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동 보문사와 남로당 박헌영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년(1115)에 담진국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는 확실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적기(寺跡記)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이어지는 기록도 없어 고려시대 창건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노릇이다. 사적기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퇴경(退耕) 권상로(1879~1965)가 저술한 <퇴경전서/보문사일신건축기>로서 이 절이 예로부터 비구니 사찰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다 2017년 대웅전 중수 공사 중 1747년(영조 23) 최초 중건되었다는 상량문이 나와 사찰의 연혁이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는데, 1972년에는 조계종이나 태고종 등에 속하지 않은 대한불교 보문종이라는 독립된 종단을 설립함으로써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독보적 길을 걸은 사람이 긍탄(亘坦)과 송은영(宋恩榮)으로, 이때 대규모 중창불사가 있었다. 이 절의 자랑인 경주 석굴암을 본뜬 석굴암이 축조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1970년부터 약 2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이 석굴은 연인원 25,000명의 노동자와 석공 4,500명, 화강암 2,400톤의 석재, 25톤의 철재, 시멘트 1만 포가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그 수고에 비해 결과물은 많이 아쉽다. 기왕에 모방을 할 양이면 원형에 가깝게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모양새다. 반면, 다른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석굴암을 재현하려 했다는 그 용기 자체로서도 깊은 불심을 느끼게 하는 조형물이다.
아무튼 보문사는 조선시대에도 비구니 사찰이고, 창경궁 등의 동궐과 가까웠다. 따라서 왕비와 후궁들의 기도처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은데, 현대사에 있어 문제적 인물이 이 절의 비구니가 된 적이 있었다. 빨갱이 박헌영의 누이 조봉희라는 여자였다. 박헌영과 조봉희는 남매임이 분명하나 보다시피 성이 다르다. 씨가 다르기 때문이니 그에 대한 사연을 잠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에서 미곡상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예산에서 국밥집을 하는 과부 이학규로, 사별한 남편 사이에서 난 조봉희라는 딸을 키우고 있었다. (남편은 예산의 금광 개발업자였는데 결핵으로 일찍 사망했다) 박현주와 이학규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당시는 박현주의 본처가 시퍼렇게 살아 있어 어쩌지 못하다가 본부인이 죽자 기다렸다는 듯 살림을 합쳤다. 박헌영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이처럼 집안이 복잡해서인지 이학규의 딸 조봉희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중이 되겠다며 집을 나갔다. 그리하여 서울 보문동에 있는 비구니 사찰 보문사의 행자승이 되었는데, 어느 날 이 절에 시주를 많이 하던 보살 한 분이 자신의 수양딸로 삼겠다며 조봉희를 데려갔다. 그리고 정말로 수양딸이 되었는데, 문제라면 그 보살이 권번(券番, 기생 교습소)을 운영하던 여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봉희는 자연스럽게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박헌영은 예산의 대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와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 일어난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그는 당시 일제의 총칼 앞에 무력하게 진압되는 민중을 보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상해로 갔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서 상해 임시정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니 당시의 신사조(新思潮)인 사회주의에 경도돼 고려공산당청년회 설립에 나섰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때 여성 공산주의자 주세죽과 결혼했다)
박헌영은 공산주의를 국내에 입식시키기 위해 1922년 귀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며 투옥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돼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는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1925년 4월 김약수·김재봉 등과 함께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공산당을 조직했고 이로 인해 1925년 11월 다시 체포돼 투옥되었다. 당시 박헌영은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 얻은 병으로 1927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박헌영은 기회다 싶어 부인 주세죽과 함께 1928년 8월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스톡으로의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한다. 그리고 1929년 2월 망명 혁명가로 인정받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는 국제레닌대학 졸업 후 1932년 다시 상해로 왔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하다 1933년 일본경찰에 검거돼 국내로 압송된 후 6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한 그는 조선공산당의 한 조직인 '경성 콤뮨그룹'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1940년 초에 불어닥친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청주로 피신했고, 다시 전라남도 광주 백운동에 있는 벽돌공장에 김성삼이란 이름의 인부로 위장해 은신하다 8·15해방을 맞는다. 이후 남한 좌익세력의 우두머리로 빨갱이 활동을 한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으니, 1946년 대구폭동, 1948년 여수·순천 군인반란 사건 등을 배후 조종하며 남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다 월북했다.
다른 한편, 박헌영의 씨 다른 누이 조봉희는 서울에서 기생 생활을 하다 전북 익산의 만석꾼갑부 김병순을 만나게 되고 그와의 사이에서 김제술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김제술은 동경제대를 나온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앞길이 무궁무진했으나 역시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박헌영의 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46년 5월 '조선 정판사 사건'(위조지폐를 찍어 남한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던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1946년 박헌영과 함께 남한을 탈출해 입북했다.
그리고 조봉희는 김제술 외에 딸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소산(본명 김정진)이다. 딸은 어머니를 닮아 무척 미인이었다고 하며, 이화여전을 나오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재원이기도 했다. 김소산은 남한 좌익세력의 우두머리인 외삼촌 박헌영에게 자연스럽게 포섭되어 요정 대원각의 에이스 호스티스가 되었다. 이후 대원각에 출입하는 고관들을 상대로 간첩질을 하다 6.25전쟁 발발 후 체포돼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됐다. (인민군 장교복을 입은 김소산에 대한 목격담은 많으나 죽음에 대해서는 불분명해 국군의 9.23 서울수복 직후 탈출하여 월북했다는 말도 있다)
박헌영은 1946년 1차 월북 후에도 수시로 남북을 비밀리에 오가며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이후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그는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이 출범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출되었으며, 김일성과 함께 소련을 설득해 남침전쟁을 일으켰으나 종전 후인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했다.
그의 죄목은 미제(제국주의 미국)의 스파이였다. 물론 박헌영이 그것을 인정할 리 없었으니 끝까지 부인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끝내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김일성이 박헌영의 세력에 추위를 타 선제 타격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남한에서는 좌빨들에게 우상처럼 받들어지던 그였지만 북한에서는 무슨 세력이 있었겠는가? 가장 타당한 설은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의 좌익들이 대거 들고일어나 동조할 것이다"라는 박헌영의 말을 듣고 남침하였지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은 데 대한 분풀이였다는 설이다.
만일 그렇다면 박헌영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사람이다. 해방 후 좌빨들이 남한 사회를 헤집기는 했지만 반공법이 워낙 강력히 작동해 준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바, 어떤 판사는 좌파 재판관들 사이에서도 가장 좌측에 있다고 당당하게 언급하였고 그럼에도 지금은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으로서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탄핵을 주무르고 있는데, 오늘은 과거 인민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사회주의 핵심이론가였던 자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얻었다. 그것이 어디 헌재뿐이겠는가? 정말이지 국민들이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