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삼백만리

별내동 주을곡 역사공원과 남재의 묘

기백김 2025. 5. 11. 23:02

 
별내역사문화공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918에 있는 도심공원으로 별내신도시 내에 조성됐다. 이곳은 복원된 통일신라 때의 주거지, 전통 연못과 정자, 조선 개국공신 남재(南在, 1351~1419)의 묘 등 역사를 테마로 구성했다. 아울러 이곳은 산지형 공원인 별내중앙공원과 이어져 있어 도심공원이 아니라 산중의 숲속 같은 분위기를 선사한다. 
 
묘역에는 남재 뿐 아니라 남재의 아버지 남을번(南乙蕃, 1320~1395), 신인 의령남씨(愼人宜寧南氏)의 묘도 있다. 신인(愼人)은 정3품, 종3품 종친의 부인에게 내리는 작호(爵號)를 말하는 것이므로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에게 시집간 남재 손자 남지(南智, 1392~1453)의 딸로 추정된다. 묘역은 일괄하여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지난날 묘역은 당연히 산기슭에 있었으나 2000년대 초 별내신도시가 건설되며 도심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위에서 말한 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예전에는 당연히 오픈됐던 묘역이 출입금지 지역이 되어버렸다. 겉으로는 번지레해졌으나 오히려 외화내빈이 된 기분이다. 왕릉과 같은 묘역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남재의 묘 / 뒤로 불암산이 보인다.
남재와 의령남씨의 묘(아랫쪽)
남재에 대하여 / 남양주시립박물관

 
봉문 좌측에는 신구(新舊) 묘비가 1기씩 있다. 구 묘비의 앞면에는 '개국공신 영의정 충경 남공재묘'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옛) 묘갈이 오래돼 1898년(광무2) 3월 15대손 군수 계미(啓迷), 16대손 전 군수 기원(起元)이 돌을 깎아 새로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근처 사당인 충경사(忠景祠) 비각 안에는 1892년(고종29) 건립된 남재의 신도비가 안치돼 있는데, 마모가 심해 읽을 수 없는 까닭에 바로 옆에 국한문 혼용의 신도비를 새로 건립했다. 
 
 

남재의 묘 전면 탁본
남재의 묘 후면 탁본 / 남양주시립박물관
남재 신도비
사당인 충경사 / 뒤로 묘역이 보인다.
신도비각 / 왼쪽 것이 구 신도비다.
부근의 정자와 연못

 
남재에 대해서는 앞서 '함흥차사 & 이성계가 여덟 밤을 잔 팔야리 전설'에서 말한 바 있다. 마지막 함흥차사로 갔던 남재가 이성계를 사냥으로 꾀어 한양으로 데려왔다는 전설을 소개했던 것인데, 스토리를 대강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왕자의 난' 후 고향 함흥에 칩거한 이성계를 모시러 갔던 사자들이 모두 소식이 없자 이방원은 다시 남재를 사자로 보냈다. 남재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한 장수로서 그로 인해 개국일등공신에 오른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성계와는 호형호제하던 막역한 사이였던 바, 어쩌면 차사로서는 마지막 인물일는지 몰랐다.
 
남재는 앞서 사자로 갔던 박순마저 죽임 당했음을 감지하고 다른 다른 꾀를 냈다. 매사냥에 천착했던 이성계의 취미를 이용해 그를 끌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사자가 아닌 척 이성계를 찾은 남재는 "벼슬에서 물러나 매사냥으로 소일하고 있는데, 우연히 매 사냥패를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낚시로 말하자면 밑밥을 뿌린 것이었다.
 
워낙에 매사냥을 좋아하던 이성계는 쉽게 낚였다. 이에 태조는 남재와 함께 사냥에 나섰고 매를 쫓아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다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면 팔야리(八夜里) 근방에서 여덟 밤이나 지나게 되었는데, 동네 이름 팔야리는 이 일에서 유래되었다.
 
그렇게 8일을 지낸 이성계의 눈에 문득 삼각산(북한산)이 들어왔다. 삼각산이 보인다는 것은 도성이 가깝다는 뜻이었다. 이성계는 비로소 남재의 꾀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한양과 팔야리는 그야말로 지척이라 결국 환궁하기로 마음먹고 왕숙천 부근에서 일박을 한 후 도성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다.
 
