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방(명동) 인물사(史) I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명동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명례방(明禮坊)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조선시대 명례방은 절대 비싼 땅이 아니었고 오히려 값이 헐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첫 거처가 되었다. 명례방 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은 진고개로 현재 명동성당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진고개에 사람이 몰렸던 것은 남산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남산동천 (南山洞川)이 있어 물을 구하기 용이했던 까닭이리라.
반면 남산동천은 비가 오면 자주 범람하였던 바, 길을 질퍽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진고개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바로 그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지가(地價)를 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그 진 땅에서 짚신으로 생활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터이다. 그래서 조금 형편이 나은 자들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그들의 딸깍 딸깍거리는 나막신 소리는 '남산골 딸깍발이'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남산골 딸깍발이'는 통칭 '자존심만 강한 가난한 선비'를 이르는 말로, 예전 교과서에 일석 이희승이 쓴 <딸깍발이>라는 수필이 실리기도 했다. 또 '남산골 샌님(생원님)'이라 하여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생원 정도에 머문 낮은 선비들을 싸잡아 이르는 비칭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진고개의 지가 앙등에 지금은 모두 사라진 말이 됐다. 그 진고개의 지가 상승을 견인한 자들은 임오군란 이후 낙동(명례방의 서쪽 동네)에 자리 잡은 화상(華商, 중국상인)이 우선이요, 다음은 왜성대(명례방 위쪽 남산 바로 아래 동네)에 모여 산 왜인들이었다.


그렇다고 명례방에 가난한 선비들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으니, 대표적으로 낙동에 살았던 좌포도대장 이경하를 들 수 있다. 이인직의 신소설 <귀(鬼)의 성(聲)>에는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가혹한 천주교도 탄압으로 인해 낙동염마(駱洞閻魔, 낙동 염라대왕) 혹은 낙동장신(駱洞將臣)으로 불렸던 그가 무려 12만 명의 기독교인을 처형했다고 서술된다. 허나 천주교 최대 박해라는 병인박해(1866년부터 1871년까지 지속됨) 때 죽은 사람을 다 합쳐도 8천 여명이니, 12만 명이라는 숫자는 너무 터무니없다.
다만 철퇴를 휘둘렀던 것만은 사실이니 이를 바탕으로 한성부판윤(서울시 부시장) · 형조판서(법무부 장관) · 어영대장(대통령 경호처장) · 공조판서(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오르며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1882년 임오군란 때 진주한 청군(淸軍)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였으니, 원세개의 부하 진수상(陳樹裳)에게 뺨을 맞고 청군에 집단폭행을 당한 후 낙동 집을 빼앗겼다. 진수상은 이경하의 집에 조선상무국을 세워 조선의 무역과 상행위에 간섭하며 화상(華商)들에게 무한 특혜를 제공했다.
갑신정변 후 조선에 장기주둔하게 된 원세개는 좁다는 이유로써 그것을 헐고 새로 큰 건물을 지어 자신의 처소를 마련하고 군대도 주둔시켰다. 이것이 현 명동 중국대사관의 출발이다. 원세개의 처소는 광복 후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아래 <동아일보>의 기사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위용을 자랑한 그 건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본정(本町) 1정목 15번지. 남촌의 심장지대인 진고개의 어귀에 있는 경성우편국의 옆골목을 약 백 미터쯤 들어가면 한 채의 광활한 저택이 있다. 그 안에는 하늘 높이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달려, 찬바람에 휘날리고 있으니 그곳이 곧 한말 풍운의 진원지이던 중국 총영사관이다."(동아일보 1936년 1월 3일자)


