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형평사 백정의 저울과 레이디 져스티스의 눈가리개

기백김 2025. 2. 13. 22:33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노예해방 선언문 사본이 뉴욕 경매시장에서 208만5천달러(약 24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보도한 10년 전 기사를 보게 되었다. 노예해방 선언문 사본 중 역대 두 번째로 높게 매겨진 값이라는데, 최고가에 팔린 사본은고(故)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이 소장했던 것으로 380만달러(약 44억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남북전쟁(1861~1865) 당시 수백만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는데 법적 근거를 제공한 노예해방 선언문은 모두 48부의 사본이 제작되어 각지로 배포되었다. 

 

 

208만5천달러에 거래된 노예해방 선언문 사본

 

문득 우리나라의 노예 해방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미국처럼 언제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893년(고종 30)까지는 조선에 노예가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즉 우리나라의 노예제도는 신생국 미국보다 적어도 30년을 더 존속했다는 얘기인데, 내가 1893년이라는 연도를 꼭 집어 언급함은 1893년 조선에 아직 노예가 존재하는 것을 본 혼마 규스케(本間九介, 1869~1919)라는 일본인이 크게 놀라 자신의 <조선잡기>라는 책에 그 사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와 가까이에 있는 이웃나라에 아직도 노예제도가 행해지고 있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조선의 사정을 깊이 조사할 때 실로 놀랄만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노예제도만이 아니지만, 우선 노예제도를 보자면, 조선에서는 중류 이상의 양반이라면 모두 하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데리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봉건시대에 신분이 좋은 사무라이가 거느리는 와카도(若黨, 젊은 종자), 혹은 게로(下郞, 천인)와 같다. 그들은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주인에게 부려져 주인과 군신의 관계를 가지기를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계속해서 먹을 수도 없다. 추워도 옷을 껴입을 수가 없다. 만사를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하인이 된 자는 하늘로부터 받은 정신을 주인에게 바치고 개나 말과 같은 지경에 떨어져도, 참담한 슬픈 눈으로 눈물을 머금고 일생을 마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평생 대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자자손손으로 하여금 이러한 기막힌 운명에 빠지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인의 대우가 가혹하며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몰래 탈주하여 유민이 되는 자가 많다. 그러다 불행히도 다시 주인에게 사로잡히면 신의를 배반한 불충의 죄를 받아 한층 더 잔혹한 대우를 견뎌내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이들은 불쌍한 무고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혼마 규스케의 <조선잡기>
광화문 광장 세종문화회관 앞의 장예원 터 표석 / 장예원은 조선시대 노비장부를 관리하고 노비 관련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이상을 보면 우리나라는 농노제(農奴制)가 있던 러시아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노예제도가 존속한 미개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으니, 1893년 미국 선교사 무어에 의해 세워진 남대문로 곤당골교회에서는 백정과 같은 천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천민들을 예배당 바깥으로 내보내달라는 교인들의 요구가 있었다. 무어 선교사는 당연히 거절했고, 이에 다른 신자들은 광교(廣橋) 홍문섯골의 양반집에 독자적인 예배당을 차려 나갔다.  

 

 

남대문로 한국전력사옥 건너편에 곤당골교회가 있었다.

 

무어 선교사의 곤당골교회는 이후 승동(勝洞)교회로 발전했지만 그때까지도 다른 교회 신자들은 '백정교회'라 부르며 멸시했다. 승동교회가 백정교회라 불리게 된 데는 이 교회 신자였던 백정 박성춘이 세례를 받은 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무어 선교사는 이에 개의치 않고 1898년 승동교회 건립 후 초대 장로로 백정 출신 박성춘을 세웠다. 박성춘의 아들이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 박봉출(후에 박서양으로 개명)임을 앞서 밝힌 바 있다. (☞ '우리나라 최초 의사 박서양과 김필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초기 승동교회
박서양(朴瑞陽, 1885~1940)
지금의 인사동 승동교회
건물에 파묻인 듯한 착시를 주는 승동교회 종탑

 

우리나라의 노예제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며 사라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그저 형식적인 신분해방인 듯했으니 이후로도 30년이 지난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들이 실질적 처우 개선과 사회적 평등을 부르짖은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이 일어났다. 여전히 민간에 신분제 질서가 존재하며 이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이 따랐다는 얘기다.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사 운동이 곧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다는 사실도 우리나라의 신분해방이 형식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진주시 칠암동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앞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사 운동은 아래 정기대회 포스터가 말해주듯, 추(錘)와 육류로써 형평을 맞추는 고기 다는 저울과 같이 자신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형평에 맞게 대우해 달라는 요구였다. 형(衡)은 '저울 형' 자이고, 평(平)은 '평평할 평 자로서, 곧 만민평등을 의미한다. 저울은 수평이 될 때 비로소 무게를 측정할 수 있게 되는데, 양쪽 저울의 접시 위에 사람과 사람이 올라가면 한쪽으로 기움이 없이 거의 동일한 무게를 유지하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하며 동등하다는 의미의 갈음이다.

 

 

형평사 총본부 정기대회 포스터

 

형평사 운동은 1923년 3월 일본에서 일어난 시민평등운동인 수평사(水平社)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나 한국 백정들이 저울을 뜻하는 '형평'을 들고 나온 것은 무척 의미 깊다. 형평사는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의 백정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뜻있는 양반이 합심하여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후 곧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으나 내부 분열과 프롤레타리아 식의 변질, 아울러 사회 변혁운동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압박으로 10여 년 만에 종식됐다.

