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美學)

'칼레의 시민', 우리 것도 진짜다

기백김 2018. 6. 12. 08:26

 

로댕의 유명한 조각상 '칼레의 시민'은 군상(群像, 여러 명을 조각한 것) 조각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작품이다. 여기서 칼레는 과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싸움인 백년전쟁(1337~1453년) 당시 영국에 점령되었던 프랑스 북부의 도시이다. 백년전쟁의 발발 원인은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생성부터 죄 훑어야 되므로 좀 복잡한데,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해묵은 영토 전쟁이라고 여겨도 큰 무리는 없다. 

 

좌우지간 그 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혼쭐이 났다. 그래서 나라의 영토가 남쪽의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다 영국에게 먹였는데, 칼레는 도버 해협 건너편에 인접한 도시였으므로 마찬가지로 영국군의 공격 타깃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중앙정부 역시 칼레가 작은 성이므로 쉽게 함락될 것이라 여겨 지원조차 하지 않았으나, 칼레의 시민은 의외로 11개월을 버티며 결사 항전을 하였다.(임진왜란 당시 우리의 진주성 싸움과 비슷하다)

 

하지만 1347년 결국 성은 함락됐는데, 이때 화가 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을 모두 몰살시키려 했고, 칼레 시의 대표는 시민들의 생명을 애걸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 칼레 시에서 가장 명망 있는 대표 6명이 교수형에 사용될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영국군의 진영에 와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칼레의 위치

 

누가 과연 시민들을 대표해 죽을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제비뽑기까지 거론될 즈음 의외로 칼레 시의 최고 부자인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나섰다. 그 뒤를 이어 부유하고 존경받던 시민 장 데르가 나서고, 이어 사업가 자크 드 위쌍, 그의 사촌 피에르 드 위쌍, 장 드 피엥스, 앙드리에 당드리가 뒤를 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7명이었으므로 한 사람은 빠져야 했다. 그들은 다음날 가장 늦게 오는 사람을 빼기로 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다음날 가장 먼저 지원했던 생 피에르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두들 그가 죽기를 두려워한 것인가 의심했지만 알고 보니 그는 전날 밤에 자살을 택하였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결단을 보여준 것이었다. 아무튼 그 6명은 적진으로 나아가 사형대에 올랐는데, 이들이 처형되려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자신의 임신 소식과 함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편지가 당도한 것이었다. 이에 그들 시민 6명의 사형 집행은 멈춰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 시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이에 관한 기념물을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했다. 이에 로댕은 10년 간의 노력 끝에 1893년 6월 3일 드디어 그 기념동상을 완성하였던 바,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칼레의 시민’이다

 

 

 

 

 

 

 

이 작품을 만든 프랑수아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인상주의로 대표되는 프랑스 근대조각의 서막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언뜻 젊은 시절부터 제대로 코스를 밟은 조각가로 여겨지지만사실은 하급관리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야말로 흙수저로서, 거의 마흔 무렵까지 막노동과 조각관련 기능공으로서 겨우 생계를 이은 사람이었다.(그가 종사한 쇳일이란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1879년의 한 컨테스트에 출품한 '청동시대'라는 작품이 알려지며 이름을 얻게 되었던 바, 위 '칼레의 시민'에 표현된 개개인의 고뇌와 고통 서린 얼굴은 어쩌면 로댕의 체험의 육화(肉化), 그 자체일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작품이 얼마 전 'JTBC 뉴스룸' 진행자의 입에 올랐다.(칼레의 시민 스토리는 팩트가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미스 myth 라고도 하나 이쯤 되면 전설도 값어치가 실릴 듯하다) 

 

 

 

 

프랑스 북부 칼레의 시청사 앞에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 이 서 있습니다.

동상은 지나는 이들과 어깨라도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 놓여서 도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칼레의 시민들이 사랑하는 그 작품이 도시 중심에 세워진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중에 영국의 공격을 오랜 시간 버텨낸 칼레의 시민들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지만…

 

영국 국왕은 항복의 징표로 시민대표 6명을 뽑아서 처형대 앞에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스스로의 목에 끈을 묶은 채 앞으로 나선 사람들.

칼레시의 가장 부자가 앞장을 섰고 시장, 법률가, 귀족이 차례로 지원을 했습니다.

요행히 타인보다 무언가를 많이 갖게 된 자들의 의무란, 때로는 이렇게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은 이때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다시 로댕의 작품 속 갈등하는 인간의 얼굴을 들여다보죠.

남들보다 요행히 무언가를 더 갖게 된 사람들.

그들이 기억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사람들과 어깨를 스치듯 가까이 다가서고자 했던 칼레의 시민…

그리고 물컵과 괴성, 가위와 땅콩으로 기억될 KAL의 세 모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참으로 비유가 적절했던 손석희 앵커의 그 작품을 오래전 일본 동경의 우에노 미술관 앞에서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의 강렬함과 함께 기억되는 것은 일본의 어느 부자가 로댕의 작품을 사 와 일본 시민들에게 기증했다는 안내판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에노 공원의 것이 원본이고 오히려 프랑스의 것이 복제본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그러면서 그 나름대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함께 부러웠는데) 알고 보니 나의 생각은 옳은 것 아니었다. 

