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도둑 맞았던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불상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기백김 2025. 1. 31. 18:07

 

시력을 보호한다는 주술적 눈 문양과 양을 제물로 드리는 문양 등이 새겨진 고대 다키아의 황금투구

 

위 황금헬멧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유물이다. 이 유물은 기원전 5세기 후반 루마니아에서 제작된 일렉트럼(금·은·구리 합금) 투구로 1926년 루마니아 코토페네슈티 마을에서 발견돼 지금껏 '코토페네슈티 헬멧'으로 불리고 있다. 그곳 숲 속에서 양치는 농부의 아들에 의해 발견된 이 헬멧은 아이가 2주 동안 쓰고 다니며 놀았는데 이때  일부 부품이 떨어져 나가며 본래의 원형이 상실됐다. 가치를 모르기는 아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니 헬멧은 뒤집어져 닭의 물통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이 헬멧은 가치를 알아본 골동품상이 30,000레이(농부의 30년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라 함)에 매입했고, 루마니아 국립역사박물관에서 재매입한 후 1970년대부터 루마니아 부쿠레시티 국립역사박물관의 주요 유물로써 전시되었다. 이 황금헬멧을 만든 사람은 발칸반도 지역에 살았던 고대 다키아인들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기원전 82년 이 지역으로 진출한 로마인들과 오랜 전쟁(다키아 전쟁)을 치렀고 최종적으로 로마에 패했던 바, 이후 이 땅은 루마니아(로마인의 땅)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다키아인들이 만든 이 황금헬멧은 루마니아 국민들에게는 민족정신이 담긴 선조의 유물로써 더없는 가치가 부여되며 사랑받았겠는데,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할 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난 1월 26일 네덜란드 아센시(市) 드렌스 박물관에서 해외 전시되던 중 절도범에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경찰은 이날 새벽 복면을 쓴 3명의 괴한이 박물관 출입문을 폭파한 뒤 전시품을 훔쳐 달아났다고 했는데, 도난 장면은 CCTV 영상에도 담겼다.  

 

 

관련 동영상

드렌츠 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황금투구
함께 전시됐던 다키아 황금팔찌 / 팔찌 3점도 훔쳐갔다.

 

큰 충격을 받은 드렌츠 박물관 측은 "170년 박물관 역사상 이런 중대한 사건은 처음"이라고 했고, 루마니아 당국은 도난당한 유물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11월 암스테르담 MPV 갤러리에서 폭발물로 문을 열고 앤디 워홀의 작품 2점을 훔친 사건과 수법이 유사해 주목되지만, 그와 달리 회수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가정이 지배적이다.

 

사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절도범들이 이를 쉽게 내다팔 수 없게 되었던 바, 유물을 밀거래해 현금화하지 못하는 대신, 금이라도 건질 목적으로 1Kg의 황금투구를 녹일 수 있다는 예측이 따르기 때문이다. 보도를 접한 후 나 역시 놀랐고,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해 후속 보도를 찾아보고 있지만 지금껏 이렇다 할 소식은 없다. 하지만 계속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려 한다. 만일 신라의 금관이나 금동반가사유상이 이웃 나라 전시 중 도난당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며.

 

 

후속 보도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약 100년 뒤인 539년 만들어진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이 1964년 덕수궁미술관 특별전시 중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말한 대로 이 금동여래입상은 연가 7년(연가는 고구려 안원왕 시대의 연호)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구려 불상으로써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인데, 배면에 각자(刻字)된 4행 47자의 명문(銘文)이 제작연도 등을 확인시켜주는 희귀한 유물이기도 하다.

 

 

 

이 불상은 전신 높이 16.2 cm, 불상 높이 9.1 cm, 광배 높이 12.1 cm, 좌대 높이 4.1cm로서 1963년에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도로공사 중 인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곧바로 국보 제119호로 지정되었고, 덕수궁미술관 2층 제3 전시실에서 특별전시회를 가졌다. 그런데 그것이 그해 10월 24일 오전 누군가에 도난당했다. 그런데 범인은 엽기적으로 진열장 안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문화재관리국장께 알리시오. 오늘 24시 안으로 반환한다고. 세계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인에게 알리거나 약은 수작 부리다가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격이 되지 말고….  지문 감정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외다."

 

사건은 즉시 경찰에 신고됐지만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미술관 측과 경찰이 애를 태우고 있을 무렵인 오전 11시30분 박물관 국장인 하갑청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불상을 돌려주겠다는 범인의 전화였다. 그날 이런 전화가 3차례나 더 왔으나 언제 어떻게 돌려주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다 그날 밤 11시 "한강철교 제 3 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밑 모래밭에 묻었으니 찾아가라"는 구체적인 내용의 전화가 있었다. 

 

불상은 정말로 그곳에서 비닐 봉지에 잘 쌓여진 채로 발견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범인은 물론, 동기조치 파악되지 않고 있다. 범인은 과연 왜 불상을 훔친 것일까? 심심풀이 모험이었을까, 문화재 관리 잘 하라는 경고적 범행이었을까..... 범인의 마지막 통화에 "금인줄 알고 훔쳤는데 순금도 아니고, 귀중한 물건이란 걸 신문이나 뉴스에서 알게 돼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려주기로 했다"는 말이 있었다는데, 사실이라 해도 진열장에 남긴 메모의 내용과는 다르다. 어찌 됐든 이 사건의 시효는 진작에 끝났다. 

 

 

광배 뒷면에 '연가 7년 기미년(539년)에 고려국(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의 주지승과 그 제자승 연을 비롯한 사도 40명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으니 그 29번째의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비구니) 법영(法穎)이 공양하는 바이다'라고 적혀 있는 중국 북조 양식의 불상이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句)麗國樂良 東寺主敬苐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苐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광배가 굽어진 것은 도난 사건 때의 여파인데 원형대로 복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건이 보도된 조선일보 1967년 10월25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