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 박세채의 황극탕평론과 마포 창랑정
서울시 마포구 현석동은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을 나오면 만나게 되는 동네다. 앞서도 말했지만 광흥창(廣興倉)은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祿俸)으로 쓰일 양곡을 저장하는 창고이데, 단순한 양곡창고라기보다는 호조에 딸린 관청으로, 봉급날 관리나 그 대리인이 이곳에서 녹패(祿牌)를 제시한 후 녹봉을 받아갔다. 비슷하게 중요한 창고로서 염창(鹽倉, 소금창고)이 있었는데, 부근의 염리동과 강서구 염창동은 거기서 유래됐다. 서해에서 조운된 소금이 그곳 국영 소금창고에 재졌다.
광흥창과 관계된 지명으로는 창내(倉川)가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지고 창천동과 창전동(倉前洞, 창내의 앞 동네)의 동명만 남았다. 창전동에는 공민왕 사당이 지어졌는데,(연대 미상) 지금도 광흥창 옆에 존재한다. 사당 안에는 공민왕, 공민왕의 비(妃)인 노국대장공주 및 왕자, 공주, 옹주, 충신 최영장군의 화상과 마부상이 모셔져 있다.
창전동에는 1968년 2월 10일 밤섬이 폭파되며 옮겨온 부군당도 있으나,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묘한 장소에 숨겨져 있어 좁은 담장 위에 올라가 목숨 걸고(?) 사진을 찍어야 했다. 장소가 특정돼 있지는 않지만 부근에는 토정 이지함이 살던 토정(흙집)이 있었고, 조선 중기의 시인 권필(權韠)도 살았다.
현대에는 또 다른 유명 시인 김수영이 마포구 구수동 41-4번지 영풍아파트 101동 자리쯤에 있던 구옥(舊屋)에서 닭을 키우며 살았는데, 1968년 6월 15일 귀갓길에 구수동과 신수동 사이 도로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며 세상을 떠났다. 오늘 말하려는 현석동은 조선 숙종 때의 관료이자 문인인 현석(玄石) 박세채가 살았던 데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사실을 따지자면 선후(先後)가 바뀐 듯싶다. 현석동의 옛 지명은 '감은돌골', 즉 '검은 돌 동네'이고, 이곳에 살던 박세채는 그 특이성에 제 아호를 현석(검은돌)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세채는 우리에게는 잘 안 알려진 인물이나 당대에는 꽤 유명인사였던 듯, 1695년(숙종 21) 65세로 타계했을 때 문상객이 1천 명이 넘았고, 시묘살이를 하겠다고 나선 문인이 무려 2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언뜻 당대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니 그럴만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인품과 무난한 대인관계를 말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그는 숙종조 그 극심한 당쟁의 시기에 어찌어찌하다 소론의 영수가 되었지만 노론, 남인과도 크게 척을 지지 않았으니,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그의 인품과 애국적 정치관이 드러난다.
"붕당이 이처럼 극심한 적은 유사 이래 없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 데 이를 것이다."
그는 이같은 생각 속에 탕평론(蕩平論)을 제시하였고, 또한 실천에 힘썼다. 아울러 정책이 바르면 다른 당의 것도 실행에 옮겼으니, 그는 과거 김육이 주장한 이래 서인이 국책사업으로 추진해 온 대동법을 받아들여 적극 실시하였다. 광해군 때 김육이 제창한 대동법이 중요 국가정책으로 후대까지 이어지게 된 데는 무엇보다 박세채의 공이 컸다 하겠다. (※ 대동법에 대해서는 ☞ '조선 최고의 경제 총리 김육과 대동법')
박세채는 경신환국(1680년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 / 1674년 갑인환국을 통해 밀려난 서인이 재집권함) 이후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붕당 정치로 정치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탕평론을 제기하였던 바, 율곡 이이가 펼친 조제론(붕당을 타파하고 탕평을 이루기 위해 당색에 구애되지 않는 고른 인재등용을 주장하는 논리)을 바탕으로 1683년 1688년 1694년 세 차례에 걸쳐서 황극탕평론(왕도를 바탕으로 해서 군신과 상하가 특정한 당파에 편중되지 않는다)을 주청했다.
이에 숙종은 박세채의 뜻을 받아들여 탕평교서를 반포하였는데, 후일 1725년 영조도 즉위하자 곧 과거 박세채가 주장한 탕평론을 준용해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실행하였던 바, 영조의 중요 업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다.
