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삼위일체의 진실(I) - 밀라노 칙령의 진실

기백김 2019. 5. 26. 05:17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또 다른 황제인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리키니우스의 치소(治所)였던 밀라노에 입성해 저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다.(앞서도 설명했지만 당시는 로마의 4명의 황제가 패권을 다투던 내전 시기였다) 이로써 변방 팔레스타인에서 비롯된 소수 종파 기독교는 일약 로마의 대세로 떠올랐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태양신 숭배 신앙 미트라(Mithras)교의 독실한 신도였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의 진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을까?

 

(기독교인들이 알면 실망스럽겠지만) 그 이유는 대단히 심플했다. 정적인 리키니우스가 아직 건재한 까닭이었으니 그에 대한 공격에의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는 그 이듬해 기독교 신앙의 보호 명목으로 재차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공하는데,(리키니우스의 영토였던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방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이때 리키니우스는 마르디아 평원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도 패해 데살로니카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324년)

 

 

리키니우스 1세(재위 308-324)의 두상. 발칸 반도, 소아시아, 이집트 등 로마 동쪽 일대를 다스렸다.

 

말하자면 밀라노 칙령은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술수에 불과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멋진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콘스탄티누스는 장인인 막시미아누스와 처남 리키니우스도 정적이 될까 염려해 살해하고, 제 아들 크리스푸스와 후처인 파우스타도 간통의 혐의를 씌워 사우나 열탕에서 쪄죽인 무써운 사람임. --;;)

 

~ 억울한 건, 당시 리키니우스는 자국 내의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기독교를 정식으로 공인하는 식의 정치 쇼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하지만 어찌됐든 그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수싸움에서 패하였고 그것이 결국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혹자는 밀라노 칙령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황제로 있던 시절에 전임 황제 갈레리우스의 기독교 관용 정책에의 계승을 선언한 내용에 콘스탄티누스가 숟가락만 얹은 것이라고도 함. 이게 확실할 듯싶다.)

 

~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에 앞서 싸웠던)  또 다른 황제 막센티우스와의 티베르 강 전투 전에 보았다는 저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의 환상, 즉 "이 표시로서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라는 천상의 소리와 함께 거대한 십자가를 목격했다는 내용도 기실 거짓말일 확률이 거의 100%다.(☞ '본디오 빌라도의 억울한 누명')

 

그것을 전투에 앞서 보았다 하니 혼자 보았을 리 없으련만, 십자가를 보았다거나 소리를 들었다거나 하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은 전무한 채, 이 스토리는 오직 콘스탄티누스 황제 추종자였던 에우세비우스의 책에만 유독하다.(역사가들은 이것이 에우세비우스의 창작이거나 뜬소문을 기록한 것으로 확신하는데, 권력에 눈이 멀었던 그는 훗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절친 니코메니아의 에우세비우스마저 배반한다)

 

 

이런 식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인데,(책에는 '라바룸'이라는 형식의 십자가로 나옴)
그것이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에도 새겨졌다.
재미있는 것은 기둥 하부에 다이아나와 아폴론, 숲의 신 실바누 등의 부조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 게다가 당시는 아직 십자가가 기독교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기 한참 전이었던 바, 초기 기독교도들은 물고기 문양(익투스/ΙΧΘΥΣ)이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을 자신들의 성호(聖號)로 삼았다.(영화 '쿼바디스'를 보면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자신들끼리의 은밀한 소통의 표시로서 익투스를 재빨리 그렸다 지우는데, 당시 십자가 마크가 있었다면 간단히 그것을 그렸지 복잡하게 물고기를 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익투스. '구원자인 신의 아들 예수'라는 희랍어 문장의 머릿글자이다.
요즘도 차 뒤의 익투스가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이걸 대체 왜 달고 다니는지....

  

유명한 '기독교회사'(A HISTORY OF THE CHRISTIAN)의 저자 윌리스턴 워커도 이 대목에서는 거의 양심선언에 가까운 가까운 글을 썼다. "콘스탄티누스는 적어도 초기에는 기독교의 유일신론과, 일찍이 아우렐리우스가 장려하였고 콘스탄티누스 자신도 310년 이후 의식적으로 신봉한 태양교의 유일신론 간에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을 증거가 존재하니,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미트라교의 직책이었던 대사제(Ponntifex Maximus)란 직함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미트라 신에게(정확히는 미트라 신의 로마식 변형인 솔리 인빅토에게) 헌정한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앞서 '크리스마스의 진실'에서 말한 대로 예수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은 사실은 미트라와 솔리 인빅토의 생일이었니, 동지 이후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그날을 태양신의 탄신일로 받들었던 것이다.

 

나아가 321년에는 매주 첫째 날을 태양의 날(디에스 솔리스, dies Solis), 즉 일요일(sunday)로 지정하여 노동을 쉬며 태양신을 경배하는 날로 만들었는데,(강제 공휴일로, 이를 어길 시 엄벌에 처했다) 훗날 주일(디에스 도미니쿠스)의 개념으로 변모돼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발행한 동전 / 위쪽이 315년에, 아래쪽이 316년에 발행한 것이다. 뒷면에 태양신의 그림과 함께 '태양신 솔리 인빅토에 바친다'(SOLI INVICTO COMITI)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동쪽 흑해 연안의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를 감행한다. 우리는 그동안 이 대사건에 대해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공인' 식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330년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라는 초간단 문장으로만 입력돼 왔다. 하지만 일국의 천도라는 것이, 그것도 대로마제국 수도의 이전이 결코 단순한 사건일 리 없었을 터, 사전에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있었다. 그 이유를 여기서 다 말하기는 힘들겠고, 나 역시 초간단으로 축약하면 '원로원 죽이기'가 될 것인데, 뜻밖에도 '기독교 제국의 탄생'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도시를 '동쪽의 로마'라고 칭하며 로마의 모든 것을 그대로 옮겨왔는데,(콘스탄티노플, 즉 콘스탄티누스 폴리스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그때 건설된 아래와 같은 높이 50m의 기둥 밑에서 새로운 수도의 낙성식 행사를 가졌다. 훗날의 사가(史家)들이 이른 '기독교를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로마제국'이 소리소문 없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태양신이 모셔진 이 기둥이 거대한 기독교 제국의 탄생의 출발 총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스탄불 쳄베르타쉬 광장의 콘스탄티누스 기둥(Column of Constantine)


