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와 아담 샬
몽골의 침입 때 고려 무신정권이 강도(江都, 강화도)를 의지해 38년 동안 항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인조도 1636년 12월 28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로 도피하려 했으나 우물쭈물거리다 청나라 군대에 길을 차단당해 별수 없이 남한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다. 다행히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은 먼저 강도로 피신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었다. 믿었던 강도가 침공을 받은 지 단 하루 만에 함락돼 버렸기 때문이다.
천혜의 요새 강도가 이렇듯 무력하게 함락된 것은 강도 방어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된 강화검찰사 김경징의 무능 때문이었다. 그는 제 아버지 김류(인조반정의 1등 공신)가 시험문제를 유출해 알려준 덕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제 아버지의 빽으로 강도검찰사가 된 인물이었다. 그렇더라도 임무에 충실해 방비에 경주했으면 좋았으련만, 방비는커녕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핑계로 매일 술판을 벌이며 경계조차 소홀히 해 허무히 강도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뭍에서만 자란 몽골인과는 달리 흑룡강과 송화강에서 익히 물을 경험한 여진족에게 있어 염하는 그리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청의 총대장 도르곤은 1637년 1월 22일 새벽, 아하니칸을 선봉으로 하여 전격적으로 염하 도하작전을 개시했다. 그리고 조선군의 허술한 경계 덕에 쉽게 갑곶진을 점령하고 뗏목에 실어온 홍이포를 강도성을 향해 쏘아댔다. 결국 강도성은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고 봉림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은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왕자들과 세자빈은 아군의 사기를 크게 꺾어놓았는데, 결국 인조 임금마저 1637년(인조 15)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함으로써 병자호란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삼전도의 치욕 후 정축화약(丁丑和約)이 체결되어 인조는 창경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장자인 소현세자와 차자인 봉림대군은 청나라 수도인 만주 심양에 인질로 붙잡혀 가게 된다. 이때 그들이 머물던 곳이 흔히 심관(審館)으로 불리던 심양관이었다.
다행히 봉림대군은 일찍 풀려나 돌아왔지만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무려 9년간이나 볼모 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심양에서만 머무르지 않았으니 1941~4년 명나라 침공 시기에 있어서는 누르하치의 14째 아들이자 청의 권력자 도르곤이 소현세자를 전선으로 불러냈다.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애오라지 받들던 명나라의 멸망을 목도하라는 뜻이었다. (이때 세자는 막사에 떨어진 포탄에 부상을 입는 아찔한 경험도 한다)
명나라 멸망 후에도 도르곤은 소현세자를 불러내 서역 원정에 종군시켰는데, 이번에는 실전이어서 제법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렇다고 도르곤이 소현세자를 무조건 내몰지만은 않았으니, 명나라 멸망 직후인 1644년 9월부터 11월까지 2달 여 동안 그를 북경에 머물게 하여 아담 샬과 같은 서양 선교사를 소개해주며 교류를 권했다.
아담 샬은 1591년 신성로마제국 쾰른에서 태어난 예수회 선교사로서 1622년에 중국으로 가 서양의 선진 천문·역법을 전해주며 명나라 숭정제의 환심을 샀다. 덕분에 그는 명의 환관과 궁녀 일부를 천주교로 개종시킬 수 있었는데, 청나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뀐 후에도 계속 중국에 머물며 선교사업을 지속했다. 그가 청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었던 것은 홍이포라는 서양식 대포를 만들 줄 아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더불어 선진 천문·역법에도 밝았던 까닭이니 청나라에서도 흠천감 감정(欽天監 監正/국립천문대장)이라는 높은 벼슬을 얻었다.
아담 샬은 이를 보답코자 1644년 명나라 숭정역법을 보완한 새로운 달력인 '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 제작해 바쳤고, 이에 벼슬이 3품까지 오르며 광록대부(光祿大夫)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아울러 북경 도성 안 천주당 건축을 허가 받았다. 도르곤이 소현세자를 아담 샬에게 소개시켜준 것도 이 무렵으로,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지 말고 서양의 선진 문명을 경험해 보라는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 아담 샬의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Relatio〉을 기초해 저술한 남당(南堂, 남 천주당) 신부 황비묵(黃斐默, 1830~1909)의 저서 <정교봉포(正敎奉褒)>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처음 만나 것은 1644년(인조 22년) 9월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교류는 아담 샬이 소현세자가 머물고 있는 심양의 심관을 빈번히 찾을 정도로 깊게 이어졌는데, 이와 같은 정황을 미루어보면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 체류 시 이미 천주교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가 조선의 차기 임금이 될 세자 신분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터,* 조선 선교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으리라는 것과, 소현세자와 강빈이 사고무친의 청나라 땅에서 천주교에 쉬 몰입되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상상이다.
