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조선통신사가 역수입한 일본의 문물

기백김 2025. 5. 19. 18:47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에 즈음한 조선시대의 대(對) 일본 통신사(通信使), 이른바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 유산을 주제로 한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회가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이라는 이름으로 열리고 있다. 장소는 서울역사박물관이고, 기간은 4월 25일부터 6월 29일까지이며, 전시 유물은 128점이다. 전시 규모는 총 1천156㎡로,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이래 최대라고 한다. 

 

지난 일요일 그 전시회를 다녀왔는데 과연 볼 만했다. 전시 유물은 128점 중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24건, 일본 지정문화재 8건, 한국 지정문화유산 4건 등 보물급 유물 32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오사카 미구쿠루미타마(水泳御魂) 신사 봉헌된 통신사 그림 '선단 에마(船團 繪馬)', 국서 전달식에서 조선 사절의 위엄과 품격을 담아낸 '신미통신사정장복식도권(辛未通信使正裝服飾圖卷)', 역관이자 천재 시인으로 불렸던 이언진이 항해 중에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시를 모은 '송목관시독(松穆館詩牘)' 등이 대표 유물로 꼽혔다.

 

 

전시장 입구
최초로 공개된 오사카 미구쿠루미타마 신사의 조선통신사 그림 '선단 에마'(1695년 작)
'신미통신사정장복식도권' / 앞부분으로 전체는 상당히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송목관시독(松穆館詩牘)'

 

그 밖에도 수도 에도(江戶)에서 통신사 일행이 화려한 환대를 받는 장면을 금병풍으로 담은 '통신사 환대도 병풍(通信使歡待圖屛風)', 473명의 통신사가 에도 성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그린 '조선통신사 등성행렬도권(朝鮮通信使登城行列圖卷)', 미츠다이라 오키노가미 가문에서 제공한 가와고자부네(川御座船)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역대 통신사들과 관계된 문서, 일본 관계자들의 시문 등 다채로운 자료가 전시 중이다.    

 

 

'통신사 환대도 병풍'
'조선통신사 등성행렬도권' / 부분
'조선통신사 천어좌선도'
위 그림의 해설서
'조선통신사 상상관 공도선도'
위 그림의 해설서
'조선통신사 어루선도 병풍' / 통신사 종사관선과 수행선을 그린 금병풍화(金屛風畵)로, 배의 곳곳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인 아오이문이 확인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통신사 조엄이 출국에 앞서 나라에 대한 충성을 읊은 시
대조선 외교를 담당했던 아메노모리 호슈의 시

 

이쯤에서' 조선통신사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여기서 '통신'(通信)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우편, 전신, 전화 따위로 정보나 의사를 주고받음'을 말한다. SKT, LG, Kt, 삼성과 같은 통신사에서 취급하는 것이 곧 통신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자를 풀면 '신의를 나눈다'는 말이 된다. 즉 요즘은 텔레폰 등으로 신의를 나누지만 과거에는 그런 것이 없었던 바, 통신사를 보내 신의를 나누고 더불어 문화교류의 역할도 한 것이었다. 통신사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보다 정확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통신사는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이다.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 한다. 명·조선·일본 간의 사대교린 관계에서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으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했다. 사절의 명칭은 조선측은 통신사, 일본측은 일본국왕사라 했다. 태종 때부터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화되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조·일 양국 간 우호교린의 상징이었지만 임진왜란 등 정세에 따라 변동을 겪었다. 외교만이 아니라 학술·사상·기술·예술 등 문화교류의 통로이기도 했다.  

 

 

전시장 입구에도 '신의'를 강조하는 글을 써 놓았다.
통신사의 1만리 대장정
'조선통신사 내조도' / 에도성에서 국서 전달을 마친 통신사가 숙소인 히가시혼간지로 이동하는 광경과, 이를 구경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18세기 화가 하네가와 도데이가 투시원근법을 활용해 그렸다.

