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의 진실(I) - 밀라노 칙령의 진실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또 다른 황제인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리키니우스의 치소(治所)였던 밀라노에 입성해 저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다.(앞서도 설명했지만 당시는 로마의 4명의 황제가 패권을 다투던 내전 시기였다) 이로써 변방 팔레스타인에서 비롯된 소수 종파 기독교는 일약 로마의 대세로 떠올랐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태양신 숭배 신앙 미트라(Mithras)교의 독실한 신도였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의 진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을까?
(기독교인들이 알면 실망스럽겠지만) 그 이유는 대단히 심플했다. 정적인 리키니우스가 아직 건재한 까닭이었으니 그에 대한 공격에의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는 그 이듬해 기독교 신앙의 보호 명목으로 재차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공하는데,(리키니우스의 영토였던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방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이때 리키니우스는 마르디아 평원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도 패해 데살로니카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324년)
말하자면 밀라노 칙령은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술수에 불과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멋진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콘스탄티누스는 장인인 막시미아누스와 처남 리키니우스도 정적이 될까 염려해 살해하고, 제 아들 크리스푸스와 후처인 파우스타도 간통의 혐의를 씌워 사우나 열탕에서 쪄죽인 무써운 사람임. --;;)
~ 억울한 건, 당시 리키니우스는 자국 내의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기독교를 정식으로 공인하는 식의 정치 쇼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하지만 어찌됐든 그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수싸움에서 패하였고 그것이 결국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혹자는 밀라노 칙령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황제로 있던 시절에 전임 황제 갈레리우스의 기독교 관용 정책에의 계승을 선언한 내용에 콘스탄티누스가 숟가락만 얹은 것이라고도 함. 이게 확실할 듯싶다.)
~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에 앞서 싸웠던) 또 다른 황제 막센티우스와의 티베르 강 전투 전에 보았다는 저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의 환상, 즉 "이 표시로서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라는 천상의 소리와 함께 거대한 십자가를 목격했다는 내용도 기실 거짓말일 확률이 거의 100%다.(☞ '본디오 빌라도의 억울한 누명')
그것을 전투에 앞서 보았다 하니 혼자 보았을 리 없으련만, 십자가를 보았다거나 소리를 들었다거나 하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은 전무한 채, 이 스토리는 오직 콘스탄티누스 황제 추종자였던 에우세비우스의 책에만 유독하다.(역사가들은 이것이 에우세비우스의 창작이거나 뜬소문을 기록한 것으로 확신하는데, 권력에 눈이 멀었던 그는 훗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절친 니코메니아의 에우세비우스마저 배반한다)
~ 게다가 당시는 아직 십자가가 기독교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기 한참 전이었던 바, 초기 기독교도들은 물고기 문양(익투스/ΙΧΘΥΣ)이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을 자신들의 성호(聖號)로 삼았다.(영화 '쿼바디스'를 보면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자신들끼리의 은밀한 소통의 표시로서 익투스를 재빨리 그렸다 지우는데, 당시 십자가 마크가 있었다면 간단히 그것을 그렸지 복잡하게 물고기를 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