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삼백만리

실전된 흥안군의 묘와 불가사리

기백김 2025. 5. 15. 22:09

 
'실전'이라 하면 보통 '실제 싸움'을 말하는 實戰을 떠올리겠지만, '중도에서 없어져 알 수 없게 되다'는 의미의 失傳도 가끔 사용된다. 용례는 주로 무덤이 없어진 경우에 쓰이는데, 비극적 사연이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예가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가 모셔진 안산 소릉(昭陵)이다. 소릉은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목내동 산47번지에 있었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단종 복위 기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추폐(사후 폐위)되어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안산 바닷가에 버려졌다.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 단종을 낳은 뒤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까닭에 단종 복위 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부관참시와 같은 화를 입었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이장(李暲)이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던 까닭이다. 워낙에 심약했던 탓이었는데 결국은 그로 인해 죽었고, 그 아비 세조의 꿈에도 현덕왕후가 나타났던 바, 결국 소릉을 파헤치고 시신까지 훼손시킨 것이었다.  
 
현덕왕후는 중종 때 복권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미 시신은 실전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여서 찾을 길이 없었는데, 그의 관이 바닷가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됐다. 현 안산시 목내동 공단 내의 일진전기 회사 정문 오른쪽 울타리 안에 있는 '관 우물지(棺井址)' 표석이 바로 발견지에 세워진 것이다. 과거 바닷가였던 그곳은 지금은 반월국가산업단지가 되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수습된 관을 동구릉 현릉(문종의 능)에 옮겨 묻은 것이 지금의 현덕왕후 능이다. 
 
 

현덕왕후 능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일진전기 내 '관 우물지' 표석 / 지역N문화 사진

 
현덕왕후의 무덤은 이렇게 부활될 수 있었다. 하지만 흥안군(興安君)의 경우는 부활하지 못했으니, 결국 무덤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게 되었다. 그의 묘는 안양 평촌마을 야산에 있었으나 일대에 평촌신도시가 조성되며 이장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공고를 낸 후에도 이장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무연고묘지로서 굴착기의 삽에 의해 사라졌고, 그곳에 있던 석물만이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평촌교회 부근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석물은 지금은 용인 경기도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놓였다) 

이렇듯 마구잡이로 취급되었지만 그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의 왕자였다. 그리고 3일간 왕이었던 적도 있다. 그 자의 정체는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李瑅, 1598~1624)이다. 하지만 이장 공고가 났을 때는 전주이씨의 묘소라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데다 묘표마저 사라진 까닭에 주인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장 공고 후에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바, 결국 실전되고 만 것이었다. 오늘은 그 비운의 주인공에 대해 들여다보려 하는데, 그전에 선조의 아들들을 대강 살펴보자. 
 
1남 임해군(臨海君, 1572 ~ 1609) 모; 공빈 김씨 
2남 광해군(光海君, 1575 ~ 1641) 모; 공빈 김씨 
3남 의안군(義安君, 1577 ~ 1588) 모; 인빈 김씨  
4남 신성군(信城君, 1578 ~ 1592) 모; 인빈 김씨 
5남 정원군(定遠君, 1580 ~ 1619) 모; 인빈 김씨 
6남 순화군(順和君, 1580 ~ 1607) 모; 순빈 김씨
7남 인성군(仁城君, 1588 ~ 1628) 모; 정빈 민씨
8남 의창군(義昌君, 1589 ~ 1645) 모; 인빈 김씨 
9남 경창군(慶昌君, 1596 ~ 1644) 모; 정빈 홍씨 
10남 흥안군(興安君, 1598 ~ 1624) 모; 온빈 한씨 
11남 경평군(慶平君, 1600 ~ 1673) 모; 온빈 한씨 
12남 인흥군(仁興君, 1604 ~ 1651) 모; 정빈 민씨 
13남 영성군(寧城君, 1606 ~ 1649) 모; 온빈 한씨 
 
선조의 아들들은 사건 사고가 많았던지라 몇 사람은 앞서 이력을 살핀 바 있다. 대표적으로는 둘째 아들 광해군이 될 것이다. 그는 선조에 이어 조선 15대 국왕이 되었다.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은 16대 국왕이 되었는데, 바로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후속 과정에서 내분이 발생하였던 바, 반정공신이었음에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밀려난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 / '이괄이 눈물로 건넌 송파나루'
 