 

 

동경 우에노 공원에 전시된 '칼레의 시민'
안내문에  기증자 마쓰카타의 이름이 쓰여 있다.
동경 우에노 공원에 전시된 ' 지옥의 문 '

 

'칼레의 시민'은 칼레 시청 앞의 것을 비롯해 파리 로댕미술관,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 앞 빅토리아타워가든, 덴마트 코펜하겐 클립토테크 미술관, 벨기에 마리옹 왕실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일본 우에노 공원의 것도 마찬가지의 한 작품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같은 거푸집에서 나온 같은 작품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었으니 우리나라에도 같은 거푸집에서 나온 진품이 있기 때문이었다.(내가 우에노 미술관에 갔던 시절에는 없었긴 했지만)

 

다름 아닌 서울 소공동 로댕 갤러리(플라토 미술관으로 개명됨)에 전시돼 있던 '칼레의 시민'이 바로 그것으로, 같은 거푸집에서 나온 12번째 에디션이었다.(프랑스 정부에서 12번째 에디션까지 진본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또 그 미술관에는 마찬가지로 삼성문화재단에서 1994년 구입한 그 유명한 ‘지옥의 문’(7번 째 에디션)도 전시돼 있었던 바, 우에노 공원의 것을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관계자의 말에 에 따르면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 두 작품의 구입비로 거의 100억 원이 들었는데 지금의 가치로는 수백억 원에 이른다 한다)

 

 

플라토 미술관에 전시됐던 로댕의 진품 칼레의 시민(252x298x223cm)과 지옥의 문(400x635x85cm)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실내에 있고 홍보가 덜 된 탓에(삼성 측에서 뭔가 아끼는 듯한 느낌?) 일반 시민들은 그것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는 점이었는데, 지금은 미술관이 있던 삼성생명 건물이 부영건설에 매각되면서 아예 폐관되고 말았다. 이에 로뎅의 진품 2점은 갈 곳이 조금 막연해졌는데, 리움 미술관으로 가든 호암 미술관으로 가든 작품의 가치야 빛나겠지만 사람들로부터의 발길은 더욱 멀어질 것 같다.(우선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니)

 

들리는 말로는 조만간 강남 어느 곳에 부지를 마련해 옮긴다는 소문도 있는데, 이왕이면 그곳이 야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 우에노 공원의 그것처럼 그 작품들은 야외에 있어야 제격이며 멀리서 봐야 제격이다. 개인적으로 플라토 미술관의 폐관은 추억의 하나가 달아난 것 같아 무척이나 아쉽다.(2014년 수제 가구 전시회에서 땀나는 설명과 함께 백만 불짜리 웃음을 선보였던 그 아르바이트 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풍경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사랑과 고통과 죽음 등을 상징하는 200여 명의 인간상을 조각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것이 원본이고 미국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일본 우에노 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위 사진은 삼성 플라토 미술관에 처음 전시됐을 당시의 모습이다.
1차세계대전 당시 가와사키 조선소의 사장이었던  마쓰카타 고지로는 1차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 대가들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는데(약 1만 여점)  '칼레의 시민'도 그중의 한 작품이다. 그의 컬렉션 중의 일부는 아직도 유럽에 남아 있는데, 최근 런던에서 발견된 마쓰카타 컬렉션 작품목록에는 모네, 르느와르, 고흐, 로댕 등의 작품 953점이 쓰여 있어 새삼 화제를 모았다. 2016년 고베 미술관에서 전시된 마츠카타 컬렉션 전의 포스터에는 마츠카타의 초상화와 함께 '진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자신감 넘치는 카피를 담았다.
내년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개관 60주년 기념으로 대대적인  마쓰카타 컬렉션 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포스터에 모네의 '수련', 고흐의 '아를의 방'을 내걸었다. 그의 컬렉션 중 런던에 보관됐던 작품들은 1939년 불탔고, 파리에 보관했던 작품들(428점으로 추정)은 지금 프랑스 정부와 반환을 추진 중이다. 일본으로 가져왔던 컬렉션의 일부는 관동대지진과 2차세계대전의 와중에 일부 소실됐으나 지금도 우에노의  국립서양미술관에 엄청난 작품이 보관· 전시돼 있다. 그 양이 너무 많아 일괄 전시를 못한다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마쓰카타는 모두가 편하게 볼 수 있는 개인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가와사키 조선소의 파산으로 이루지 못하고, 컬렉션은 왕실 박물관을 거쳐 우에노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으로 이관됐다. 이 미술관은 1959년 프랑스가 보관하던 마쓰카타 컬렉션의 반환을 계기로 지어졌는데,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이란 것 자체만으로 세계문화유산에의 등재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