소설 속 인물이기는 하나 박지원 한문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도 명례방에 살던 서생이었다. 허생은 남산 아래 묵적골 오두막집에 살았는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과거도 보지 않으면서도 허구한 날 초가삼간에서 책만 읽었다. 그의 집은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삯바느질을 하여 살림을 꾸린 덕에 겨우겨우 밥은 먹었는데, 하루는 참다못한 아내가 내질렀다. 과거도 보지 않는 사람이 책은 읽어 무엇하느냐, 장사 밑천이 없거든 나가 도둑질이라도 해와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허생은 책을 덮고 장사길에 뛰어든다. 한양 최고 갑부 변씨에게서 만 냥을 빌린 허생은 이후 안성에서 과일장사, 제주도에서 갓 재료인 말총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써 서해안 무인도를 하나 얻는다. 이후 전라도 변산의 도둑들을 설득하여 무인도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는데, 여기서 수확한 농산물을 흉년이 든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팔아 백만 냥을 벌어들인다. 그는 이 돈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머지 돈 십만 냥을 변씨에게 변제한다.
만 냥을 빌렸는데 십만 냥을 변제했던 바, 그는 보다 큰 야심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박지원이 실학 중상주의(重商主義) 사상에 입각해 쓴 이 소설은 당연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허생은 빈민구호를 넘어, 당파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의 고른 등용, 훈척(勳戚)들의 추방, 국비 유학생 파견과 무역을 통한 국가 발전 등의 시사삼난(時事三難) 극복 방안을 모색한다. (이루었다는 말은 없다)
명동에서 허생의 후예가 될만한 상인들을 찾아보았다. 대한민국의 가장 비싼 땅 명동에서 명멸해 간, 혹은 지금도 성세를 누르는 사업가들은 많으나 불행히도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대신 돈을 많이 번 사업가는 다수 생각나는데, 때가 때인지라 대연각(大然閣)호텔 소유주였던 이강학이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대연각호텔은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화재가 발생하며 총 사망자 166명(추락사 38명), 부상자 68명, 실종 25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피해를 낳았다. 대연각호텔 화재는 세계 최대 재난 사고의 하나로도 꼽히며 호텔 화재 중에서는 단연 최대 사고다.

대연각호텔은 연면적 3만4562㎡(1만455평), 대지면적 1805.7㎡(546.2평), 지상 21층 지하 2층의 초고층 빌딩으로 대한민국이 내세울만한 호텔 중의 하나였다. 객실은 222개 규모였는데 호텔로만 이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쪽 부분은 오피스로 임대해 30여 개의 회사가 사용하고 있었다. 화재는 1층 커피숍 주방에서 LPG가스가 폭발하면서 발생했고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태웠다.
소유주 이강학은 3·15 부정선거 당시 경찰총수를 지내다가 4·19혁명 이후 부정선거 혐의로 사형선고을 받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고 복역 중 가석방되었는데, 이후 대연각빌딩의 주인으로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가 어떤 돈으로 이 빌딩을 구입했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대연각호텔은 대연각관광(1976), 대연각물산(1978) 고려통상(1982)을 거쳐 현재는 '고려 대연각타워'라는 오피스 빌딩으로 존속 중이며, 현재의 소유주는 이강학의 아들인 이창재 동광제약 회장이다.

두서없이 말하자면, 일제장점기 혼마치(本町)로 불리던 명동 일대를 호령한 주먹은 하야시(林)라는 깡패로서 드라마 <야인시대>, 영화 <장군의 아들> 등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그는 일본 이름을 쓰는 한국인이었으며(가네자와 등 해방 후까지도 일본이름을 쓰는 주먹들이 많았다) 한국 이름은 선우영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해방 전후 사업가로 변신하여 큰돈을 벌었고 이후 주먹세계와 결별했다.


하야시 다음 혼마치를 접수한 사람은 이화룡이었다. 본래 평양 건달이던 이화룡은 해방 후 김일성과 소련군의 성화에 한국전쟁 전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친누나가 다방을 하던 명동에 자리를 잡고 하야시 잔재들이 행세하던 나와바리를 하나 둘 빼앗으며 신흥 주먹으로 떠올랐는데, 부하 정팔을 비롯한 대부분이 이북 출신이었다.
훗날 주먹세계의 일획을 긋게 되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도 실은 평안도(신의주) 출신 시라소니가 명동 패거리를 은근히 편들면서 비롯됐다. 이에 그간 팽팽하던 명동파와 동대문파의 힘의 균형이 명동 쪽으로 기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동대문 두목 이정재가 이른바 '주먹황제에 대한 역성혁명'을 일으킨 것이었다. (☞ '시라소니 린치사건의 진실 III - 동대문사단 이정재')

명례방 인물사를 이야기하자면 1949년 명동 한복판 명동국립극장 앞에서 벌어진 두 협객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유명한 시라소니 린치 사건이 일어난 1953년 8월에 약 4년 앞서 벌어진 일이다. 싸움을 벌인 사람은 이성순과 김동회다. 장소인 명동국립극장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메이지좌(明治座)로 개관한 극장으로 명칭은 일본국왕의 이름에서 따왔다. 명동국립극장은 남산국립극장이 생긴 후 한때 은행건물로도 쓰이다가 2009년 12월 명동예술회관으로 재개관했다.

