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대보단 / 1907년까지 명나라 황제를 모신 정신 나간 조선왕조
창덕궁의 후원이 개방된 지 오래지만 관람은 제한적이다. 개방 장소도 그때그때 다른 지 올봄에는 옥류천 일대까지 볼 수 있었으나 지난 8월에 갔을 때는 옥류천 일대는 갈 수가 없어 취한정·소요정·어정·청의정·태극정 등은 보지 못하고 와야 했다. 사실 그곳이 후원의 백미인데 말이다. 하지만 전에 보지 못했던 연경당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민가 형식으로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궐도와는 모양이 너무 다르다. (따라서 맞지 않는 소리 같다)
그런데 창덕궁 후원의 개방 이래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지역이 있다. 대보단(大報壇) 지역이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준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은덕을 기려 세운 제단으로 1705년(숙종 30) 12월 숙종이 뜬금없이 만들었다. <숙종실록>에 묘사된 모양새는 다음과 같다.
단(壇)은 창덕궁 금원(禁苑)의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날 별대영(別隊營)의 터에 세웠다. 단의 제도는 좌의정 이여(李畬)의 말에 따라 우리나라 사직의 제도를 모방하여 유(壝, 제단 둘레에 낮게 쌓은 담)가 있고 장(墻)이 있는데, 담장 높이는 4척으로서 사직단에 비하여 1척이 높고 사방 넓이가 25척이며 네 면에 모두 9급의 층계가 있었다. 유(壝)와 장(墻)의 네 면은 모두 37척이요, 단소(壇所)로부터 외장(外牆)을 쌓아 행인(行人)이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숙종은 신종의 제사를 빠짐없이 모셨는데,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자결로 생을 마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와 건국 초 조선을 무던히도 괴롭힌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를 제례 대상에 추가했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 정조는 명나라 3명의 황제의 신하들까지 추가해 배향하게 하였으니, 신종의 신하로는 이여송, 의종의 신하로는 범경문, 홍무제의 신하로는 서달이 채택됐다.
영조는 제례 때 신하들도 전원 참석하게 했고, 정조는 더 나아나 무인 및 성균관 유생들에게까지 제사 참석을 의무화했다. 불참한 관료들은 처벌받았고 성균관 유생들은 한시적으로 과거 응시자격이 제한됐다. 명나라는 이미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지 한참되었음에도 조선의 썩은 대가리들은 여전히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이어갔던 것인데, 이 어처구니 제례는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즉위 초인 1871년, 고종은 창덕궁 대보단에 나아가 "혁혁한 황제의 은혜가 수백 년 내려오니 우리 가문 대의(大義)는 해처럼 빛나네"(‘於赫皇恩幾百年 我家大義昭如日)라고 읊었다. 정조가 1792년 대보단 망배례 때 읊은 '우리 가문의 법'(我家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표현이었다. 고종의 대보단 제사는 갑오개혁(1894~1895) 무렵 일본이 제지하며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아주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1897년 아관파천을 끝내고 돌아온 고종은 황제의 나라를 세울 궁리를 실천에 옮기는데, 이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대한제국이 명나라를 계승한 황제의 나라라는 것을 천명한 일이었다. 즉 고종은 1897년 10월 11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급조된 환구단(혹은 원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의 황제 위에 오르면서도 그 대한제국이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 250년 전에 망한 명나라를 잇는 나라임을 대내외에 알린 것인데, 그러면서 또 대보단에 나아가 명나라 귀신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그간 조선의 왕들은 위에서 말한 사직단에 나아가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 지냈을 뿐, 하늘에 대한 천제(天祭)는 올릴 수 없었다. 고종이 환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냄은 대한제국이 황제국임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명나라에 대한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그전에는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이었으므로 감히 명나라를 이을 수 없었으나 이제 대등한 황제국이 되었으므로 중국의 적통인 명나라를 계승하는 명실상부한 황제국이 되었음을 천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간의 존명의리(尊明義理)보다는 그저 그간 면면히 이어져왔던 소(小)중화주의를 만천하에 피력한 것으로서, 그간 조선이 그만큼 주자 성리학과 소(小)중화주의에 절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고종은 그것이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라 매우 자랑스러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조에 대해 그간의 왕들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명나라 망국 후에 세워진 이 땅 대부분의 사대부 묘표는 '유명조선(有明朝鮮)'의 문구로서 시작되었다. '명나라 속국 조선'의 어떠 어떠한 벼슬을 지낸 아무개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고종에 이어 대한제국의 2대 황제가 된 순종은 대보단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일본의 간섭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보단의 제사는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함께 끝이 났고 대보단은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본에 의해 훼철되었다. 다만 그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다래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다. 아열대지방이 원산인 다래나무의 열매 다래는 서양의 키위와 비슷하게 생겼다.
창덕궁 대보단 다래나무는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니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한 나무이다. 높이 19m, 가슴높이의 둘레 1.04㎝이며, 6개 정도의 굵은 줄기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나갔는데, 특별히 의지할 데가 없어 받침대를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아래 사진) 대보단 다래나무는 국내에 있는 것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써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크다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고종이 대명국(大明國)의 계승을 선언한 환구단도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집어삼킨 후 성공적 합병과 통치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시정 5년 기념공진회'의 경복궁 개최를 계획했는데, 이에 필요한 숙박시설의 마련을 위해 1913년 3월 15일 환구단을 헐고 호텔 건립에 들어갔다. 이것이 조선철도호텔로 지금은 그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서 있다. 다만, 위폐의 보존 용도로 지었던 황궁우와 황제즉위 기념물인 석고(石鼓)는 살아 남았다.
석고는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환구단에 설치한 돌 북으로, 매우 빼어난 조각품이다. 석고는 제천의식(祭天儀式) 의식을 포괄하는 상징물로써, 몸체에는 화려한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들리는 말로는 광화문 옆 해치를 조각한 석공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석고를 보호하기 위해 지었던 석고각은 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장충동 박문각으로 옮겨졌다가 해방을 맞았다.
석고각은 조선의 마지막 대목장이라 불렸던 목수 심선석(沈宣碩)의 솜씨이다. 이 석고각은 일제강점기 <대한매일신보>가 국보적인 조선의 대표 건물축이라 칭송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특히 곡선 두공(枓栱, 공포)의 미려함으로 유명했던 이 건물은 적어도 1960년 2월까지 존재했으나, 이후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