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부의 망세정(忘世亭)
또 멀지 않은 곳을 찾아 옛 흔적을 더듬어보았다. 이번에 찾아 나선 것은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에 심윤부가 세웠다는 망세정(忘世亭)이다. 심윤부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본명은 심선(沈璿, ?~1467)이며 윤부(潤夫)는 자(字)이다. 호는 망세정(忘世亭), 본관은 청송이며,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이성계에 이어 무장 서열 2위까지 올랐던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증손이다.
심윤부는 1453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신숙주, 양정 등과 더불어 2등 정난공신이 된 홍윤성과 사돈을 맺었고 이후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왔으며 이에 예조참의를 비롯한 육조의 관직을 맡게 되었다. 1464년(세조 10)에는 경기도관찰사(지금의 경기도지사)에 부임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최고 관직인지 무덤 묘표에 그 직함이 쓰여 있다.
그 이후로도 중추원부사로서 하정사(賀正使, 명나라 축일에 파견되는 사신)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공직의 기록이 보이기는 하지만, 경기도관찰사가 그의 마지막 관직인 듯하다. 이후 그는 풍양(현 경기도 남양주)에 망세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두문(杜門, 두문불출)해 이맹전(李孟專)·원호(元昊) 등과 같은 고매한 처사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 바, 이맹전·원호와 같은 생육신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과 같은 충의지사를 자처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훗날 그가 영월 장릉(莊陵, 단종의 묘) 조사단(朝士壇)과 옥과에 있는 구암사(龜巖祠)에 배향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심윤부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 산2에 있는 그의 마지막 거처 부근에 마련되었고 지금도 그곳에 있다. 주변으로는 청송심씨 묘역이 있고 청송심씨 재실인 선덕재가 있어 찾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안 일이고 사실은 무척 헤맸던 바, 달빛 교교한 아래 사진들이 과정을 보여준다.
사전 정보로는 망세정 앞 논 가운데 우물의 흔적도 남아 있다고 들었으나 찾기는 불가능했고, 망세정지 역시 그러했다. 다만 여러 가지를 미루어보건대 청송심씨 재실 선덕재가 있는 곳이 망세정지로 여겨진다. 아무리 둘러봐도 정자가 있을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망세정(忘世亭)은 '세상을 잊는 정자'라는 뜻이다. 그는 풍양에 입향(入鄕)한 후 망세정을 짓고 뜻 그대로 세상 일을 잊으려 애썼을 것이다. 그는 망세정을 짓고 나서 3년 뒤 병사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처음에는 계유정난에 협조해 관직까지 얻은 사람이 왜 나중에는 생육신에 동조해 관직을 물러나 낙향했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세조의 '지나침'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이미 선왕인 단종은 영월 청냉포로 유배 갔고 결국 교살돼 죽었다. 그러니 선왕 복위를 도모할 수도 없는 일인 바, 뒷물이 앞물을 채우는 저 흐르는 강물처럼 역사의 흐름도 이와 같다 여기고 시류에 순응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물러나 생육신의 삶을 지향했던 것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은 선왕에 대한 충정, 그리고 한가닥의 양심이 그를 자연으로 이끌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어제 있었던 특검법의 국무회의 통과 과정이다. 이재명 정부는 10일 국무회의에서 3대 특검법을 공식 의결하여 공포시켰다. 알다시피 3대 특검법은 소위 내란종식을 명목으로서 민주당에 반대했던 과거의 윤석열 정부 관료와 여당 정치인들을 쓸어버리려 만든 무시무시한 법안으로, 수사 인력에 검사만도 최소 120명이 동원돼 적어도 7개월 동안 정·재계를 들쑤실 법안이다.
3대 특검법은 한마디로 정치보복법으로서, 그것이 몰고 올 폭풍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특검에 소요될 비용도 천문학적일 것이다. 까닭에 나는 이 법안을 국무위원들이 당연히 반대하리라 생각했다. 이재명 정부에서도 윤석열 내각의 반대가 걱정되었는지 법안 통과에 필요한 국무위원 의결정족수를 체크하고 국무위원을 얼르며 국무회의 참석을 사전 독려했다는 후문이다. 국무위원들이 불참하거나 반대를 하면 3대 특검법은 당연히 통과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생각은 기우였고 나의 생각 역시 턱없는 오판이었다. 이 악법의 법안은 국무위원들의 전원 참석 속에 무난히 통과되었다. 윤석열 내각 국무위원들은 마치 영혼 없는 기계처럼 거수기 노릇을 하며 부역을 했는데, 거기에는 이재명이 과거 야당대표 시절에 내란 동조자로써 처벌을 예고했던(계엄 선포 당시 국무회의 참석자라는 이유로) 이주호 교육, 조규홍 보건복지, 송미령 농림통산, 조태열 외무, 오영주 중소벤처, 김용호 통일부 장관 등도 포함돼 있었다.
그럼에도 그 장관들을 포함한 국무위원들이 모두 국무회의에 참석했고 특검법에 찬성했다. 여기서 최소 네 사람만 불참해도 국무회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특검법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이 국무위원들이 일괄사표를 내고 국무회의에 불참해 이재명 정부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하리라 생각했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보수 우파가 그러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썪어빠진 사법부는 어차피 굴복할 것이라 여겼으므로)
물론 대선 직후 국무회의들은 일괄 사표를 냈다. 하지만 박성재 법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반려됐고, 나머지 장관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제 돌아와 업무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특검법 논의 국무회의에 참석했고, 향후 폭풍을 몰고올 정치보복법을 통과시켰다. 왜 그랬을까? 이미 판이 기울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쓰레기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특검법에 찬성했으니 향후의 정치보복에서 나는 좀 빼달라는 치졸한 아부였을까...?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는 반대당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다 두 번이나 귀양을 갔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장장 9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해야 했고 풀려나 복권한 후에도 다시 소신을 내세우다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는데, 그는 거기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논어의 글귀를 써 넣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과 푸르름을 안다는 뜻으로, 사람도 어려움이 닥쳐야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속뜻을 담았다. 세상에서 장관까지 올랐다면 공직자로서는 오를 만큼 오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도 받고, 부처 최고의 자리에서 권력도 누릴 만큼 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치자 몸을 움추려 반대파였던 사람에게 앞다투어 부역하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수사받고 설사 감옥에 보낸다 해도, 그저 "허허, 말년이 사납구먼" 하고 자조하면 되고, 얼마 후면 풀려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설마 하니 죽이겠는가, 아니면 멀리 귀양을 보내겠는가.... 귀양과 같은 옥살이를 했다면 차라리 훈장이다. 훈장을 달았으니 정치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며 국회의원 같은 자리에 도전할 수도 있을 터이다. 아무튼 놀랍고 답답하고 화가 난다. 이러니 정권을 쉽게 내준 것도 무리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다시 심윤부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그가 풍양에 입향 후 일대는 청송심씨의 세거지가 됐고, 그래서 그의 묘소 옆 청송심씨 묘역에서는 형조판서 심광언과 그의 외조부 대사성 서강, 경상우도병마절사 심안인 등의 묘소를 볼 수 있는데, 돌아오는 길에 마을 입구에서 뜻밖에도 심광언의 신도비를 발견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비석은 당시에는 잘 모르다가 찍은 사진을 집에 돌아와 살펴보니 심광언의 아버지 심빈의 족장비로, 일종의 조상숭배 같은 형식의 비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