 

그런데 이상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이고 일본의 시각은 좀 다르다. 일본 정부는 조선통신사의 파견을 자신들의 정통성과 권위를 강화하는 외교적 도구로 활용했고, 백성들에게는 조선에서 보내온 조공사절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조선의 사신이 일본의 에도까지 와 쇼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조선이나 일본 사신이 중국의 북경에 가 황제를 알현하는 행위와 거의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먹힐 수 있었던 합리적인 이유가 일본은 조선에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향한 구애(求愛) 사절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후의 에도막부는 자신들의 정통성 확보와 대외적 과시를 위해 사신을 보내 조선통신사의 재개를 절절히 요구했다. 조선에서는 고민 끝에 무려 500명이라는 대규모 통신사를 파견했고 일본은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에도막부가 조선통신사를 불러들인 또 다른 이유에는 통신사들의 접대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으로써 지방정부의 재정을 피폐하게 만들어 힘을 상실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지방의 다이묘들은 통신사들이 자신의 번국에 머무는 동안 거의 1년 예산에 맞먹는 비용을 지출해야 했지만 중앙정부에 밉보일까 홀대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막부의 작전에 말려든 셈이었다.   

 

초기 통신사들의 자부심은 컸다.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거니와 사람들이 몰려들어 조선의 앞선 주자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려 애썼고 통신사들의 글자 한 자를 얻으려 애썼다. 적어도 임진왜란 후 얼마 간까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갈수록 발전하는 일본의 선진문물에 놀라고 있었고 에도라는 도시의 규모와 번성함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도는 이미 18세기 이전에 북경과 파리를 능가하는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18세기 에도의 은성함을 그린 전통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繪)

 

일본 막부는 조선과 같은 쇄국정책을 취했지만 나가사키 항 데지마(出島)를 개방해 일본에 무역을 하러 온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서양의 선진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서양학문을 난학(蘭學)이라 불렀는데 네덜란드를 뜻하는 화란(和蘭)의 학문이라는 의미로서, 화란어로 대화하며 네덜란드인들을 상대하는 '오란다 통사'(阿蘭陀 通詞)라는 관리 집단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도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있는 바타비아(자카르타)를 떠나 나가사키로 가다 풍랑으로 표류한 네덜란드 선원 64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일본 화가 그린 나가사키 데지마 (화살표)

 

일본이 난학을 받아들이며 조선의 학문적 우위는 희석됐다. 왜란 이후 우러러보던 조선의 주자학은 이미 고리타분한 학문이 되어버렸다. 통신사에 대한 대우도 점차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필요성마저 느끼지 않게 되었던 바, 1811년(순조 11) 334명의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김이교를 정사(正使)로 한 마지막 통신사 일행은 일본 본토에도 상륙하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의례적인 '역지통신(易地通信)'을 거행한 후 돌아왔다. 

 

 

마지막 통신사 김이교의 초상
전시 중인 통신사 인장

 

우리는 통신사들이 일본과의 선린 교류 차원으로 조선의 선진문물을 전수해 주었다고 알고 있다. 배우기를 그렇게 배웠기에....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역전돼 조선이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여러 가지가 일본에서 건너왔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화폐도 있었다. 일본은 17세기 중반 상업과 교통의 발전으로 이미 화폐경제가 발달해 있었다. 

 

통신사들의 그것의 편리성을 깨닫고 돌아와 똑같은 법정화폐를 만들었던 바, 1633년(인조 11)에 발행한 상평통보가 그것이다. 우리는 상평통보의 '상평'이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준말로 유통 가치에 항상 등가를 유지하려는(가치를 유지해 물가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와 노력이 담긴 의미라고 설명하지만, 사실은 일본의 '관영통보( 寛永通寶, 간에이쓰호)를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관영(寛永)은 화폐 발행 당시인 1626년 일본에서 사용하던 연호 '간에이'인데, 우리는 연호가 없었으므로 '상평'이라는 말을 만들어 썼다.  

 

 

상평통보
관영통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