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의순공주와 그의 아비 금림군
서울시 중구 소공동(小公洞)은 조선초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궁이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 경정공주가 살던 동네를 작은공주골, 살던 집을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洞名)으로 굳어진 것인데, 지금의 조선호텔과 황궁우 자리라 여겨진다. 경정공주와 남편 조대림이 살던 집은 1583년 선조의 아들 의안군이 거주하면서 200여 칸의 대저택으로 개축되었다.
이 대저택은 임진왜란 때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그의 직할군 숙소가 되었고, 다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명군의 숙소로 쓰였다. 이를 계기로 이후 이곳은 명나라 및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인 남별궁(南別宮)이 되어 조선주재 공사관의 역할을 하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했다. 1895년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가 물러가자 고종은 이곳에 환구단을 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나 한일합방 후 일본은 그것을 헐어내고 철도호텔을 지었고, 그 자리에 다시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따라서 어찌보면 불행한 역사의 장소라 할 수 있는 곳인데, 더듬어보자면 시작부터 그러했다. 1392년 조선의 건국에 조금 앞서 건국된 명나라(1368년)는 아직 세력이 남아 있는 북원(北元, 북쪽으로 쫓겨간 원나라)과 조선과의 연대를 차단하고 내정을 간섭할 방안으로 조선 국왕의 딸과 명나라 황족을 혼인시키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 이방원은 경정공주의 혼인을 서둘렀던 바,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시집보냈다. 이때 혼수로서 숭례문 안에 큰집을 지어준 것이 소공주댁이다.
이후로도 명나라는 조선의 왕족, 혹은 양반가의 딸을 공녀로 바치라는 요구를 해 와 조정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는데, 혹간 넋 빠진 자가 자진해서 자신의 가족을 공녀로 보내 출세의 발판을 삼았다. 그 대표적인 자가 바로 세종조의 한확(韓確, 1400~1456)으로 그는 미인으로 소문났던 자신의 두 여동생을 모두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 삼한갑족(우리나라 최고 가문)에 올랐던 바,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그의 거대한 무덤이 이를 방증한다. 그 동네에는 왕릉이 없지만 왕릉처럼 큰 무덤이 있는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능내(陵內)가 되었다나 어쨌다나.....
명나라에 공녀를 바치는 일은 조선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자 다시 공녀 공출의 폐습이 되살아났다.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처녀들을 대거 끌고가 후처로 삼거나 혹은 노예로서 매매했는데, 그곳도 모자라 정기적 공녀 상납까지 요구했다. 과거 명나라 때 했던 것을 왜 우리에게는 시행하지 않느냐는 반박하기 어려운 주문이었다.
여기에는 청나라 황족 도르곤도 숟가락을 얹었으니, 자신의 마누라가 죽은 것을 이유로 들며 조선의 공주를 새 아내로 맞겠다고 나섰다. 놀란 효종은 아버지 인조의 국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숙안공주를 비롯한 제 어린 여식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그럼에도 청나라에서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개소리하덜 말고 빨리 공주를 보내라고 을러댔다. 청나라의 으름장에 효종은 정말로 공주가 있으면 보내주고 싶을 정도였으나, 공주나 옹주나 이미 다 출가를 시켰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처해진 효종은 고육지책으로 종친의 딸들을 넘보기 시작했고 이에 종친들도 서둘러 딸들을 출가시켰다. 니 딸만 귀하냐, 내 딸도 귀하다는 식이었으니 효종도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종친 금림군 이개윤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노라며 나섰다. 이개윤은 성종과 후궁 숙의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익양군의 후손으로, 세종 때의 한확과는 달리 대의를 위해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고자 나선 듯했다.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이개윤이 청나라에서 보낼 혼례품을 탐해 그리했다고 단정해놓은 통에 우국지사의 충정이라 말하기가 힘들다. 쩝!)
