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임해군 묘와 어머니 공빈김씨의 성묘
좌절된 권력을 보는 것은 승자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기쁘겠으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40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623년 4월 11일 밤에 일어난 인조반정이 그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번 설명했던 바, 마찬가지로 길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김류, 이귀, 이괄, 최명길 등의 반란의 무리가 창의문을 깨고 창덕궁으로 향할 당시, 광해군은 이미 반란의 급보를 접했음에도 왜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앞서 말한 대로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는 사육신과 함께 했던 김질이란 자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인조반정 때도 또 같은 일이 일어났던 바, 반정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이반(李而攽)이 변심해 역모를 고변했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처가 없다가 반정 무리의 창덕궁 진입 직전에서야 부랴부랴 후원의 담장을 넘었고 내시의 인도로 지금의 종로구청 부근에 살던 의원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반정의 무리가 궁궐에 들어왔는 때는 광해군은 이미 탈출한 뒤였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횃불을 들고 대궐 이곳저곳을 뒤졌고 그러다 그 횃불이 침전의 주렴에 옮겨 붙었던 바, 때마침 불어닥친 강풍에 결국은 인정전을 제외한 창덕궁 전체를 태우고 말았다. 이날 인조반정 이후 흡사 도미노 게임과 같은 연쇄 반응이 이어져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같은 대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차례로 불러오게 되는데, 반정 당일의 창덕궁 화재는 향후 이어질 비극의 전조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화재는 광해군의 역공을 차단하는 기화가 되었다. 안국신의 집에 숨은 광해군은 그때까지도 반격이 가능했으니, 지방군을 불러올려 반군을 진압할 수도 있었다. 반군은 급조되었고 까닭에 겨우 1000명을 상회하는 정도였던 바, 얼마든지 분쇄가 가능했다.
연산군은 우선 또 다른 의원인 정남수에게 밖의 사정을 살피게 했는데, 정남수는 무엇보다 창덕궁의 불길과 연기에 혼비백산해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이 불가했고 거기에 광해군을 잡으려 사방에서 설쳐대는 군인들과 나졸들에 크게 겁을 집어먹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안국신과 함께 궁으로 와 임금이 자신의 집에 변복을 하고 숨어 있음을 알렸다. 광해군은 이천부사 이중로 등에게 붙잡혀 속수무책으로 궁으로 끌려왔다.
폐위된 광해군은 곧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고, 다시 강화 교동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 혹시라도 청나라가 폐주(廢主)를 복위시킬까 두려워한 조정에 의해 멀리 제주도로 보내졌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의하면 광해군은 1637년 6월 16일, 사중사(事中使), 별장, 내관, 대전별감 등의 압송 하에 제주도 어등포(지금의 행원리 포구)로 들어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유배 지역을 대외비에 부쳤던 바, 광해군은 자신이 가는 곳을 알지 못했고, 배의 사방을 가려 밖을 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비밀리에 이송되었다.
배가 어등포 포구에 닿고서야 호송 책임자 이원로(李元老)가 제주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광해는 깜짝 놀랐는데,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배 안에서 자기편이 모두 적으로 돌변함)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냐?"고 묻자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광해군은 포구에서 일박(一泊) 한 후 다음날 제주목으로 이거되었다.
광해군은 제주읍성 남문 밖 근방의 적소지에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울타리 안에 가둠)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광해군은 자신을 지키는 병졸들보다 험한 데서 자야 했으며,(속오군 30명이 번갈아가며 숙직했다) 하찮은 늙은 관비(官婢)에게까지 천대를 받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1640년(인조 18)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李時昉)으로부터는 괜찮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시방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이귀의 아들이었으니 광해군과는 악연인 사람이었다. 이시방 본인도 아버지 이귀의 권유로 반정에 가담하였던 바, 2등 공신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며 출세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인 인조의 구원에 소홀했다는 죄로 난리 후 유배되었다가 그해(1640년) 사면되어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과 조우하게 되었던 바, 후금(後金)과의 전쟁을 피하려 애썼던 광해군의 혜안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로 인해 이 지경이 된 상대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음직했다. 실제로 이시방은 광해군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고, 1641년 음력 7월 1일 그가 삶을 마감하자 시신이 썩을 것을 염려해 조정에 알리기도 전,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염을 마쳤다. 광해군의 시신은 관덕정에 머물다 화북포구를 통해 육지로 떠났다. 당시 나이 67세, 제주에 온 지 4년 4개월 만이었다.