시절이 시절이니 만큼 박세채의 정치 역정에는 부침이 심했다. 그리고 예의 당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인종비 장렬왕후)의 복상문제로 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에게 패해 1675년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 원주, 금곡 등지로 이거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후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 · 승정원 동부승지 · 공조참판 · 대사헌 · 이조판서 · 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후 1689년 소의장씨 희빈(장희빈) 책봉을 기화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고, 1694년 갑술옥사(숙종의 비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으로써 소론이 남인을 밀어낸 사건) 이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내고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이 복잡다난한 정치 역정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춘추보편(春秋補編)> < 시경요의(詩經要義)>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의 수많은 성리학 책, 양명학(陽明學)을 비판한 <양명학변(陽明學辨)>과 <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을 저술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해박해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다수의 예학서를 저술했으나 거의 번역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1680년 그는 "붕당이 이처럼 극심한 적은 유사 이래 없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 데 이를 것이다"라고 계고했다. 그때는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살았던 시대에서 요즘처럼 당쟁이 극심한 적은 없었으니 마치 인두겁을 쓴 어떤 괴물이 분탕질을 치는 듯 혼란스럽다.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가 정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를 듯하다.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일지도 모를 헌법재판소마저 편벽한 듯하여 우울하다. 그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덜어보려 차가운 강바람 속에 강변을 걸어보았다. 힘없는 범부(凡夫)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는가. 루트를 보자면, 광흥창역 5번 출구에서 한강 쪽으로 10분을 걸으면 현석소공원이 나타나고, 거기서 GS스토어 옆 오른쪽 좁은 도로를 택해 약 1분을 걸으면 마포구 현석동 146-3 밤섬현대아파트 옛 박석채의 집이 있던 곳이 나타나며, 여기서 토정나들목을 빠져나와 강변을 따라 약 5분을 걸으면 창랑정(滄浪亭)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 나타난다.
조선 후기 문신 엄경수(1672~1718)가 지은 <연강정사기(沿江亭謝記)>에 "이 정자는 현석(玄石)에 있다. 참판 유집일(俞集一)이 세운 것이다"(滄浪亭 亭在玄石 兪侍郞集一所搆)라고 언급한 바로 그 정자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명승 관련 신사료 연강정사기를 통한 18세기 한강 연안 명승의 현황 및 복원방향 연구>라는 기록을 찾아보니 창랑정은 마포구 현석동 146-1번지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장소는 GPS에서는 특정되지 않는다. 물론 창랑정이란 정자도 찾을 수 없다. 언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고, 그저 장소만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창랑정'이란 당호(堂號)는 허다하다. 그리고 전국 어느 곳이라도 '창랑정'이라는 의미는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을 것이다'(滄浪 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 빌려 왔다. 강가에 있는 정자에 붙이기는 더 없이 적합한 이름이다. 마포 창랑정을 지은 유집일은 1708년 예조참판이 되었고 이후 형조판서를 지낸 인물로서, 그도 필시 유유자적하고자 굴원의 글을 당호로써 빌려왔을 것이다,
박세채가 집에서 가까운 이 정자를 아니 찾았을 리 없다. 그 족적도 남아 있으니 그는 자신이 지은 <현석창랑정기(玄石滄浪亭記)>에서 이 정자를 효종의 부마인 금평도위(錦平都尉) 박필성(朴弼成)이 사서 개축했다고 언급했다. 박필성은 박세채의 재종질손으로 박세채에게 수학하면서 현석동을 자주 찾게 되었고, 현석동의 풍광을 즐기다 1684년 무렵 정씨 소유의 창랑정을 구입하여 개축했다고 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창랑정은 유집일 → 정씨 → 박필성으로 소유주가 변한 듯하다. 정자에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현석(이라는 큰 돌)은 능선의 서쪽과 남쪽 사이에 끼어 있는데 예전부터 이곳에는 창랑정이라 하는 정씨(鄭氏)의 정자가 있었다. 화악(華岳,북한산)이 뻗어 내려 서쪽으로 꺾여 모악(母岳, 연세대 뒷산)이 되고 구불구불 꺾어져 거의 6~7리 내려와서는 불룩 솟구쳐 언덕이 된다. 여기서 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면 그 뒤편 절벽에 세 그루의 고목이 높다랗게 서 있는데 바로 옆에 창랑정이 있다. 창랑정에서 내려보면 오른쪽으로 율도(栗島, 밤섬)가 마주하고, 율도 앞쪽에 모래섬(여의도를 가리킴)이 있는데 조수가 빠지면 드러난다. 눈길이 닿은 곳마다 화악, 목멱(木覓山, 남산), 청계산, 관악산 등이 늘어서 그 자태를 뽐낸다.
박세채는 이곳에서 오도일(吳道一, 1645~1703) · 최석정(崔錫鼎) · 홍수주(洪受疇) 등과 모여 풍류를 즐겼는데, 특히 1684년 12월 16일 눈 오는 밤에 이루어진 창랑정 앞에서의 뱃놀이에 대해 운치가 각별하였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러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같이 한 인물들은 모두 같은 당색(소론)이니 대화도 얼마나 잘 통했는가. 나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듯한데, 지금은 그것도 공허하게 여겨진다. 행여 자포자기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