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의 피의 복수극
예전 (사)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함께 전라남도 담양으로 가사(歌辭)와 원림(園林)을 주제로 한 테마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담양의 송강정, 식영정, 면앙정, 환벽당 등을 처음 보았고 가사문학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한국 최고의 원림이라는 소쇄원도 구경했다. 어찌나 좋았던지 오래 전의 일임에도 장면 장면이 오롯하다.
그리고 그때의 감흥 때문인지 이후로도 나는 줄곧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고향이 전남 담양이라고 생각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의 가사가 모두 그곳 담양에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의 4대 가사 문학 중의 하나로 교과서에도 실린 관동별곡은 당연히 강원도가 무대이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 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로 시작되는 바로 그 가사이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의외로 서울 서촌(西村) 양반가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에서 태어난 것인데, 그것도 금수저 급이니 아비는 돈녕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鄭惟沈, 1493~1570)이고, 큰누이는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였으며 막내 누이는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손자 계림군 이유(李瑠)에게 출가했다. 비록 대대로 큰 벼슬을 이어온 명문대가는 아니었지만 금수저로 불림에 부족함이 없을 가계였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 서촌 장의동(지금의 서울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당연히 귀했을 테고 또한 금수저 집안이라 누이가 있는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2살 위인 경원대군과 함께 놀고 지내며 우정을 쌓았던 바, 훗날 경원대군이 왕(명종)이 되고 정철이 과거에 합격했을 때 합격자 명단을 본 명종이 동명이인이 아닌가를 확인한 후, "드디어 내 어릴 적 친구가 출사하게 되었구나" 하며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의 일이고 그의 금수절 시절은 1545년(인종 1)의 을사사화를 맞으며 끝이 났다. 당시 정철의 집안은 대윤(大尹)에 속했던 바, 소윤(小尹)인 윤원형이 대윤을 꺾고 득세하며 정철의 부친 정유침과 이조정랑이었던 큰형 정자(鄭滋)는 유배를 갔으며, 매형인 계림군은 역모 주모자로 몰려 처형됐다. 이후 유배를 갔던 큰형은 유배지인 함경도 경원에서 죽고 부친은 유배지를 전전하다 사면돼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담양 창평에 은거하였다. 당시 열 살 남짓이던 정철은 이렇게 담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정철은 1562년(명종 17년) 그의 나이 26세 때에 문과 별시에 장원 급제하며 금의환향하였고, 명종은 이를 축하해 어릴 적 벗이었던 정철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그래서 언뜻 정철이 친구인 명종의 뒷배로 출세하게 되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정철은 명종 때는 잘 나가지 못했다. 1566년 명종의 형 경양군 이수환이 처가의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서얼인 처남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국왕 명종은 사헌부 정언인 정철이 조용히 무마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철은 원칙대로 사건을 공론화하여 처리하였던 바, 이후로 명종에 미운털이 박혀 외직으로 전전하게 된다.
정철은 선조 치세에서는 무난한 승진을 이루었으니 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시작으로 1583년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1584년 사헌부대사헌, 1585년 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된다. 선조는 정철을 매우 신뢰하고 총애하였던 바, 말(馬)과 은술잔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후 사간원 언관들과 동인계 사헌부 관원들의 탄핵을 받아 야인이 된 적도 있으나 1589년(선조 22) 10월 정여립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복권되어 우의정과 위관(조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정여립 역모사건은 그 실체조차 불분명한 일이었고 신원 미상의 역모자 길삼봉은 끝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며 정여립은 고향으로 도망갔다 진안 죽도에서 자살했다. 이쯤 되면 정철로서는 그만 덮을 수도 있었겠지만 서인(西人) 위관 정철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려들지 않았으니 동인(東人)의 지도급 인물로 인식되었던 이발 · 이길 · 김우옹 · 백유양 · 정언신 · 홍종록 · 정언지 · 정창연 · 최영경 · 정개청 등을 공범으로 몰아 처형 또는 유배시켰다.
관리뿐 아니라 평민, 노비도 수상한 자는 죄다 끌려와 문초를 겪었고,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서산대사와 사명당도 끌려와 조사받았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다행히 무혐으로 풀려났지만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죽은 사람만 1000명이 넘었던 바, 얼마나 정치 보복의 광풍이 몰아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철은 왜 이토록 무자비했을까?
아마도 정치상의 다른 견해로 인해 맞아 죽은 형과 유배당한 아버지,(정철의 형 정자는 곤장을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가다 유배지에 도착하기 전 장독으로 죽었고, 아버지 정유침은 유배지를 전전하다 풀려난 후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동갑내기 절친인 율곡 이이도 동인의 탄핵으로 죽었다고 여겨 그에 대한 보복심이 작렬한 듯하다. (이이는 동인에 탄핵을 당한 뒤 복권했으나 이듬해인 1584년에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끝으로, 차체에 생각난 사람을 간단히 논해보려 한다. 대통령 후보 등록자 이재명이다. 그는 집권해도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제껏 보인 행보를 보면 그 말에 믿음이 실리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니, 정권은 잔인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던 그의 지론이 현실화되리라 보고 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리 복수에 매몰돼 있을까?
대충 뽑았지만 아래 사진에 답이 있을 듯하다. 그는 서울구치소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그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을 것인데, 결국은 '비명횡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명계' 중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풀려난 2023년 9월 27일은 이재명 개인적으로도 운명의 날이었지만 대한민국으로서도 운명의 날이었다. 죄가 소명된다면서도 야당 대표라 해서 풀어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 유창훈은 법원 역사뿐 아니라 그야말로 길이길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남을 인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