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드문 선비 박세당 박태보 부자(父子)
성리학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피폐하고 가난하게 만들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기존의 유학을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새로운 형이상학 관점으로 해석한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집대성했기에 흔히 주자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안향이라는 사람이 들여와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 폐해가 여러 곳에서 드러났음에도 조선은 애오라지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이자 유일한 학문으로 숭상하다 결국 망국에 이르고 말았다.
17세기, 중국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오랑캐라 경멸해마지 않던 여진족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고, 일본은 임진왜란 후 조선을 통해 수입했던 성리학에 대해 허례가 지나치다고 비판하고 난학(蘭學,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들여온 서양학문)과 같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 무렵 오히려 성리학적 질서와 세계관이 더욱 강화되었으니, 실용적 학문은 배척받고 노비제와 남녀 차별 등과 같은 악습이 공고화되었다.
그래도 조선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윤증, 허목, 윤휴, 박세당 같은 선비는 주자 성리학에 좌우되지 않은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경전해석을 내놓았다. 백호(白湖) 윤휴(1617~1680)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맹(孔孟, 공자와 맹자)이 살아 돌아오다면 틀림없이 나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옳다 할 것이다"며 주자 성리학을 비판했으나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 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다.
그는 죽으면서 마지막 말을 글로 남기려 했으나 송시열에 의해 거부당했고, 이에 "뜻이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약을 마셨다. 박세당은 숙종 29년(1703) 그의 나이 74세에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비판한 것이 문제시되어 과거 <사변록>에서 기존의 성리학과 다른 주장을 한 일까지 소환되었다. 그리하여 그 역시 사문난적으로 지목돼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그 아들 박태보가 유배길에서 먼저 죽은 일, 그리고 고령인 점이 참작돼 유배를 면했다. 하지만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박세당은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현종 1년(1660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으로 출사했다. 이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병조정랑, 홍문관교리, 함경도 병마평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1667년 홍문관수찬 시절, 당대 사회의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는 응구언소(應求言疏)의 상소를 올려, 대내적으로는 백성을 위한 법률제도의 혁신과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대외적으로는 극단적 사대주의를 버리고 실리주의 정책을 취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로도 그는 사회제도에 관한 개선책을 꾸준히 헌상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무력감을 느낀 박세당은 40세에 이를 무렵 스스로 관직을 물러나 수락산 석천동에 들어와 칩거했다. 지금의 경기도 의정부시 동일로 128번길 36이다. 그는 조정의 부름에 일절 응하지 않고 이곳에서 손수 농사를 지어 살면서 찾아오는 후학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위한 실질적 농서(農書) <색경>을 저술했다.
아울러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사변'(思辨)은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낸다'는 뜻으로서, 모두 1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1책이 <대학>, 2책이 <중용>, 3책이 <논어>, 4~5책이 <맹자>, 6~9책이 <상서>, 10~14책이 <시경>을 재해석한 내용으로 꾸며 있으나 <중용>은 채 완성을 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쓴 <중용주해>가 당시의 정계와 학계에 하도 물의를 빚은 때문으로 보이는데, 결국 뒤로 미루다 죽음을 맞았다.
그의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 1654-1689)도 전형적인 선비였다. 그는 숙종 3년(1677)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거치며 올바른 언관(言官)으로서의 입지를 굳힌 후 소론의 핵심 인물이 되어 아버지 박세당에 이어 소수파인 소론 당파를 이끌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강직해서 그릇된 일에 대해서는 왕과 대비에게도 직언을 서금지 않았다. 그는 병조좌랑 시절, 대왕대비의 과한 잔치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봄과 여름에 건조하고 가물어서 호남과 영남이 모두 적지(赤地, 초목이 나지 않는 땅)가 되었는데 진연(進宴, 궁중 잔치)을 행함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도랑이나 골짜기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잔치하여 즐기며 하루를 즐겁게 해 드려 효도하는 것은 공자께서 말한 효(孝)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임금은 "이 진연은 실로 정례(情醴)로서 그만둘 수 없다. 모든 낭비가 될 만한 물건은 마땅히 줄여서 간략하게 하도록 하라"고 답했다. 미관말직인 박태보의 상소를 받아들인 셈이었다. 그는 또 사간원 정언 시절, 오늘날의 복심(覆審) 제도와 같은 계복(啓覆, 임금에게 아뢰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을 다시 심사함)이 소홀해지자 소(疏)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에 계복을 정지하셨는데 지금 또 정지하고 폐(廢)한다면 경신년의 죄수가 그대로 옥중에 지체되어 임술년 섣달그믐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사형시켜야 마땅한 자를 3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지체하게 함은 실형(失刑)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살려야 마땅한 사람에 대해 장기간 옥사(獄事)를 지체시키면서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충분히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들이고 화기(和氣)를 손상할 만합니다. 따뜻한 방의 고운 방석 위에 편안히 앉아 수작(酬酢,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심)하는 것보다는 어가(御駕, 임금의 가마)를 타고 옥중을 드나들면서 수고롭게 추위를 무릅쓰며 죄인의 진실을 따지는 것이 당연히 힘듭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민심의 화기가 손상되는 일은 없습니다."