* 〈Historica Relatio〉에서 소현세자는 '조선의 왕 (Corea Rex)'으로 기록돼 있다.
황비묵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의 교류는 매우 각별했으며, 아담 샬이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하면 세자는 신중히 경청하고 궁금한 점을 되묻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644년 3월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담 샬은 자신이 지은 천문·역법·천주학 등의 여러 서책과 지구본 및 십자가 예수상 등을 선물로 주었다. 이에 세자는 다음과 같은 고마움의 편지를 보냈다.
귀하께서 주신 천주상(예수상)과 지구의 및 천문학과 서구과학에 관한 그 모든 저서는 저를 기쁘게 하였으며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감사드리고 있는지 귀하는 짐작조차 못할 것입니다. 자는 귀국하는 즉시 그것을 궁중에서 사용할 뿐 아니라 출판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장차 조선이라는 불모의 땅을 박학다식한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어줄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소현세자가 천주교도였을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아울러 결과는 차지하고서라도 일찍이 개화된 세계를 경험한 세자가 케케묵은 성리학의 세상에서 벗어나 조선을 변화와 혁신으로 이끌었을 것임은 그 짐작이 어렵지 않다. 다만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천주교를 국교로 삼거나 하거나 적극 포교하거나 하는 등의 급진적 행동은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니, 여타의 사서에서도 그가 보인 종교적 움직임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사회적 반발을 고려해 종교문제에 있어서만은 점진적 개방을 유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그가 데리고 있던 사람은 질자(質子, 인질)로서 같이 온 조선 권문세가의 아들들, 시강원(세자 교육기관) 관리, 통역관, 의관 등 200여 명에 달했고, 귀국할 때는 그들의 대부분 뿐 아니라 세자 부부가 농사와 장사로써 번 돈으로 속환시킨 붙잡혀 간 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왔다. 그리고 심관에서 자신들을 보필해 온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도 데리고 왔다.
앞서 말한 대로 소현세자는 여러 전장에 종군하였으니, 대표적으로는 1641년 금주위 전투, 1644년의 산해관 전투에 참전했다. 그리하여 1644년 4월 20일에는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도르곤에게 항복하는 것을 목도했으며, 5월 2일에는 명나라 북경에 도르곤과 함께 입성하여 명나라가 무너지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러한 세자였던 바, 봉림대군(효종)이 행한 북벌과 같은 무모한 행동으로써 국력을 소비하는 허황된 짓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며, 함께 귀국한 자들을 중용해 실사구시의 개혁을 이끌었을 것이다.
이미 체험으로써 실사구시가 몸에 밴 소현세자 내외가 조선의 개혁을 결코 방관했을 리 없을 터, 이것은 누구도 같은 시각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소현세자 때에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앞서는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가 마련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김용덕과 같은 학자는 "서양문물에 호의와 관심을 가졌던 소현세자의 사망과, 서양과학자를 초빙하자는 박제가의 건의를 물리친 정조의 결정이 조선을 결정적으로 퇴행시킨 원인"이라고도 말한다. ('소현세자 연구', <사학연구> 18)
하지만 앞서 '소현세자의 후손 경선군·임창군·밀풍군'에서 말한 대로, 국왕 인조는 청나라를 등에 업은 소현세자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결국 세자를 독살하고 만다. 귀국한지 2개월 만인 5월 21일(음력 4월 26일)의 일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세자의 시신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빨리 부패했다는 점을 들어 인조가 내의원 의원 이형익을 시켜 독살했을 것이라 하며, 세자의 부인 강빈이 사사된 것은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귀인의 짓이라고 추정한다)
이로써 조선의 개혁은 영원히 물 건너가고, 송시열과 같은 자들이 득세를 하는 오히려 퇴행적인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계사의 흐름에서 크게 뒤떨어지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후진국을 면치 못하게 되었던 바, 결국은 근대적 선진화를 이룩한 바로 옆나라 일본에 의해 멸망당하는 비극을 맞이하는데, 그 무렵에도 조선은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드문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