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장수 · 새우젓장수가 살았던 마포 염리동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염리동이 소금동네(鹽里)라는 의미임을 알았지만 소금과 관계된 무엇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동네에 과거 염창(鹽倉, 소금창고)이 있어 유래된 말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염전(鹽廛, 소금시장)이 있어 그렇게 불려졌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후자가 좀 더 정확한 말인 듯하다.
소금창고에서 유래된 보다 확실한 지명은 강서구 염창동일 것이다. 조선시대 서해에서 올라온 소금이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이동되는 루트에 만들어진 임시 관영소금창고가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유래된 곳이 염창동이다. 사상(私商)들은 따로 지금의 동막역 부근에 창고를 지어 서해에서 올라온 소금을 저장했는데, 그 소금들이 염리동 염전에서 거래됐다. 근자에 설치된 염전머릿골 표석이 있는 곳일 터이다.
따라서 염리동에는 소금과 관계된 장사꾼들이 많이 살았을 터, 그것이 동네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한성부 3대 시전인 종로 육의전, 이현(梨峴), 남문의 염전도 마포 염해전(鹽海廛)의 소금을 떼다 팔았다고 하는 바, 당대 마포 소금시장의 규모가 더불어 짐작된다. 해방 무렵인 1945년 12월 31일 촬영한 아래 '마포 새우젓 나루터'라는 제하의 사진을 보면 마포 일대의 소금과 어물 거래가 얼마나 활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전상인들은 물론이요 보부상을 비롯한 사상(私商)도 소금의 구입은 당연히 염전머릿골을 거쳤을 것이다. 그들은 마포나루에서 구입한 새우젓과 염리동 염전에서 산 소금을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 내륙인 충주 단양 영월 등지까지 들고 가 팔았는데, 이에 장안사람들은 앞이마 부근이 검게 탄 사람을 마포 소금장수나 마포 새우젓장수, 목덜미 부근이 검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장수라고 불렀다. 마포 소금장수나 새우젓장수는 해를 보며 동쪽으로 이동했고, 왕십리 미나리깡으로부터는 해를 등지고 도성으로 왔기에 생겨난 말이라 한다. 마포 소금장수나 새우젓장수를 낮춰 부르는 '삼개나루 장똘뱅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에 마포는 자연스럽게 물류와 유통의 중심이 되었을 터, 남도의 소금·수산물 배와 연평도의 조깃배가 모두 마포로 들어왔으며, 더불어 마포는 내륙으로 들어가는 배들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단순한 나루터가 아닌 강항(江港)이었던 셈이다. 염전머릿골 표석 부근에 있었다는 수산물 보존을 위한 얼음창고와 '보름물께'라는 우물은 당시의 은성함을 방증한다. '보름물께'라는 명칭은 실려온 소금이 염리동에 머무는 보름동안은 물맛이 짜다가 소금이 모두 팔린 후에는 다시 예전의 물맛으로 돌아온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들은 지금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흔적 중의 하나가 이웃인 용강동에 남아 있다. 서울 마포구 큰우물로2길22에 있는 용강동 정구중 가옥은 마포에 살던 이씨 성의 부자가 무남독녀 외동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압록강 유역의 홍송과 백송을 사용해 지은 고급 한옥이다. 이 집은 서울의 이름난 대목인 장영달이 지었다 하며, 241평의 대지에 안채, 행랑채, 별채를 모두 들인 치밀한 ㅁ자 설계의 아기자기한 구조이다.
대갓집이라 부르기는 어렵되 고급주택임은 분명한 이 집은 당대 마포의 부(富)를 상징한다. 이 집뿐 아니라 당대에는 주변에 이와 같은 고급주택이 많았는데 필시 은성했던 마포나루의 산물일 것이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것이야 당시의 건축법이니 크게 치지는 못하더라도 축대를 쌓아 레벨을 맞추고 다시 단을 올려 별채를 들어서게 만든 형식은 보통의 정성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개발에 밀려 사라질 뻔했으나 래미안 마포 리버웰 측이 이 집과 연계된 한옥공원을 조성해 다행히 남아 있게 되었다. 용강동 정구중 가옥은 전시용이 아닌 거주하고 있는 집이다. 정구중은 1977년 소유주 명으로 문화재등록(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이 될 때의 거주자로 과거 국정교과서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다. 1999년 별세 후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가옥 밑 길가에 동막 큰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근자까지도 사용된 유서 깊은 조선시대 우물로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그야말로 '큰 우물'로서, 해방 후에도 근방 1000여 세대의 식수로 쓰였다. 상수도 보급 후에도 이 우물은 소방용수, 민방위 비상 급수시설로 활용되었으나 대흥구역 재개발이 이루어지던 1999년 11월 20일 매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