성황후)에 못지않은 권력을 누렸겠으나 불행히도 32살로 훙하였다. (순종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순명비는 민왕후와 달리 온순하고 차분하였으며, 무엇보다 검소하여 세자빈으로 들어올 때도 화장품함과 <소학>만이 개인 짐이었을 정도였고, 궁 안에서도 물건을 아껴 썼다고 전한다. 부정축재에 앞장섰던 그 일족들이 생각하면, 특히 세금을 펑펑 써대며 1등석 선편만을 타고 초호화 호텔 홍콩 빅토리아호텔 스위트룸을 애용했던 그 오빠 민영익을 생각하면 오히려 별종으로 여겨질 정도의 난 사람이었다. (민영익이 홍콩에 자주 머물렀던 것은 홍콩-상하이 뱅크에 예치한 고종의 내탕전 비자금을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유릉의 석물
광무 8년(1904) 유강원지 표석

 

유릉은 남양주로 옮겨지며 본래의 자리는 훼손되어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석물들도 여기저기 흩어졌던 것이 최근에 모아졌는데, 천장(遷葬)된 마당에 굳이 본래의 자리를 찾는 일은 무의미할 것 같다. 다만 그것이 길어야 100년 안쪽의 일이니 만큼 후대 사람들의 역사의식이 부재했던 점은 좀 아쉬우나, 다행스럽게도 석물들 근방에는 이와 같은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건물 하나가 서 있다.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설계한 한국 최초 클럽하우스 건물이다.
 
유릉이 있던 자리에는 1929년 5월 26일 골프장이 들어섰다.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은 일제의 강압으로 유릉 25만 평 중의 8만 평을 골프장 부지로 내놨고 울며 겨자 먹기로 2만 원도 공사비로 희사했다. 이후 이곳에는 한국사상 최초 18홀의 골프장이 만들어져 근방의 지명을 따라 군자리 골프장이라 불렸다.  군자리 골프장은 경성 골프클럽, 해방 후에는 미군 골프장이 되었다가 1953년 서울 컨트리클럽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73년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뀌었다.

 

 

서울 컨트리클럽 시절의 흔적?
옛 골프장으로 쓰였을 잔디밭에 어릴 적 지겹게 들었던 '새나라의 어린이' 노래비가 서 있다.1984년에 덕수궁에서 옮겨왔다.

그 땅에 1968년 건축가 나상진이 클럽하우스를 설계했다. 나상진은 김중업과 김수근에 앞서는 우리나라 토종 1세대 건축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1940년 전주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후 일본인 건축가 밑에서 현장생활을 하다 1941년 요즘의 건축설계사무소 격인 가시마쿠미(鹿)에 입사하여 해방되던 해까지 근무하였다.

 

그는 이후 명동에 독자적인  설계사무소를 열고(1952년) 140여 개의 건물을 설계했는데, 대표작으로는 남대문 앞 그랜드호텔(1957), 대한교과서(1958), 대구 파티마병원(1960) 새나라자동차 인천공장(1961), 워커힐호텔(1962), 후암동성당(1963), 중앙정보부 청사(1965), SC제일은행 인천지점(1969년) 등을 꼽을 수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경기도청사도 그의 작품이다.(1961/김희춘과 합작)

 

 

천주교 서울대교구 후암동성당
후암동성당의 전면
대구 파티마병원
석관동 중앙정보부 본청
수원시 팔달구 효원로의 경기도청사 구관
인천 신포로의 구 제일은행 인천지점
지금은 한우 숯불구이점으로 쓰인다.

 

나상진이 설계한 서울 컨트리클럽 클럽하우스는 그의 수평적 시선이 강조된 기념비적인 작품임에도 한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2010년 교양관이란 이름의 관리사무소로 사용되던 이 낡은 건물을 헐고 신축건물을 올리려는 서울시가 조성룡 건축가가 대표로 있는 건축사사무소에 용역 의뢰를 해왔던 것이었다. 이때 서울시가 보내온 건물의 설계도면을 본 조성룡은 깜짝 놀랐다. 건물의 건축기법이 당시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서구적 기법의 모던 양식이라는 것과,  이 건물의 설계자가 1세대 토종 건축가 나상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성룡 건축가는 서울시에 이 건물의 역사성을 설명하고, 신축 대신 리모델링을 권했다. 서울시청 최광빈 푸른도시국장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지하 1층, 지하 3층, 연면적 3,349.67㎡대한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던 바, 조성용 외 최춘웅, 박승진, 권웅규가 기술지도 위원으로 참여한 리모델링 공사가 2009년 12월 20일부터 2011년 4월 15일까지 진행되었다. 기본 방향은 '뼈대가 튼튼한 만큼 골조는 그대로 살리고 김상진 고유의 디자인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 2011년 4월 '꿈마루'라는 이름의 지금의 아름다운 복합시설 건물이 재탄생하였다.  

 

 

꿈마루의 외관
층별 평면도
2층 구석의 카페
2층 피크닉 정원 입구
3층 다목적 홀
3층에서 본 픙경
준공 기념 명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