영변에서 거병한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있는 평양과 다수의 관군이 주둔하고 있는 안주를 피해, 방비가 허술한 샛길만을 택해 기동력 있게 남하하였다. 이어 황주의 신교 및 예성강 마탄전투에서 관군을 깨고 임진강을 건너자 인조 임금은 서둘러 공주로 도망갔고, 이괄은 1624년 음력 2월 10일 위풍당당히 창의문을 통과해 입성했다. 조선왕조 건국 이후 변방에서 거병한 반란군이 한양에 입성한 유일무이한 예였다.
 
도성을 점령한 이괄은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를 왕위에 올렸다. 흥안군이 왕에 된 데는, 피난을 가지 않고 어정거리다 이괄의 눈에 띄어 옹립되었다는 썰과, 인조와 함께 도망가다 한양으로 되돌아가 반군에 합류하였다는 썰이 대립한다. 어찌 됐든 흥안군은 이렇게 왕이 되었지만 이괄의 반군이 장만, 정충신이 이끄는 관군과의 안현전투에서 패하며 3일 만에 왕좌에서 내려와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붙잡혀 복주(伏誅)되었다. 복주는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는 뜻으로, <인조실록> 2년 2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제(李瑅)가 복주되었다. 제는 선조대왕의 후궁 소생으로서 흥안군에 봉해졌는데 사람됨이 용렬한데다가 패악스런 행실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괄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불궤를 음모한 것이 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므로 대간이 남방에 안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궁중에 유치시켰다. 남행(南幸)할 때에 거가를 따르도록 하였으나 제는 도망쳐 적에게 들어가 이괄의 군사에게 음식을 먹이니 이괄이 위호(僞號)를 가하고 교지라 칭하여 관원을 제수하였다.  이괄이 패하게 되자 이괄과 함께 달아났는데 이괄이 참살되어서는 여러 날 동안 도망하여 숨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잡혔는데, 심기원· 신경진이  장만과 상의하여 곧 군중(軍中)에서 목매어 죽였다. 
 
'군중(軍中)에서 목매어 죽였다'는 '군기시(현 서울시청 자리)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뜻이다. 이러했으니 그 묘가 제대로 꾸며질 리 없었다. 하지만 후손은 이어졌을 텐데 결국 묘가 없었지고 석물만 남게 되었다. 보노라니 안타깝기도 하지만, 난세(難世)의 처신이 지혜롭지 못했던 흥안군의 잘못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전투가 벌어졌던 안현 / 안현은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흥안군이 빠져나간 광희문 / 문을 나간 흥안군은 경기도 광주로 달아났으나 추격해온 관군에 붙잡혔다.
흥안군이 죽은 곳
애꾸눈 장군 도원수 장만(1566~1629)
천민 출신의 장군 부원수 정충신(1576~1636)
흥안군의 묘가 있던 곳
부근의 흥안대로 표지판 / 정확히 말하자면 일제강점기의 흥안보통학교에서 유래됐다. 아무튼 근방에 흥안군 묘가 있었음이다.

 
자고로 난세에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앞서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요즘처럼 혼탁한 정황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흡사 전설 속 불가사리가 출현해 분탕짓을 치는 듯하다. 과거 북한에 납치되었던 고(故)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조선시대 배경 SF영화 <불가사리>를 보면 그 희대의 괴물을 추앙하는 사람도 있고, 괴물의 위력에 굴복하여 변절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난세에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영화도 역사도 말해주고 있는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선거철에 내가 아는 변호사 한 명도 급히 말을 갈아타다 낙마해 큰 부상을 입었다. 누가 봐도 말을 갈아타면 안 될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빛나는 국회의원 뺏지의 광휘에 눈이 가렸는지 황당한 짓을 벌였다. 그는 결국 재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낙마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만은....   
 
 

영화 <불가사리> 속의 불가살이(不可殺伊)' / 불가살이는 '죽일 수 없는 괴물'이라는 뜻이다.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창덕궁 대조전의 불가살이
경복궁 경회루의 불가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