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안동김문 60년 세도 정치와 옥호정

기백김 2022. 4. 28. 22:14

 

어느 분인가, 일제강점기의 순기능을 말하며, 중세에서 현대로 36년 만에 온 것과 지역감정이 사라진 것을 들었다. 부분적으로는 동감한다. 중세라는 표현은 너무 과하지만, 바지저고리에 상투 매던 시절에서 양복에 중절모를 쓰는 시절로 특급열차를 타고 온 감은 든다. 1884년의 변복령(變服令, 의복 개혁 명령)과 1885년의 단발령(斷髮令, 두발 개혁 명령) 때 거의 죽을 기세로 항거하던 민중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좌우지간 일제시대에는 강제로라도 머리가 깎여졌다. 

 

 

조선인 중 최초로 상투를 자른 유길준(1856-1914)
유명한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미국 유학 중에 보고 배운 것을 국한문혼용체로 쓴 책이다. / 1885년 김홍집 내각 때 내부대신이 된 유길준은 단발령을 주장하며 손수 가위를 들어 태자(순종)의 상투를 잘랐다.
1883년 5월 보빙사(조선 수호통상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간 유길준(●)은 조선의 미개함을 깨닫고 그해 11월 뉴욕에서 과감하게 상투를 자른다. 그리고 미국에 남아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 된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지역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양상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출신지역에 따른 파당(派黨)의식이 정치판에서는 존재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그것이 무용함을 깨달았으니 오직 반일감정과 독립에의 의지로 똘똘 뭉쳤다. 그렇게 불식된 지역감정은 해방 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이후 치러진 여러 선거에서도 지역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지역에서 출마해서 당선되는 경우도 흔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흔해서 요즘과 달리 전혀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특히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 윤보선 후보가 맞붙은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호남지역의 몰표로써 46.6%를 득표하며, 45.1%를 득표한 윤보선에 신승할 수 있었다. 당시 투표율은 85.0%였고, 두 후보의 표 차이는 약 15만 6천여 표로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근소함) 얼마 전 끝난 20대  대통령 선거의 표 차이인 24만 7천여 표보다 작았다. 이와 같은 무(無) 지역감정이 요즘과 같이 극심해진 이유는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니 새삼 적을 필요는 없겠다.

 

내가 갑자기 지역감정을 들먹이는 이유는 최근 그와 같은 사고에 사로잡힌 어떤 독자로부터 집요한 댓글 공격을 받고 있는 까닭이다. 내가 올리는 글들 중 현대정치에 관계되는 글은 없다. 다만 역사적 상황을 묘사하는 글은 꽤 있는데, 나의 해석을 요즘의 정치적 상황에 비약시켜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분들의 댓글은 더러 달렸다. 하지만 지금처럼 지역감정을 가지고 마구잡이로 덤비는 사람은 처음이어서 결국은 댓글과 방명록을 모두 차단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로 나의 고향은 서울이며 소위 말하는 스윙보터에 속한다)

 

솔직히 나는 그 사람을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심각한 정신병자는 아니더라도 '또라이' 계통에는 속할 듯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국민들의 지나친 지역감정과 좌·우 대립이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지난 수십 년간 '망국적'이라는 수식어 속에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 왔음에도 해결되지 못한 일이라 내가 심려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다만 작금의 지역감정과 좌·우 대립이 몇몇 위정자들의 갈등에서 비롯되고 조장되었다는 점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쉽게 말해 우리 국민들은 그들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와 같은 지역감정과 좌·우 대립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한 나만의 해결책으로서 작금의 세태에 대해 스스로를 위안하고, 좌우 어느 쪽이 득세를 하든 (한마디로 선거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슬프거나 기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해답이 아래 그림 속에 있다.

 

 

 

이 그림은 '옥호정도'(玉壺亭圖)로서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장인이자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김조순의 별서(別墅, 농사짓는 별장)인 옥호정 일대를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으로, 서울대 명예교수를 역임한 고(故) 이춘녕 선생의 유지(遺志)로써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모바일 등으로는 자세히 볼 수 없으나 백악산 백련봉(白蓮峯) 일대의 경관과 옥호정을 상세히 묘사한 수작(秀作)이요 대작이다. (150 x 193cm)

 

 

'옥호정도' 옥호정 부근
옥호정 터 표석이 있는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9길
표석과 달리 옥호정 터는 골목 안에 있다.

 

내가 이 그림을 올리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안동김문 60년 세도가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옥호정의 주인인 김조순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인물로서, 1800년 급사한 정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23대 국왕이 된 순조의 장인이다. 그때 순조 나이 11세였으니 그 뒤에 서 있는 국구(임금의 장인)의 힘이 얼마나 지대했을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훈련대장·부제학·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의 요직을 역임하는 동안 안동김문 세도정치의 기반을 착실히 닦았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2)
안동김문 60년 세도의 세력가들
드라마 속의 김조순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제24대 국왕이 되었으나 이때 나이 불과 8세였다. 따라서 왕권보다 외척의 세력이 더 막강했으니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가 일시 세도가문으로서 설쳐대다가 안동 김문 김조근의 딸이 왕비(효현왕후)가 되며 다시 안동 김씨에게 힘이 돌아왔다. 이에 안동 김씨는 조정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매관매직 등으로써 축재에만 골몰하니 나라 꼴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1843년(헌종 9)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안동 김씨는 더욱 힘을 얻었다. (헌종은 훈남에 여자 또한 밝혀 궐 안의 인물 좀 있는 궁녀들과는 모두 관계를 맺을 정도였으나 이상하게 후사는 없었다) 이에 안동김문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아들인 (한마디로 왕족으로는 듣보잡인) 강화도령 이원범을 왕위에 올리고 안동김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들이밀었던 바,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철종은 말이 좋아 왕족이지, 귀양 간 왕족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된, 그저 하루 먹고 살기 바쁜 농사꾼에 불과한 자였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헌종의 주변에 왕이 될 만한 근친(近親)이 없던 까닭도 있었지만 안동김문이 제 입맛에 맞는 자를 선택한 면이 짙었다. 여하튼 철종은 듣보잡에서 졸지에 왕이 된 경우였으니 힘이 있을 리 없을 터, 세상은 자연히 안동김문의 천국이 되었다.