이성순의 별명은 시라소니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주먹계의 전설이다. 일제강점기 중국과 만주를 평정한 이 전설의 주먹은 해방과 더불어 고향에 돌아왔고 6.25전쟁 전 월남한다. 그리고 1949년에 맨발대장 이영순을 꺾으며 천하무적 싸움꾼의 서울 입성을 알렸다. 시라소니의 등장은 당시 김두한이 지배하던 주먹세계에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이영순은 자신과 싸웠던 상대가 발차기를 맞고 뇌진탕을 당하자 이후로는 신발을 벗고 싸워 '맨발의 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자였다. 발 사이즈 37cm에 2m가 넘는 거구로, 유지광이 지은 <대명(大命)>에서 명동파의 중간보스쯤으로 소개돼 이후의 드라마 등에서도 모두 그 정도 레벨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나와바리를 거느렸던 보스급으로, 과거의 구마적에 비교되던 실력파 싸움꾼이었다. 그럼에도 시라소니에게는 상대가 안 되었던 것이다.
김동회는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과 막상막하의 겨루기를 보여줌으로써 세인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는 실제로도 최고 싸움꾼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시라소니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그가 술을 먹던 명동 술집을 찾아가 시비를 걸어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김동회가 시라소니를 찾아간 것은 시라소니의 명성에 당대의 주먹들이 모두 추위를 타고 꼬리를 내리는 데 대한 반동이었다고 했다.

이때 김동회 역시 깨졌다는 설이 일반적이나 결판을 내지 못해 무승부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찌 됐든 시라소니를 꺾지 못한 것은 확실한데, 그다음에 시라소니가 직접 김두한을 찾아가 건 싸움의 결말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 (☞ '시라소니 린치사건의 진실 II - 이성순과 김두한')
시라소니 린치 사건 이후 삼일로 영락교회에 다니며 주먹세계에서 벗어난 이성순과 달리 이정재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먹들은 계속 깡패짓을 하다 5.16군사혁명으로 단죄되었다. 아울러 주먹세계 역시 군부의 힘에 와해되었는데, 이후 신상사파의 신상현이 과거 이화룡의 나와바리를 차례로 접수하며 '명동의 황제'로 등극했다. 신상현은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육군 특무부대 상사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부상을 입고 퇴역한 후 주먹세계에 입문해 사실상 무주공산이던 명동과 서울을 접수했다.

이후 이렇다 할 대항마 없이 밤의 황제로 군림하던 신상사의 시대는 그 유명한 1975년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당시 건설공사와 주류공급업에 관여해 이권을 챙기던 신상사파는 호남 출신으로 새로운 나와바리를 구축해 가던 무교동파와 주류공급권 및 상납금 문제로 충돌했다. 신상사파는 이 신흥조직을 응당 손보았고, 이에 복수를 노리는 무교동파가 행동대장 조양은을 앞세워 신상현과 수뇌부가 있던 사보이호텔 커피숍에 야구방망이와 회칼을 들고 난입했던 것이다.



이때 신상현은 자리에 없었지만 부두목급인 신상현의 매제 김수일은 큰 부상을 입고 입원을 해야 했다. 이어 남산 도큐호텔(현 단암빌딩)에서도 호남 출신 폭력배들이 신상사파를 습격해 부두목 구달웅을 가해하며 세를 과시했다. 신상사파도 반격을 가했으니, 김태촌을 시켜 습격에 동참한 목포파의 오종철을 담가버렸는데, 이 일련의 사건으로 신상사의 시대는 저물고 조양은과 김태촌이라는 새로운 주먹이 등장하게 된다.
아울러 신상사파가 조양은을 잡기 위해 불러 올린 이동재의 광주 OB파가 서울에 눌러 앉으며 이른바 '호남 출신 3대 패밀리'가 형성되었지만, 이동재가 조양은의 부하들에게 당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며 OB동재파는 와해되었다.



이후 신군부가 들어서며 옛 5.16혁명정부를 흉내 낸 깡패 퇴치 정책에 신상사는 삼청교육대로, 김태촌과 조양은은 범죄단체 조직 등의 죄로 중형을 받고 감옥으로 가게 된다. 호사가들은, 연장질이 난무했던 1953년의 시라소니 린치 사건으로 이른바 낭만주먹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평하는데, 회칼이 실전 사용되었던 사보이호텔 습격사건 역시 협객의 시대가 저물고 조폭의 시대가 도래된 우울한 시대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신상사 신상현은 올해 8월, 92세로 세상을 떴는데,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에는 60여 명의 조폭들이 도열해 예를 갖추었고 분향실 안에는 서울시장 오세훈, 국회의원 김선교 명의의 조기(弔旗)가 놓였다고 한다. 또 '선교사' 조양은, 가수 설운도와 태진아 명의의 화환도 놓였다고 하는데, 협객이라 불렸던 마지막 주먹 세대에 대한 근조가 아니었을까 한다.






* II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