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신통기(新 神統記)

이번에 발견된 이집트 18왕조 투트모세 2세의 무덤

기백김 2025. 2. 22. 20:39

 

지난 20일 이집트 룩소르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서 고대 이집트 신(新)왕국 18왕조 4대 파라오 투트모세 2세(BC 1502~1448)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외신을 탔다. 투트모세 2세의 무덤은 18왕조의 유일한 미발견 왕릉이었다고 하는데, 사진을 보니 무덤 입구에 철문이 있다.

 

그새 철문을 만들어 달았을 리 없을 터이니 이 무덤은 '발견'이라기보다는 '확인'이라 말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기사를 읽어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러했던 바, 하트셉수트 여왕(BC 1501~1480)의 무덤방과 연결되는 통로를 조사하다 투트모세 2세의 이름이 새겨진 항아리 조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룩소르 '왕가의 계곡' 투트모세 2세 무덤의 입구
무덤 통로 입구
통로 입구의 철문
투트모세 2세의 이름이 새겨진 항아리 조각 / 오른쪽은 목간에 새겨진 이름
카르낙 신전의 투트모세 2세 부조

 

무덤의 입구는 지난 2022년 발견됐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입구가 하트셉수트 여왕 무덤방의 또다른 통로로 여겨졌다. 이곳에서부터 이어진 통로가 투트모세 2세의 이복 누이이자 부인인 하트셉수트 여왕 무덤방과 연결된 까닭이었으니 그 중간에 있는 무덤방도 하트셉수트 여왕 무덤의 일부로 간주됐다.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과거 도굴꾼들이 벽화를 떼어낼 때 박락된 돌들이 무덤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던 바, 왕의 유택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투트모세 2세의 무덤방
무덤방에 남아 있는 벽화의 흔적
이번에 수습된 벽화편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소리가 되었지만, 과거 투트모세 2세는 구약성서 출애급기에서 탈출한 히브리 백성을 쫓는 이집트 왕으로 추정된 적이 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부합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무엇보다 그의 미라가 진작에 발견된 탓에 일찌감치 후보에서 탈락했다. 성서의 내용대로라면 히브리 백성을 쫓던 이집트 왕은 홍해 바닷속에 수장되었기에 그의 시신인 미라가 존재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홍해에 수장되는 이집트 군대 /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투트모세 2세 미라 / 1922년 카이로 암시장에서 발견됐다.
이집트 카이로국립박물관의 투트모세 2세 미라
이번에 발견된 무덤방과 투트모세 2세 미라의 합성사진

 

애급기에 나오는 이집트 왕의 악역을 18왕조 파라오에게 맡기는 이유는 아래 구약성서 열왕기의 내용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열왕기상 6:1)  

 

이 열왕기의 내용에 따르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한 해는 출애급을 이룬 지 480년 후이다. 그리고 성전은 솔로몬 왕 재위 4년째인 기원전 966년에 착공된다. 우리는 이로부터 출애급이 기원전 1445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데,(480+966=1446이나 한 해는 겹친다) 이에 부합되는 파라오는 18왕조 투트모세 3세(재위 BC 1479~1425)이다. 그는 정복군주로서 방대한 영토를 개척해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자이기도 하다.

 

 

투트모세 3세 상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역시 역사에 배치되기 때문이니, 투트모세 3세가 남긴 아래의 비석을 보면 그는 기원전 1445년에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미탄니 제국과 양국의 사활을 건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찾은 것이 투트모세 3세의 아버지 투트모세 2세였으나 그의 미라가 카이로 암시장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가리가 됐다.   

 

 

투트모세 3세의 공적비

 

이에 대한 대안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 기원전 1400년 설이다.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사기이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 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사사기 11:26-27)

 

이는 길르앗의 용사 입다가 암몬 왕에게 한 말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땅에 거주한지가 300년이나 됐음을 강조함으로써 그곳의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입다가 살던 시기가 기원전 1100년 경이므로 기원전 1400년 쯤에 출애급이 이루어졌거나 가나안 입경(入境)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즈음의 이집트 왕은 누구일까? 공교롭게도 기원전 1400년을 기점으로 두 명의 왕이 겹치는데, 투트모세 3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2세(재위 BC 1426~1400)와 그의 아들 투트모세 4세(재위 BC 1400~1390)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미라가 존재하고, 그들이 남긴 공적비에서는 미탄니 제국과의 관계는 강조돼 있으되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는 전혀 실려 있지 않다. 성서에 기록된 탈주한 히브리들의 수는 무려 240만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멘호테프 2세나 투트모세 4세가 설사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하더라도 관계된 최소한의 기록은 남아 있어야 했을 것이다. 출애급기에는 히브리 노예를 쫓는 데는 선발대 600승의 전차를 포함한 이집트의 모든 전차가 동원되었던 바, 이와 같은 대규모 작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아니할 수는 없다.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와 공적비
투트모세 4세의 미라와 공적비
당시의 세계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속 이집트 전차

 

과거 <십계>라는 영화에서는 출애급기의 파라오가 그 유명한 19왕조의 왕 람세스 2세(BC 1301~1234)로 비정됐다. 그리고 영화의 강렬한 이미지 탓에 세인들에게 출애급기의 파라오로 각인된 적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성서고고학자들의 이와 같은 고민을 1967년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이 해결해 주었다. 이른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불렸던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중동 연합군을 물리치고 이집트의 시나이반도를 점령했다.

 

이후 이곳을 무려 15년간이나 점유하다 돌려주었는데, 그때 이스라엘은 자국의 역사학자는 물론 세계 고고학의 석학들을 불러들여 시나이반도를 샅샅이 뒤졌다.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급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 것도 찾아낸 것이 없었던 바,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여호와의 인도에 의한 영광의 엑소더스는 이스라엘에서도 그저 전설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사실 출애급의 비역사성은 핀켈스타인이나 닐 실버만 등의 성서고고학자에 의해 꾸준히 증명되어 왔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단지 신화로서만 취급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사실로 간주된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으니 유대교의 랍비 도비아스(Tobias)마저 한국의 신자에 대해 "너무 순진하다(Too naive)"며 혀를 찬 적이 있다. 하지만 순진하다기보다는 맹신적이라 함이 옳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