광해군의 유해는 9월 10일 양주에 도착하여 10월 4일 연산군의 예(例)로 장례가 치러진 후 입관되었다. 그의 유택은 어머니 공빈 김씨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이 받아들여져 남양주 금곡 성묘(成墓, 공빈 김씨의 무덤) 가까운 곳에 마련되었는데, 훗날 문성군부인 유씨와의 쌍분으로 꾸며졌다. 반정의 무리들에게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냐,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냐" 소리쳐 물었다는 기개 있던 부인이다.
부인 유씨는 제주도에 함께 이배되기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48세를 일기로 죽었다. 연산군 부부의 무덤은 아쉽게도 지금은 출입이 제한돼 있어 그저 멀리서 봉분의 뒷모습만을 볼 수밖에 없다. (무단칩입하면 2000만원 이하 벌금 또는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무쎠워~) 아래 사진은 몇 년 전 겨울에 운 좋게 찍은 것들이다.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 (恭嬪 金氏, 1553~1577)는 선조의 후궁으로 선조의 첫아들인 임해군과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그의 무덤은 지금의 남양주에 성묘(成墓)라는 이름으로 마련되었다가 훗날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의 시호와 성릉(成陵)의 능호가 올려졌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후 다시 성묘로 격하되었는데, 광해군의 재위 시절 웬만한 왕릉 못지않게 꾸며져 성릉으로 불려야 어울릴 듯한 규모다. 어느 글에선가 '박주미 무덤'이라고 조크한 것을 보았는데, 과거 인기 드라마였던 <허준>에서 공빈 역을 맡았던 탤런트 박주미를 말하는 듯하다. 당시의 엄청났던 시청율과 리즈 시절의 박주미가 보여준 매력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닌 듯하며, 더불어 무덤 또한 예쁘기 그지없다. 광해군 묘와 마찬가지로 출입이 불가하지만, 예쁜 묘를 감상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없다.













공빈의 장남 임해군(臨海君, 1572~1609)의 무덤은 성묘와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성묘와 달리 찾기 어려운데 우선 표지판부터 해괴하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길가에 있는 표지석의 화살표는 길이 아닌 산비탈의 콘크리트 수로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그곳이 길이라고는 차마 여겨지지 않지만 그 수로가 임해군 묘로 가는 통로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수로보다는 위쪽 도로 준공표지석 옆에 있는 수로 쪽으로 올라가는 편이 묘를 찾기에 수월하다.





그런데 나와 같은 별난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를까, 굳이 임해군 묘를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모르겠다. 잘 알려진대로 임화군은 이복동생인 정원군, 순화군과 더불어 개망나니로 이름 높던 인간 말종인 까닭이다. 그들 3인은 악인이었을 뿐 아니라 사이코패스적 기질도 보였으니 백성들에 대한 재산 갈취와 매타작을 넘어 살인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다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화군과 순화군은 함경도로 의병 모집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으나 그곳에서도 그저 술타령에 매타작만을 일삼았던 바, 급기야 현지 백성들에 의해 포박되어 함경도로 진군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 가토로서는 뜻밖의 대어를 건진 셈이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가토 기요마사가 그들 형제들을 조선측에 특별한 조건 없이 인도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서, 왜장마저 그들 형제를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치부했는 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자격지심에서였는지 풀려난 임해군은 더욱 횡포해졌고, 이로 인해 결국은 왕위 경쟁전에서도 동생인 광해군에게 밀려 탈락됐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역모를 걱정한 광해군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도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원인 모를 죽음을 맞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