 

 

일본 수평사 창립대회 공고문
여기는 조선시대 감삿골로 불린 종로구 관철동이다. 과거 감삿골에 모여 살던 백정들은 도축한 육류를 길 건너편 피맛골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었다. 이곳 감삿골 백정들이 한양 형평사 운동의 중심이 됐다.

 

그보다 더 심각했던 실패 원인은 평민들의 비호응 내지는 탄압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경제적·신분적 약자에 대해 가학적이었던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을 반영할는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형평사 운동의 태동에는 여러 뜻 있는 양반 출신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고, 전국적으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평민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것도 잘 사는 평민이 아니라 겨우 천민을 벗어난 수준의 평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데 역사적 가학성이 느껴진다.

 

지금은 물론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직업에 따른 차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따라서 만일 사회적 차별을 느꼈다면 법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런데 간혹 법도 눈을 감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판사에 대해서 개새끼라는 쌍소리를 내뱉는 것밖에 달리 대책이 없으니, 당사자는 끝없는 좌절을 되풀이하다 고사하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우리가 많이 보아온 정의의 여신 디케 상의 원형은 그리스신화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다. 아스트라이아는 로마신화에서는 유스티이아(Justitia)로 불리는데 이것이 영어로 져스티스(Justice)가 됐다. 그래서 정의의 여신 디케 상은 영어로는 Lady Justice 로 표기된다. 그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뜬 것도 있고 눈을 감은 것도 있지만  원형인 아스트라이아 여신상은 모두 눈을 가리고 있다. 심판 받는 사람의 계층, 계급, 성별 등을 보지 않겠다는 것으로, 눈가리개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함'을 의미한다.  

 

 

아스트라이아 여신상
홍콩 대법원의 레이디 져스티스 / 과거 영국 조차 때 세워진 것이다. 지금의 차이나 홍콩 시대와는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우리나라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혹은 '법의 여신상'은 두 눈을 뜨고 있다. 1984년 변호사회관이 있던 광화문 당주동 세종빌딩 앞에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된 레이디 져스티스는 오른손에 공평과 정의를 상징하는 저울을, 왼손에는 법집행의 엄격함 나타내는 칼을 들었다. 아래 동판에는 '이 여신상을 통해 인권 옹호와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는 서울지방변호사회(여신상의 건립 주체)의 설립정신을 길이 기리고자 한다'고 새겼다.  

 

 

세종빌딩 앞의 레이디 져스티스

 

우리나라 사법부의 심장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도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차례 변형이 가해져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취지는 '가혹함 대신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야 made in Korea 레이디 져스티스이니 그럴 수 있다해도 전통의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는 모습은 좀 생경한데, 고(故) 노회찬 의원은 눈을 뜬 채 법전을 든 이 한국 정의의 여신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의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눈을 가리는 것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것은 상황을 두 눈 뜨고 비교해 살피겠다는 것이고, 칼 대신 법전을 든 것은 엄정하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법조문에 따라 눈치를 살피면서 판결하겠다는 뜻, 아니겠나."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설치된 저스티스 레이디 / 우리 한복인지 중국식 복장인지 그것도 사실 헛갈린다. 고려시대 의복인가? 머리 모양 역시 시대불명이다.

 

불행히도, 그의 농담 같던 말이 현실화 된 듯한 느낌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전관예우' 같은 후안무치한 예는 물론이고, 정치사범에 대한 재판에서는 그저 판사의 서 있는 위치, 즉 왼쪽인가 오른쪽인가에 따라 판결이 좌우되는 형국이니 법조문이고 판례고 양형기준이고 다 아무 소용이 없다. 오로지 판사의 정치성향에 따라 판결이 춤을 추고 널을 뛴다. 따라서 판결이 나도 거의가 승복하지 않는다.  

 

지금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윤대통령 탄핵심판에서도 누구보다도 엄정해야 할 헌재 재판관들마저 이념에 오염된 듯한 모습을 보여 심히 우려스럽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걱정이 아니다. 몇몇 재판관들은 져스티스(헌재 재판관의 영어/공교롭다)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포커페이스도 유지하지 못한 채, 제 성향을 얼굴과 행동으로 드러내며 국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법조문마저 무시하고 재판한다. (놀랍다!)

 

예를 들자면, 2020년 형사소송법 개정에 따라 '형사재판에서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헌재의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법조문이 생겨났음에도, 이를 대놓고 무시하며 검찰에 청구해 얻은 피의자 신문조서를 판결의 증거로 삼겠다고 한다. '채택되려면 피고인이 조서 내용에 동의해야 한다'는 법조항이 엄연함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도 사상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사상이나 이념이 심리나 판결에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의 도리인 최소한의 포커페이스를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제 의향대로 심리를 운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설사 법과 양심에 기인한 판결을 내린다 해도 국민들이 믿지 못하게 된다. 또 그렇게 되면 나라의 분열을 초래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잔인한 도둑임에도 교언영색으로써 지나가는 나그네를 모셔와 극진히 대접하고 잠자리까지 제공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사기였을 뿐이니 손님의 키가 침대보다 키가 크면 남는 목을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강제로 늘려서 뼈와 근육을 아작냈다. 헌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까 국민들의 반(半)은 심히 염려하고 있다. 

 

 

오늘의 헌재 주변 풍경 / 헌재 앞이 차단돼 운현궁 길에 운집했다.
헌재 재판관의 탄핵 심의 운용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시위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들은 불의한 특정 재판관의 이름을 집중적으로 외쳐댔다.
같은 시각 청계천광장에서 열린 윤대통령 국민변호인단 출범식에도 많은 국민들이 모였다. / 미주중앙일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