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딸의 무덤을 찾아가다.
앞서 '실전된 흥안군의 묘와 불가사리'를 말하며 선조의 아들 13명을 열거하자 "무능한 임금이 자식은 많이 두었다"는 댓글이 올라왔다. 선조는 딸도 많아서 적어도 10명을 두었는데,(영아사망자를 제외하고도) 그 딸 중의 하나가 임진왜란 중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붙잡혀 갔고, 그 묘가 쓰시마 우나쓰라(女連)에 있다는 사실을 '광해군 · 임해군 묘와 어머니 공빈김씨의 성묘'에서 말한 바 있다.
아무튼 선조가 자식을 많이 둔 덕에 조선왕실은 한동안 후사 걱정을 안 할 수 있었으니, 광해군 이후의 왕계는 모두 선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광해군에 이어 16대 국왕이 된 인조만 해도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임금이 된 경우이다. 그는 반정공신에 추대되어 졸지에 왕이 되었는데, 선조, 고종과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조선역사상의 가장 무능한 임금 되시겠다.
반면 광해군은 1남 1녀만을 두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아들 이지(李祬, 1598~1623)가 강화 교동도로 유배된 후 교살되며 광해군의 직계는 끝이 났다. 하지만 여식은 어렵게 살아 2남 3녀를 낳아 기르며 45세까지 살았던 바, 지금 광해군의 후손이라 하는 사람들은 모계로 이어진 후손들이다. 광해군의 제사도 국가의 허락하에 그 여식의 자식들인 외손이 받들었다고 한다.
광해군의 딸은 1619년 6월 23일, 후궁인 숙의(내명부 종2품의 품계) 윤씨에게서 태어났다. 윤씨는 파평윤씨 명문가의 여식으로 윤영신(尹永新)이라는 이름자를 가졌다. 그는 1617년 궁에 들어왔으며 1619년 옹주를 낳은 뒤 정2품 소의가 되었고 1622년 종1품 귀인에까지 오르며 문자 그대로의 귀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귀인으로서의 팔자는 거기까지였는지 이듬해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윤씨는 그날밤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계해정사록>에 따르면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4월 9일, 귀인 윤씨는 음행(淫行)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군기시(軍器寺, 지금의 서울 프레스센터) 앞에서 처형되었다. 향년 21세였다. 여기에는 이설(異說)이 있어 <연려실기술>에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앞선 중종반정 때 연산군의 애첩이었던 전전비, 김귀비, 장녹수 등이 군기시 앞에서 참수된 것을 보면 전자가 맞는 듯하다. 물론 음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누명으로,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망시의 나이 21세였다.
인조반정 당시 4살이던 옹주는 광해군이 45세에 얻은 늦둥이 딸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귀하게 자라다 좋은 혼처를 택해 시집을 갔을 터였다. 하지만 인조반정 후 정반대의 현실이 펼쳐졌으니 졸지에 부모와 떨어지게 된 아이는 외삼촌 윤홍달의 집에서 스무 살 너머까지 살게 되었다. 말하자면 혼기를 놓친 것이니, 윤홍달은 해평윤씨 명문가 윤두수의 사위로 뒷배가 든든했음에도 조카를 시집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폐주의 딸이라는 딱지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딸 전주 이씨는 사실 옹주가 되지 못했다. 옹주의 직첩을 받기 전 인조반정이 일어난 쫓겨난 까닭이다. 그는 스무 살 너머 음성박씨 문중의 박징원에게 하가(下嫁, 낮춰 시집을 감)해 2남 3녀를 낳고 살았는데, 당시 옹주댁이라 불려다는 말도 있다. 시집온 여자가 ○○댁이라 불릴 경우 대개 여자의 본향을 붙이는 것이 상례다. 만일 옹주댁이라고 불렸다면 아마도 옹주(瓮州)와 같은 지명으로 여겨졌을는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대로 옹주댁은 2남 3녀를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지만 3녀 뒤에 생산한 아들이었으므로 박징원은 첩을 두어 이 첩으로부터 먼저 아들을 보았다. 옹주댁 모자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듯하다. 하지만 그 아들들과 후손은 국가로부터 녹용(錄用, 왕족의 자격으로 특채됨) 되어 하급직을 얻은 기록이 있는 바, 아주 어려운 삶을 살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면서 왠지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옹주댁은 1664년(현종 5년) 45세로 세상을 떠났고, 이때 현종이 장례 물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산55에 있다. 오늘 투표를 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찾아가 보았는데, 사능공동묘지 전체 441기 무덤 중의 하나였지만 유일하게 망주석이 있는 옛 무덤이라 찾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무덤 위에 있다는 어미 귀인 윤씨의 무덤은 특정된 곳이 없어 짐작 가는 묘의 사진을 찍어왔는데, 오류가 있다면 차후라도 정정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