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 시기의 유일한 불상인 서울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이라는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이 불상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약 100년 뒤인 539년 만들어진 것으로서 배면에 각자(刻字)된 4행 47자의 명문(銘文)이 제작연도 등을 확인시켜준다. 이 불상은 전신 높이 16.2 cm, 불상 높이 9.1 cm, 광배 높이 12.1 cm, 좌대 높이 4.1 cm이며 1963년에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도로공사 중 발견된 후 곧바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실에 전시 중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오래된 불상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조각실에 있는 금동불좌상이다. 서울 뚝섬에서 출토된 4.9 cm 높이의 이 자그마한 금동불은 명문 같은 것이 없어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세기 전반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것이 5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것은, 당시에 제작되었다고 알려진 중국 산둥성 보싱(博興)현 룽화사(龍華寺) 터에서 발굴된 불상과 형태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불상은 약 7 cm이다.


룽화사 불상은 북위 시대의 전기인 오호십육국시대(304∼439)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꼭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의 연원을 밝히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2016년 9월 산둥박물관, 산둥성 빈저우(濱州)시 보싱(博興)현 소재 보싱현 박물관, 산둥성 타이안(泰安)시 타이안 박물관에 있는 금동불의 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 <중국 산둥성 금동불상 조사>를 출간한 적이 있다. 보고서에 담긴 금동불은 모두 25점으로, 불상별로 사진과 간단한 설명, 성분 분석 결과가 수록됐다. 제작 시기는 십육국시대부터 수나라까지이다.
어찌됐든 이는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에 대한 비중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이 불상은 도쿄예술대학교 자료관에 있는 북위의 금동불좌상이나 오사카시립미술관(大阪市立美術館)의 대하승광2년명(大夏勝光二年銘) 금동여래좌상과 비견되기도 한다. 즉 후자의 불상은 429년에 제작된 것이니, 만일 뚝섬 불상이 이 시기의 것으로 간주된다면 위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보다도 무려 100년 이상 앞선 유물이 된다.


위의 불상들은 결가부좌에 두 손을 포갠 선정인(禪定印), 두 어깨를 덮는 통견의(通肩衣)의 법의, 가슴의 U자형 옷주름, 어깨를 구부린 구부정한 자세에 턱을 앞으로 당긴 채 고개를 숙여 명상에 잠긴 모습이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형태가 거의 같다. 나아가 위 불상들의 대좌 양쪽에는 두 마리 사자가 입을 벌리고 정면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뚜렷해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이나 산동 용화사 불상도 쌍사자 좌대 위에 앉은 형상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은 일본 시즈오카현 미시마시(市) 사노미술관(佐野美術館) 소장의 금동여래좌상,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박물관 소장 금동불좌상, 중국 하북성 석가장(石家莊) 출토 금동불좌상 등 중국의 4~5세기 불상들과 많이 닮아 있어 국내 제작이 아닌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불상일 가능성을 높인다. 특히 강우방 선생께서는 이 불상이 틀에 주물을 부어 제작한 불상이라는 평을 내렸던 바, 시기적으로 볼 때 국내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기념비적 유물임에도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인 듯하다)







어찌 됐든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은 한성백제시기의 유일한 불상이다. 덧붙여 말하면 백제의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는 아래의 부여 신리 출토 금동제 선정인상이 꼽히는데, 그 형태로 보아 5세기 후반경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출토장소가 부여이기는 하나 웅진이나 서울 위례성 시기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적으로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유사한 그밖의 유물은 아래와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