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475년 음력 9월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를 개시한 일, 그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공격에 수도 하남 위례성이 함락되고 사로잡힌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이 아차산성 아래서 참수된 일, 부여경의 아들(혹은 동생) 부여흥(扶餘興,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여 웅진백제를 연 일, 그리고 당시의 국경이 안성 도기동 산성과 안성천을 잇는 라인이라는 것을 앞서 말한 바 있다. (☞ '백제·고구려의 국경선이기도 했던 안성 도기동')
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 때의 서쪽 경계, 즉 중국과의 국경은 어디였을까? 그것을 추정할 만한 기록을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영양왕 9년조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589년 2월 고구려가 말갈군사 만 명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공격했다는 내용인데, 통일제국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를 알아차린 고구려가 선제공격에 나선 것이다. 즉 요서의 북변이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경계였음이다.
요서의 위치는 수나라의 역사책 <수서(隋書)>에서 찾을 수 있다. <수서/지리지> 기주(冀州)조에는 '수나라 동북변에 기주가 있다. 기주에는 요서를 비롯한 11개 군(郡)이 있으며 요서는 기주의 가장 동쪽 끝이다'라고 명확하게 기술돼 있는데, 현 중국에서 발행한 <요서지구역사지명(辽西地区历史地名)>을 보면 요서군은 만리장성 아래에 위치한다. 현 중국의 수도 북경과도 근접한 곳이다.
요서군이 고구려와 중국 제국과의 국경임은 송나라 때 학자 왕응린(王應麟, 1233~1296)이 쓴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地理志燕地東有遼東匈奴傳燕置遼東郡以距胡通典舜營州遼水之東是也燕遼東郡秦漢因之東通樂浪晉置平州後魏時高麗國都其地唐置安東都䕶府....平治昌黎漢遼西交黎唐安東府의 내용이 나오는데, 요약하면 "평주는 창려군을 치소로 하며 한나라 요서군 교려현 지역이고 당나라 때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곳이다"는 뜻이다.
안동도호부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대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한 후 그 고토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이 안동도호부가 설치됐다는 창려군과, 고구려와 국경이었다는 요서군은 중국이 발행한 <요서지구역사지명>에도 뚜렷하니, 일대의 지도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요서군을 비롯한 11개 군이 있었다는 기주는 <삼국지연의>를 단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기억되는 곳일 터이다. 바로 후한 말 군웅할거 시절에 원소가 다스렸던 지역으로, 원소는 그 아래 지역 연주를 다스리던 조조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니 이것이 삼국시대 3대 전투로 유명한 관도대전(官渡大戰)이다.
고구려와 중국의 국경이었던 요서군은 이렇듯 명확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교과서에서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이와 같이 표시한 지도는 지금껏 하나도 본 적이 없다. 내 책장에는 기경량 박사를 비롯한 젊은 사학자 모임이 출간한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라는 책이 꽂혀 있기도 하지만, 이상은 그와 같은 욕망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닌 그저 팩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는 팩트를 좇는 학문이기에.
▼ 관련 글
고구려와 동북공정 / 알아서 기는 학계와 셰셰를 외치는 정치인
앞서 언급한, 고구려가 만리장성 이남까지 진출해 기주(冀州) 요서군(遼西郡)까지 다스렸다는 것은 (隋書 卷四 煬帝 下)에 실려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수양제 양견은 한나라와 위나라 때부터 중
kibaek.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