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명당의 허망함ㅡ박영효 무덤의 경우

기백김 2025. 6. 16. 22:25

 

인간의 목숨은 유한하나 역설적이게도 사후(死後)는 무한하다. 따라서 인간이 생전에 살 집은 억지로나마 늘려갈 수가 있어도 유택(幽宅)을 무한히 늘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히 사는 인간은 없기에 언젠가는 땅에 묻혀야 되는데, 그들이 묻힌 곳은 영원이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꽤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므로 땅이 점점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로 땅을 넓히지 않는 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더멘션(dimension, 次元)으로 볼 때 우주는 무한하다 하므로 우리가 우주 식민지와 같은 땅을 갖게 된다면 묘지 문제는 해결된다. 말하자면 우주장(宇宙葬)을 하면 되는 것인데, 실제로 다른 암석 행성 어느 곳에 묻히지는 않았지만 1997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는 유해 일부가 2006년 1월 19일 우주선 뉴호라이즌스 호에 실려 우주로 갔다.

 

 

아마추어 천문학자 시절의 클라이드 W. 톰보 / 그는 열정 하나로 명왕성을 발견했다.
명왕선 탐사선 '뉴 호라이즌스'호의 발사 장면
톰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뉴호라이즌스 호에 실려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날았다.

 

하지만 이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지구에서 장지(葬地)를 찾아야 하는데, 예전에 보다 다른 차원의 장법(葬法)을 소개했다가 티스토리 운영자인 Daum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몇 해 전, 조로아스터교의 사멸을 말하며 생전에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그룹 퀸의 멤버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 그리고 조로아스터교의 장법인 조장(鳥葬)을 소개했다가 Daum으로부터 로그인이 정지되었다. 해당 글은 삭제됐으며, 다른 글을 읽을 수는 있으나 쓸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이유는 '청소년 유해정보'를 게재했다는 것인데, 포르노 물 같은 사진은 당연히 아니고 독수리가 유해를 쪼아 먹는 사진을 소개한 것이 문제가 된 듯했다. 해골이 등장하는 사진도 있었고 시신과 해골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사진도 있었으니 흉할 법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문화적 차이일 뿐, 시신을 노상에 방치하는 풍장(風葬)이나 새가 쪼아 먹게 만드는 조장은 조로아스터교나 티벳불교에서는 오히려 성스럽게 여기는 장례법이다. 

 

조장의 경우에는, 살아생전 조류 등 자연의 육류를 섭취한 인간이 죽을 때 그 육신을 자연에 돌려준다는 뜻도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영혼이 새의 날개에 실려 승천한다는 내세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들은 망자의 시신을 도끼와 칼 등으로 새들이 먹기좋게 쪼개 놓기도 하는데, 그 장면을 소개한 사진 또한 문제가 되었을 수는 있겠다. 아무튼 이상의 일로 로그인이 정지됐는데, 지속적으로 항의해서 인지 어째서 인지 어느 날 보니 스스로 풀려 있었다.

 

 

필리핀 먀오족의 장법은 관을 절벽에 매다는 것이다. / 높이 매달 수록 천국에 갈 가능성이 높다 하는데 그럴싸하다.
영어로는 이 장례법을 Hanging Coffin이라 부른다.

 

납골당, 수목장에 이어 요즘에 뜨는 장법으로는 해양장이 있다. 해양장은 바다장으로도 불리며 화장한 유해의 골분(骨粉)을 바다에 산골하는(뿌리는) 자연장(自然葬)의 일종인데,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손으로 흩뿌리는 것이 아니라 기구를 이용해 골분을 바닷물에 침전시킨다. (시신을 그대로 물속에 가라앉히는 수장과는 아예 다르다) 

 

해양장이 허락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은 일로, 전에는 일절 불가능했다가 2012년 해양수산부에서 해양 산골이 해양환경관리법 상의 해양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후부터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반면 일본은 바다에 산골하는 것에 대한 규제가 없어 과거부터 행해졌다) 

 

하지만 해변에서의 산골은 아직까지 제한이 있어 산골 장소는 해안선으로터 5km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하며, 골분과 생화(生花)만 함께 뿌릴 수 있고 용기나 유품은 배출할 수가 없다. (물론 다른 선박의 항행·어업행위·수산동식물의 양식 등에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 

 

알아보니 인천항 등에서는 어느새 전문업체가 생겨나 배를 타고 나가 부표가 있는 특정 영역에서 해양장을 거행하게끔 하고 있었다. 또 기일에 부표가 떠 있는 산골 장소를 찾아 추모를 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해양장 비용은 최대 50~60만원으로 비싸지 않다.

어느 회사의 해양장 안내문
어느 회사의 해양장 안내문

 

이 같은 유골 뿌리기로 고인을 모시는 장법을 통칭하여 산골장(散骨葬)이라 부르는데, 산골장은 육지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가능하기도 하니 법적으로는 사유지, 국유지, 공공택지, 민가인근, 보호구역 등이 아니면 유골 뿌리기가 가능하다는 아주 애매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벽제 화장장 인근에 화장한 유골을 산골하는 이가 많아 주변의 온 산이 새하얗던 적이 있었고 이 뼈가루가 비산돼 민가나 농지에 날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지금은 화장장 주변에서의 산골은 불가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밖의 장소에서는 산골이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법과 합법을 떠나서 소중한 가족이나 친지를 떠나보내며 주위의 눈치를 보며 몰래 처리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권장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위의 해양장을 소개한 것인데, 여기에는 나의 오랜 장묘 사상이 뒷받침됐다. 이에 관해 앞서 소개한 글은 다음과 같다. 

