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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영사관이 들어설 뻔했던 인천자유공원 아래의 명당 자리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8. 23:58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말했거니와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에 있어서 깜깜이 조선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청나라와 미국이 함께 작성한 수교조약문에 사인을 한 것밖에 없다. 말하자면 한미수교조약문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과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버트 슈펠트가 인천이 아니라 톈진(天津)에서 이미 작성을 한 것이었고, 슈펠트가 인천으로 건너와 조선의 대표(신헌·김홍집·서상우)를 불러내 조약문에 사인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왜 조선과 미국의 수교조약문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이홍장과 슈펠트가 톈진에서 작성했을까? 우리는 그동안 그 당시 청나라가 조선이 속방임을 주장했기에 대국의 자격으로 회담에 나섰다고만 알고 있었다. 배우기를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半)만 가르친 것이고, 그래서 반만 알게 된 셈이니, 실은 중국이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를 강력히 희망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1880년 7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슈펠트를 톈진으로 불러들여 협상을 갖고,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 '한미수교 장소에서 중국을 생각하다')
     
    당시 청나라는 자신의 속방으로 조공을 바치던 오키니와와 베트남을 각각 일본과 프랑스에게 빼앗겼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조선 하나밖에 없게 되었으나 러시아의 지속적인 남진에 마지막 남은 조공국마저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미 영·프·독·러시아 등에 털릴 대로 털려 만신창이가 된 청나라였으나, 그럴수록 조선에 대한 집착이 커졌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항할 힘은 없어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영국이 아이디어를 내 도움을 주었다. 신흥강대국이지만 영토 욕심이 없는 미국을 끌어들여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게 하라는 것이었다.   
     
    영국의 속내인즉 자신은 뒤로 물러난 척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하지만 반사이익은 누리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영국은 또 미국의 등을 떠밀었던 바, 청·미 양국이 톈진의 회담장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즉 한·미수교는 영국이 짜놓은 'POWER OF BLANCE'라는 판에 청나라가 부화뇌동해 이루어진 뜻밖의 선물로서, 먼 극동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영국이 청나라와 미국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만들려는 계책의 산물이었다. 이렇게 조선과 미국이 수교를 하자 이듬해인 1883년에 영국이 자연스럽게 수교하였고 그 뒤를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이 잇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교국들

     
    하지만 등 떠밀며 나온 탓인지 미국이 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내내 떫떠름했다. 그래서 이후의 외교적 액션은 별로 없었던 바, 우리가 서구 열강과 처음 맺은 역사적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장소마저 어디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1992년에는 엉뚱한 곳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가 (인천 동구 화도진공원과 중구 올림포스호텔 등 2곳에 각각 설치) 2013년 김성수 관세청 서울본부세관 감사담당관에 의해 '대조선 인천제물포 각국조계지도'가 발견됨으로써 그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어 중구 북성동 자유공원 입구에 '조미수교통상조약체결지' 표석이 세워지게 되었다.
     
     

    중구 북성동 3가 8-3 '조미수교통상조약체결지' 표석
    '대조선 인천제물포 각국조계지도' 속 지점(ㅁ)

     
    체결장소로 지목된 곳은  '대조선 인천제물포 각국조계지도' 속의  해관(세관) 관리관 사택으로, 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근거 1 :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술한 '슈펠트의 회고'라는 글
     
    미국전권대사로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4년 뒤인 1886년 요코하마에 주둔하고 있을 때 고종의 청을 받아 조선을 국빈방문했고,(1886년에서 1887년 사이 몇 개월간) 이때 동행한 쿠퍼(C. H. Cooper)라는 사람이 슈펠트와 함께 아펜젤러를 만나 조선 대표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장소가 해관 관리관 사택 부근이었다는 사실을 술회했다.
     
    슈펠트는 1882년 톈진에서 인천으로 올 때 자신의 아시아 함대는 톈진항에 정박시키고 스와타라(Swatara)라는 군함을 타고 오는데, 이 배의 함장이 바로 쿠퍼로서 그는 조약 체결 현장에도 입회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바, 아펜젤러 목사에게 조약 체결 장소가 세관장 관사라고 증언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 When the first treaty with a western nation was negotiated by Admiral Shufeldt on May 22nd 1882, a tent was erected for him on the hill-side at Chemulpo back of what is now the Commissioner's residence and... (1882년 5월22일, 서양국가와의 첫 조약이 슈펠트 제독과 교섭되었을 때, 제물포 현재 인천해관관사 뒤 언덕 위에 텐트가 세워졌다....)
     
     

    스와타라(Swatara)호와 동급의 포이틴(Powhatan)호

     
    근거 2 : 주한미국영사 대리 알렌의 글
     
    호러스 알렌에 대해서도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말했거니와  그는 구한말 조선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선교사였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지목했다.  
     
    "미국과 조선 사이의 조약이 제물포의 임시로 설치한 한 텐트 안에서 서명되었다. (정확한 지점은 현재 해관세무사 관사가 들어선 지역이라고 하는데 그곳은 원래 미국정부의 영사관터로 할당된 곳이었고 영사관 용도로 미국인 쿠퍼가 현재의 건물을 지었으며 나중에 미국정부가 권리를 넘겼다)"
     
    The trea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Korea was signed at Chemulpo in a temporary pavilion. (The exact spot is said to be now occupied by the residence of the Commissioner of Customs, which ground was originally allotted the U. S. government of a Consular site and the present house was erected by an American C. H. Cooper, for a Consulate, but was afterwards surrendered by the U. S. Government)
     
    알렌은 자신의 일기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를 밝혔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장소가 미국영사관 부지로 제공되었으며 그곳에 쿠퍼가 미국영사관 용도의 집을 지었음도 말하고 있다. 쿠퍼가 지었던 집은 1889년 조선정부의 총세무사였던 메릴이라는 사람이 정부를 대신해서 매입하였고 이후 해관(세관) 관사로 사용되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지금 그곳은 '리움 하우스'라고 하는 야외결혼식 등이 행해지는 양식점으로, 내 기억 속에는 전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기록물을 찾아보니 이 장소는 과거 인천 유일의 방송국이었던 HLKX이 개국한 곳으로(1958년 12월23일 개국/1967년 극동방송으로 변경) 1970년대 서울로 옮겨간 이후 여러 상업 시설이 거쳐갔다. 덧붙이자면 그곳에서 내려다본 연안부두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절경인 바, 우리나라는 그때도 미국에게 최대한 베풀려고 애썼던 것 같다. 
     
     

    '리움 하우스'에서 보이는 월미도
    '리움 하우스'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청일조계지 계단 / 과거에는 바다가 훨씬 가까웠을 테지만....
    내려가는 길에 옛 세관장 라포르트의 주택(현 인천제일교회) 마당에서 인천항을 찍어봤다.
    리움 하우스 위쪽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오르는 길
    이 자리에는 영국인 존 스턴의 여름 별장이 세워지며 인천의 랜드마크가 되었으나 인천상륙작전 때의 포격으로 파괴된 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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