최초의 콘스탄티누스 기둥
콘스탄티누스 기둥의 오늘


그런데 사가들의 수사(修辭)와는 달리 이 기둥의 꼭대기에 세워진 모뉴먼트는 태양신과 함께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상이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천도 후에도 기독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명이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그가 325년 소아시아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기독교 계파 성직자들의 교리 다툼을 정리하는 종교회의를 소집한 것은 퍽 뜬금없다.(니케아 공의회)

 

보다시피 이교도였으며 기독교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가 왜 갑자기 기독교 종교회의를 주재하고 나섰을까? 혹시 이번에도 환상을 목격하거나 꿈속의 계시를 받았던 것일까.....? 이른바 '삼위일체설'이라는 기독교의 신관(神觀)이 태동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이다. 하지만 그 엄청난 영향력과 달리 삼위일체 교리가 태동하게 된 연유는 무척이나 어처구니없는 바, 이는 위 밀라노 칙령의 그것을 무색게 한다.

 

~ 다음 회에는 그에 관한 세부를 피력해보려 하는데, 그에 앞서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에 실었던, 니케아 공의회에 대한 객관적 기술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듯해 아래 내용을 옮겨봤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이단의 시비가 매우 잦다. 또한 그 재단의 수위도 매우 높은 편이어서 정립된 기존의 교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가차 없이 이단으로 매도한다.(무써워 ;; 하지만 종교를 빙자해 재물을 모으려는 쓰레기 같은 놈들도 많아 그것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 --;;)

 

 

그런데 과거의 이단에의 재단은 이보다 훨씬 심했고, 게다가 순수하게 종교적 차원에서 진행되기보다는 정치 사회적 편향과 힘의 우열에 의해 판정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아래에 열거된 역대의 유명한 이단자들 역시 그러한데, 아리우스(Arius: 256-336)는 이와 같은 이단자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가 어느 나라 어느 지역 사람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의 활동 지역을 보아 북아프리카 리비아 출신으로 추론된다. 수도사였던 그는 초기 교회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가 되었는데, 수도사가 되기 전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리아 출신의 작가이다. 종교에 관심을 가져 '신들의 대화', '죽은 자와의 대화' 같은 작품을 남기고 신학자 오리네게스와 교류하였으나 다만 선악에 대한 관심에서 일뿐 종교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뿌리 깊은 그리스 철학을 기반으로 한 그의 헬레니즘 사상은 아리우스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바, 이에 근간한 아리우스의 합리적 사고는 '성부 성자 동질설' 같은 비합리적 이론과는 애초부터 화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초상 

 

 

그의 주장은 하나님은 오직 유일신이라는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완전한 동질성을 부정하고 오히려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로서의 예수 크리스트의 인성(人性)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힘을 얻고 있던 아타나시우스*의 성부 성자 동질설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어서,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가 소집한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되었다.

 

초기 기독교 교부. 알렉산드리아 교회 사제 출신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크리스트는 동질이다'라는 이론을 주창하여 예수의 신성을 확립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한 아리우스는 각지의 교회를 돌며 항의 연설을 하며 다님으로써 전 세계의 교회에 교리 논쟁을 불붙였다. 아울러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심각한 고민도 불러 일으켰던 바,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지 얼마되지 않아 교회가 양분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고심 격으로서 열린 것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325년의 니케아 공회의였다. 여기서 니코메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가 아리우스파를 대표해 아타나시우스파와 맞서 싸웠으나 지원을 기대했던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가 변절함으로써 아리우스파의 이단이 확정되었다.

 

 * 유대 카이사레아 교회의 주교로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 자문 역할을 담당했다. 교리 논쟁에 있어서는 시종 중립적이었으나 종국에 아타나시우스 파의 의견을 지지했다. 니코메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와 구별해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라 불린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던 이즈니크 하기야 소피아 사원의 내부
또 다른 낙성식 행사가 벌어졌던 콘스탄티노플 히포드롬(전차 경기장) / 왼쪽으로 콘스탄티누스 기둥이 보인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태양신 숭배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이집트 카르낙 신전의 것을 가져왔다. 콘스탄티누스 당대의 것은 아니고 196년 로마 황제 세비루스가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세비루스가 만들었던 검투경기장을 개조해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히포드롬을 건설했는데, 중앙에 이 오벨리스크가 있었다. 당대의 히포드롬은 오스만제국 시절에 철거되었으나 이 오벨리스크는 지금까지 같은 장소에 남아 있다.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앞의 오벨리스크.

이집트 헬리오폴리스(벧세메스) 태양 신전의 것을 3대 황제 칼리귤라가 가져온 것으로서, 기둥에는 태양신 숭배 문구의 상형문자가 가득하다. 예레미아서(34:13)에서 진노한 하나님이 깨뜨리고 불지르라고 명령한 벧세메스 신당의 그것이 카톨릭의 본산 베드로 대성당 앞에 버젓이 서 있는 것이다. 베드로 대성당은 밀라노 칙령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원으로 건설되었으며 지금의 외관은 1615년 교황 파울루스 5세 때 완성됐다.


* 2편으로 이어짐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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