 

사라지는 묘지를 대신해 전원(田園)과 야산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생겨난 납골당, 그 안(內)도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밖은 더욱 흉물스럽다. 더욱이 납골당 안장은 전통에도 예법에도 모두 없던 일이었다. 그 또한 아파트와 같은 공간집약적의 경제성과 편리성 때문이런가.....

 

망자를 납골당에 모시려면 차라리 매장을 하는 게 낫다. 매장은 망자와 그 흔적 모두를 언젠가는 흙으로 돌려놓지만 납골당은 영원히 흉물로 남을 것이다. 대안으로 화장재를 수목장(樹木葬)하거나 산천에 뿌리는 것을 추천한다. 인간이 인간이 왔던 본래의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르는 다르지만, 앞서 박영효의 장례에 관해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달아났던 박영효는 암살 위험에 처하자 다시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항구 등에서 막노동을 전전하던 그는 귀족인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일본으로 돌아가 야마자키(山崎永春)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그즈음 일어난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그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친일 관료 박제순의 주선에 의해서)

 

일본이 득세하자 고종도 사면령을 내려 그를 받아주게 되었고 이에 박영효는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과 총리대신 서리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갑신정변 이후 꼭 10년 만이었다. 이후 그는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의 세력이 후퇴하고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는 명성황후 암살의 누명을 쓰고 1885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막강 발틱함대가 부서지고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물러나자 박영효는 다시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주선에 의해서) 그리하여 이번에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조선을 위한 마지막 충정이었을까, 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고종의 퇴위를 막기 위해 분투하였고, 그러다 결국 친일파 관료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써 제주도에 유배가게 된다.(참 파란만장하다) 그의 유배 기간 동안 결국 한일병탄은 이루어지고 조선왕조 500년과 대한제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제는 지킬 나라조차 없어졌기 때문일까, 이후 그는 본격적인 친일행각에 나서니 1910년 일본 후작 작위를 받아 정계에 복귀했고,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 1926년에는 중추원 의장에 올랐으며 1932년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에 피선되기까지 했다. 그의 말년은 죽을 때까지 화려했으니 1936년 9월 21일, 사망할 때의 직위는 중추원 부의장이었다. 그는 생전에 점지해 두었던 부산 다대동 묘지에 묻혔는데, 장례를 일본인 경남 도지사가 집전할 만큼 죽어서도 위세를 부렸다. 일본 왕실에서 내린 후작이라는 직위와 중추원 부의장 직함의 위력이었다.

 

부산 다대동 묘소는 박영효가 생전에 지관을 고용해 전국 최고 명당을 찾아낸 곳으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누가 봐도 길지(吉地)라 할 만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죽은 그가 부산역에 운구되어 묻힐 때까지의 장례 또한 뻑적지근했으니,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 또한 인산인해였다. 부산시 사하구 다대 본동, 그의 무덤 자리는 태백산맥의 혈맥이 마지막 용트림을 한다는 소문난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명당이 그러하듯 이 또한 헛소리였던 듯하니 광복 후 그는 친일 부역자로 지탄받아 묘소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했던 바, 이후 그의 손자 박찬범이 그 유해를 화장해 아내 영혜옹주의 유골과 함께 경기도 화도군 모란공원에 안장했다. 그의 묘소가 있던 자리에는 송도 유명 요리점의 사장이 묻혔는데, 그 아들은 사업이 망해 송도 요리점 건물도 팔렸다 하며, 무덤 일대는 지금 라파 요양 병원이 들어서 있다.

 

부산 지하철 다대포항 3번 출구로 나와 돌아가면 만난 수 있는 라파 요양병원 자리가 박영효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예전 그 건물 1층에 있는 국민은행에서 ATM기를 이용한 적이 있다. 그 일대는 지금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심이다. 이곳을 떠난 박영효의 유해는 앞서 말한 대로 화장되어 경기도 모란공원에 묻혔는데,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곳은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부산 라파 요양병원

 

모란공원은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피폭돼 사망한 조선의 마지막 왕손 이우와 결혼했던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가 국가로 상대로 싸워 지킨 땅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공동묘지이다. (박찬주는 1995년 7월 13일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영효는 이 공동묘지 언덕 축대 아래 위치해 있는데, 일단 장소가 궁벽하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 명당 따위가 무의미함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모란공원 박영효 묘 입구의 태극기 표석
박영효 묘 는 계단 축대 밑 읍습한 곳에 있다.
금릉위 박영효 와 부인 영혜옹주 합장묘
태극기의 최초 사용자라하여(제작자는 아님) 태극기 묘표를 세웠다.
차라리 박영효 무덤 옆의 일가친척 묘가 양지바르다.
모란공원 '경천숭조' 표석
모란공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