효종은 좋아라 하여 16살 난 이개윤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입적시키고 의순공주라 이름하였다. 의순공주는 대의(大義)에 순응(順應)하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의순공주는 1650년 4월 22일 멀리 청나라 북경으로 가 나이 많은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 근심을 덜은 효종은 이개윤을 종1품 가덕대부로 삼고, 벼슬이 없던 그의 아들 이준을 장릉(인조의 능)의 능참봉(종9품), 이수는 전설사(조선 시대, 의식에 쓰는 장막을 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별검(정8품)으로 제수했다.
친정은 이렇게 좀 나아졌을지는 모르지만 청나라로 간 의순공주는 그나마도 복이 없었으니, 남편인 예친왕 도르곤이 사냥을 나갔다 낙마하여 사망하는 바람에 결혼 7개월 만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도르곤은 생전에 역모 혐의가 있었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하였던 바, 의순공주는 더욱 디딜 땅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다른 황족인 단친왕 보로와 재혼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시조카인 보로가 의순공주의 미모에 반해 청혼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는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사취수 제도가 있었고 일부다처제였으므로 의순공주의 재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또 운이 없었으니 보로 역시 1년 만에 급서하고 말았던 바, 의순공주는 다시 과부가 되었다. 여기에 본인의 잘못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두 번씩이나 결혼에 실패한 의순공주를 거두려는 사람을 기대하기는 힘든 노릇이었으니 이후로는 홀로 빈궁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656년 4월 청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금림군 이개윤이 이와 같은 처지의 딸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비 이개윤이 통한의 눈물을 쏟았을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일 터, 그는 황제 순치제에게 자신의 딸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도 특별히 그녀를 붙잡아 놓을 이유가 없을 터, '과부로 사는 것이 가여우니 특별히 돌려보낸다'며 까다롭지 않게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의순공주는 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조선에서 의순공주의 귀국을 놓고 말이 많았다. 대신들은 금림군이 조정에 상의함이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던 바 조정을 능멸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탄핵했고, (요즘으로 보면 국회 모독죄의 탄핵쯤이 될런가?) 백성들은 의순공주에 대해 청나라 오랑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간 화냥년 중의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와 같은 비난은 금림군이 탄핵당하고, 그나마 바람막이가 돼 주었던 효종이 승하한 후 더욱 심해졌다. (어찌 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그의 아비가 버젓할 때는 딸을 팔아 집안이 출세했다는 비난이 그저 수군거림에 불과하였지만 이제는 대놓고 들어야 될 처지가 되었던 바, 온가족이 겪어야 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도 그를 더 이상 의순공주라 하지 않고 이개윤의 딸이라 칭했다. 그리고 금림군은, 사헌부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된 것도 모자라다 여겼던지 재차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모든 직함과 존호를 삭탈당하고 도성 밖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이후 부녀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천보산 자락의 벽촌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의순공주는 귀국 6년만인 1662년 8월 이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금림군은 그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26살로, 다행히 국왕 현종이 호조에 장례비를 넉넉히 지급하라는 명을 내려 천보산에 예장될 수 있었다. 이후 숙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신익상은 의순공주의 묘를 지나면서 그를 왕소군에 비유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당시에 옥 같은 얼굴로 오랑캐에게 시집가
채 늙기도 전에 돌아와 고향땅에 묻혔구나.
왕소군이 남긴 한이 이와 같았을까?
홀로 푸른 무덤에 머무노라니 황혼이 지네.
玉顏當日嫁驕虜
未老歸來葬故原
何似明妃遺恨在
獨留靑塚向黃昏
의순공주 무덤은 따로 '족두리 묘'라고도 불려진다. 의정부시 금오동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청나라로 가던 의순공주가 평안도 정주땅에 도착해 압록강을 건너기 전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며 강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인데, 수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을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가져와 금오동 선영의 아버지 묘 옆에 묻어주었고, 그 후로 의순공주의 묘는 족두리묘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에서) 사실 여부를 떠나 시대의 아픔이 오롯이 담겨 있는 전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