따뜻한 방에 앉아 술만 마시지 말고 형을 받은 죄인이 소청을 하면 감방에 나아가 그가 진실로 죄가 있는지를 한번 더 살피라는 충고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울러 박태보의 불경스러운 상소를 처벌하라는 주위 아첨배들의 진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689년 기사년의 환국(換局) 때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1689년 숙종은 계비인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후궁 희빈 장씨(장희빈)가 낳은 왕자를 세자로 세운 후 이에 비판적인 노론을 실각시켰다. 이때 다시 젊은 박태보가 정치적 색깔과는 무관하게 오직 대의(大義)로써 숙종의 행위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심과 하늘의 뜻은 억지로 어길 수 없습니다. 아녀자들끼리 서로 모함하고 알력이 생긴 것을 정치에 반영시킴은 옳지 않습니다...."
숙종은 크게 분노했다. 결국 박태보는 음력 5월의 무더운 밤,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혹독한 장형(杖刑)을 당하고, 무릎 밑을 사금파리로 으깨는 압슬형을 당하고, 벌겋게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낙형(烙刑)을 당했다. 얼마나 심했던지 정강이가 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나왔으나 박태보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고, 당황하는 나장(羅將)에게 오히려 자신의 도포를 찢어 묶으라며 담담히 말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나 대신 초주검이 되어 전라도 진도 유배길에 올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노량진 부근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이때 충신의 귀양길을 보겠다며 장안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늙은이들이 앞다투어 그가 탄 가마를 들겠다며 나섰다. 아녀자들 가운데는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 군중 가운데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도 있었는데, 박태보가 강을 건너 사육신 사당 앞 민가에 머물 때까지 따라와 아들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어쩌겠느냐? 그저 조용히 죽어 마지막을 빛내라."
아들은 뜻을 따르겠노라 답하고는 얼마 후 숨이 끊어졌다. 훗날 나라에서는 박태보의 학문과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함과 함께 문열(文列)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박태보가 죽은 자리에 그를 추모하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을 건립하였다. 노강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어쩌지 못해고 그냥 놔두었다. 노강서원은 노량진 서원이라는 뜻이고,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 주는 나루로서 예부터 백로가 많아 그렇게 불렸다.
다행히도 박태보의 신원·복권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죽은 지 5년 후인 숙종 20년(1694) 폐위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죽은 노량진에 노강서원이 세워졌다. 숙종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1695년 묘당에 사액(賜額)한 후 박태보의 제사 때 예조정랑을 보내 제문을 짓게 하였다.
이후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그의 충절이 기려졌으며, 1925년 을축대홍수 때 노강서원이 쓸려나가자 인현왕후의 후손이자 대표적 친일파 갑부였던 민영휘와 민병석이 사비를 출현해 중건하였다. 서원이 있던 곳은 노량진 본동 494, 지금의 레미안파크 아파트 자리로, 그 입구에 2016년 세워진 표석이 있다가 길 쪽으로 옮겨졌는데 여전히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노강서원은 일제강점기에도 건재했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그 비싼 땅에서의 복원은 어려웠으니 1968년 후손들이 의정부 장암동에 옮겨 복원했다. 서계(西溪) 박세당의 고택이 있는 곳이었다. 서계 고택의 바로 뒤는 수락산이고 사랑채 마루에서는 도봉의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서계 고택은 지금은 사랑채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