 

왕숙천 하류 / 왕이 자고 갔다 해서 왕숙천이다.
팔야리 느티나무 / 왕이 8일 밤을 지내 팔야리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 약 400년, 수고 25m의 고목이다.
안내문

 
남재에 관해서는 무덤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하다. 이 역시 이성계와 엮어 있어 앞서 '전설과 억측이 혼재된 망우리와 동구릉 건원릉'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재는 앞서 소개한 팔야리 전설에서 함흥에 있던 태조 이성계를 매사냥을 핑계로 유인해 남양주 진접읍 팔야리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기화가 되어 이성계는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후 이성계는 자신이 묻힐 유택을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던 중 검암산 밑에서 명당을 발견했으나 공교롭게도 그곳은 이미 남재가 자신의 묏자리로 잡아 놓은 곳이었다. 
 
이성계는 그 자리를 요구하였고 남재는 선뜻 양보한다. 이에 이성계는 남재에 대한 고마움에 이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불망기(不忘記) 서찰을 써 주었다. 이것을 내밀면 조선팔도 어느 곳이든 무덤 터로 쓸 수 있을 것인즉 이 불망기로써 '근심(憂)을 잊으라(忘)'는 위안의 말과 함께였는데, 이후 이 일대의 지명이 망우리(忘憂里)가 되었다는 설이다.  
 
 

망우동 고개의 해태상 / 서울과 구리의 경계가 된다.

 
묏자리에 얽힌 또 다른 버전이 있다. 이 버전은 조금 더 나아가 남재와 이성계가 묏자리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주축이다. 대강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각자 묏자리를 정한 두 사람은 서로의 장지를 구경하기로 했다. 순서는 지금의 별내동 주을곡에 정한 이성계의 자리를 먼저 구경하고, 건너편 검암산에 있는 남재의 묏자리를 나중에 구경했다. 그런데 검암산에 이른 이성계의 눈이 번쩍했다.   
 
일찌기 묏자리를 찾아다닌 이성계는 보는 눈이 있었던 바, 이곳이 명당임을 대번에 알았다. 이에 남재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남재는 싫었지만 차마 대놓고 거절은 못하고, 대신 "자고로 왕의 능 자리에 묘를 쓰면 후대에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존재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자 이성계는 "만일 역적이 나오더라도 당사자만 문제 삼아라는 유훈을 남기겠다"고 약속한 후 기어코 묏자리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 약속에 따라 후일 남이(南怡) 장군이 역모로 몰려 일족이 멸절될 수 있었으나 남이만 처벌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남이는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후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신진관료의 약진을 두려워 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남이는 결국 유자광의 역모 참소로써 1468년(예종 1) 10월 용산강(한강) 새남터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당해 죽었고, 그의 일족 또한 역모 가담 등의 혐의로 처형되었다.  
 
남재의 묘가 있는 곳은 주을곡(注乙谷)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다. 이에  별내역사문화공원은 별내동 주을곡 역사공원이라고도 불리는데 어느 것이 정식 명칭인지는 모르겠다. 주을곡은 별내 덕송천에 줄풀이라는 수초가 많아 '줄천' 혹은 '주을천'이라 불렸던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줄 또는 끈을 의미하는 '줄ㅡ'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한자 注乙은 특별한 뜻이 없고 단순히 음(音)만을 차용한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는 역시 남재와 이성계로부터 비롯됐다. 때가 되어 두 사람은 명을 다 했는데, 이성계가 먼저 죽어 하관(下棺)도 일찍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남재가 죽어 하관을 했는데, 이때 제관들이 이성계의 관에 사용한 줄을 남재의 하관 때도 썼다 하고, 이후 동네이름이 줄곡(주을곡)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1408년에 죽었고 남재는 1419년에 죽었기에 시기가 너무 멀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재 묘 앞을 흐르는 덕송천
남재 묘와 신인 의령남씨(愼人宜寧南氏)의 묘
남재의 묘
신인 의령남씨의 묘
남재 묘역
초입의 남재 묘표
남재 묘역 가는 길
남재의 유택이 될 뻔했던 건원릉
잉(孕)에서 본 후경

장명등
무석인과 석마
12지신상 · 금강저 · 제비꽃 등을 찾을 수 있는 병풍석
태조 이성계 신도비
건원릉 정자각과 신도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