 

 

철종(哲宗, 1831~1864) / 한국전쟁 부산 피난 시절 보관창고의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복원된 철종의 어진 / 아무튼 띨해 보인다.
철종이 살던 강화도 용흥궁
초가집이었던 곳이 잠저(潛邸)가 되며 기와집으로 변했고 궁(宮)의 명칭이 붙여졌다.
강화행렬도 / 이원범을 데리러 온 관리들의 행렬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149x434cm의 12곡 병풍의 일부.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반면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힘들어져갔다. 매관매직으로 관리가 된 자들은 본전 이상의 것을 뽑으려 백성들을 옥죄었고 그 방편으로 국가의 조세제도가 악용되었다. 이에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으며 국가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와 세수(稅收)가 국고로 입고되지 못한 문제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조선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찌들어진 백성의 삶은 결국 민란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진주민란, 동학동민난과 같은 대규모 민란이 이어졌는데, 오랫동안 지속된 동학동민난은 외세의 간섭까지 불러오며 망국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반면 이때 서양제국들은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소비처를 찾아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었으니 곧 제국주의가 발흥했는데, 이 국제적 추세에 막차로 편승한 일본은 가장 가까운 조선을 타깃으로 삼았다. 오랫동안 부패한 권력으로 인해 약해질대로 약해진 조선은 식민지 먹이감으로서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었으니 결국 망국에 이르고 말았다. 

 

 

철종 13년의 진주민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군도'

 

그렇다고 조선에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니 헌종 때부터 조선의 바다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양선이 여러번 신호를 보내왔다. 그것은 침략을 알리는 위험 신호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부국강병을 재촉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 밥그릇을 지키고 늘이기 여념 없었던 부패하고 무능한 안동김문은 그 신호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혹 알더라도 애써 모른 척했다. 당장 등 따습고 배부른 그들이 변화를 추구할 리 만무했던  것인데, 그러는 동안 조선은 점점 곪아가 결국은 회생 불능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양선 / 1832년 충청도 해안에 나타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 호를 필두로 조선 앞바다에는 수많은 이양선이 출현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입식(入植)시킨 사고 그대로 조선이 당쟁으로 멸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서 양반으로, 남인 북인으로, 노론 소론으로 서로 헐뜯고 싸우다 나라가 멸망했다는 것이 그들이 우리 민족에게 가르친 패배의식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래서 망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오히려 그때는 흥했다. 탐학과 부정에 접근했다가는 어김없이 상대방의 공격이 들어왔던 바, 감히 딴짓을 할 수 없었다. 잘 알고 있는 그대로 그때의 정치판은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곳이었으니 지면 죽음이요, 최소한 귀양이었다. 그래서 갔다오면 다행이지만 귀양지에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때에 비하자면 치열한 듯 보이는 지금의 정치판은 그저 애들 싸움이다)

 

견제 세력이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로써 태고 이래의 모든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정권이 바뀌기를 원한다. 과거 어떤 여당 대표가 20년 집권을 외쳤을 때 나는 정말로 끔찍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명한 국민들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정말로 우리 국민들은 현명했으니 10년만 정권을 허락하고 그 이상은 불허해 왔는데, 그나마 마땅치 않게 여겨지면 5년으로 마침표를 찍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정말로 마음이 들며 앞으로도 내내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유는 단 하나,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기 때문이다. 만일 정권을 늘이고 싶다면 진정으로 사심없이, 죽어라 부패와 싸워야 한다. 

 

 

백련봉에서 본 백악산
유일하게 남은 옥호정의 흔적

* 옥호정은 전설상의 옥항아리 속 별천지에 지은 집이라는 의미로서, 옥호산방(玉壺山房)이라고도 불렸다. 위 그림 속에서 옥호산방 편액이 있는 사랑채 건물 외에, 후원(後園)의 죽정(竹亭)과 산반루(山半樓), 별원(別園)의 첩운정(疊雲亭), 그리고 옥호동천(玉壺洞天), 을해벽(乙亥壁) 등 암벽 각자와 주요 석물에 대해서도 명칭을 부여하고 상세히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것들 중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옥호정 대문 터 초석만이 유일하다. (어떤 분이 올린 2019년도 사진에서는 대문 좌우의 초석이 쌍으로 있었지만 그나마 그 중 좌측의 것은 없어지고, 위의 돌 하나만이 유일하게 남아 과거 이곳에 대저택 옥호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설치된 한국금융연수원

* 우연찮게도 옥호정 터 길 건너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들어선 한국금융연수원이 있다. 차기 정부가 할 일에 대해서는 본문의 말미에서 간절히 언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