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옹주 & 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
인터넷에서 경숙옹주(敬淑翁主, 1439~?)의 묘를 검색하면 부천에 있는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과 경숙옹주의 쌍분이 검색된다. 하지만 그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다. 방금 말한 사람은 성종의 딸 경숙옹주이며 민자방은 그의 남편이다. 민자방 앞에 붙은 여천위의 위(尉)는 공주나 옹주와 결혼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감투인데, 내가 찾는 경숙옹주는 반성위(班城尉 ) 강자순(姜子順)에게 시집갔다고 하니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아름아름 알아 찾아간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78번지로, 앞서 말한 사릉과 별로 멀지 않은 야산이다. 그래서 쉽게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이틀 동안 내린 비로 사릉천은 불어 있었고 GPS가 이끄는 데를 가기 위해 바지를 벗고 불은 강물까지 건넜지만, 이곳저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경숙옹주의 무덤을 발견할 수 없어 결국은 포기를 하고 돌아와야 했다.
다음날 일요일, 이번에는 다른 루트로 경숙옹주의 묘를 찾았고 마침내 다다를 수 있었다. (다른 루트가 오히려 쉬웠다) 황폐하리리 생각했던 묘역은 의외로 잘 단장되어 후손들의 지속적 관리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경숙옹주는 남편 강자순, 그리고 강자순의 재취부인 경주이씨와 같은 묘역에 누워 있었다. 비가 온 후라 풀들이 무성했지만 그 전의 어느 곳처럼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고, 무덤들도 호석이 둘러져 있어 풀이 성하지 못했다.
다만 사진처럼 봉분에 현대식 호석을 두르는 요즘의 리모델링 양식은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다. 옛것도 아니고 현대식도 아닌, 그렇다고 퓨전도 아닌 이 같은 형식은 그저 시대감만을 상실한 채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를 연출해 낸다. 제 조상의 묘를 관리하겠다는 데 법적, 제도적 제재를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이 시대불명, 정체불명은 호석 양식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경숙옹주는 조선의 왕녀로 문종의 둘째 딸이며 단종의 이복 누나이다. 어머니는 사칙 양씨로서 가계나 본관, 생몰년 등은 확실치 않다. 다만 13세 때 궁에 들어온 하급 궁녀로서 미인이었으며 문종과 동갑내기였다는 말 정도가 전한다. 사칙 양씨의 신분은 미천했음에도, 앞서 '문종 부인 레즈비언 썰은 사실일까?'에서 말한 것처럼 동궁(문종)은 아내 순빈 봉씨가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살며 궁녀 소쌍과 동성애를 일삼자 이에 학을 떼던 참에 양씨라는 동갑내기 궁녀와 가까워져 자식까지 생산한 듯싶다.
이후 양씨는 종6품 사칙(事則)이라는 궁관직을 얻게 되는데 조선조에 있어 사칙의 관직이 적용된 유일한 사례이다. 이후 사칙 양씨는 딸 하나를 더 낳았으나 영아 사망했다. 사칙 양씨는 경숙옹주를 낳은 후 세자빈 순빈 봉씨에게 무지무지 시달렸다고 하는데, 딴은 이해도 간다. 자신은 세자의 사랑도 못 받고 아이도 낳지 못했는데 천것인 궁녀가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식까지 낳았으니 속이 뒤집어질 만도 했다.
아무튼 사칙 양씨는 꿋꿋이 딸 경숙옹주를 키워 1454년(단종 2) 음력 4월 16일 강자순에게 출가시켰다.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사칙 양씨나 경숙옹주나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경숙옹주는 무난한 삶을 영위하다 1484년경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사망 나이가 추정되는 것은 남편 강자순이 경숙옹주의 사망에 앞서 전(前) 현감 이길상(李吉祥)의 딸을 첩으로 들인 것이 문제가 되어 조정에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첩이라고 명시된 것을 보면 이때까지는 본부인 경숙옹주가 아직 살아 있었던 듯하다. 다만 경숙옹주는 내내 불임으로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던 바, 강자순이 첩을 들여도 타박을 할 입장은 아니었는데, 문제가 된 것은 첩으로 들어온 경주이씨가 사족(士族), 즉 양반의 딸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풍습에 사족의 딸은 첩으로 삼지 못한다는 관습법 같은 것이 존재했던 까닭이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풍기문란으로 강자순을 고소했던 것이다.
이를 안 성종 임금도 펄쩍 뛰었다. 성종은 "사족의 딸에게 장가들어 첩으로 삼는 것은 인군(人君)으로서도 부당하거늘 인신(人臣)이 그러하다니 말이 되는가?"라며 불러서 연유를 물어보라고 했다. 소환돼 온 강자순은 답하기를, 이길상의 딸을 첩으로 들일 때 이길상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는데, 그의 아내가 가난을 이유로써 자신의 딸을 거둬달라고 부탁했으며,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도 소실로써 천민을 맞는 것보다는 양인(良人)의 딸이 낫다고 해 이길상의 딸을 맞이하였노라 했다.
그러면서 또 아뢰기를, 이미 전에도 운성부원군 박종우(태종의 딸 경혜옹주와 결혼한 자)가 양가(良家)의 딸을 첩으로 맞은 예가 있어 그리 했노라며 구실 삼았다. 그러자 임금으로서도 달리 할 말이 없어졌던 바, 대신 향후로는 부마나 조관(朝官, 조정 대신)이 사족의 딸을 첩으로 삼을 수 없노라고 예조와 사헌부에 엄중히 전교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향후로는 부마가 재혼할 수 없도록 법제화하자는 데까지 번졌고, 이에 대한 치열한 갑론을박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1768년(숙종 7) 7월 마침내 '부마 재혼 금지법'이 통과되어 명문화되었다. 그간의 관습법이 우선시 된 결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초인 1484년에 일어난 이 사건의 불똥이 그 후 400년이 지나 조선말의 박영효(朴泳孝, 1861~1939)에게 튀었다는 점이다.
앞서 갑신정변을 논하며 김옥균의 화려한 스펙을 말했지만 부마도위(駙馬都尉) 박영효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우선 부마도위라는 위호(位號)를 주목해 볼 만한데, 이는 임금의 사위에게 내리는 봉작을 말한다. 부마는 본래 천자의 말을 의미했고, 부마도위는 그 말을 관리하는 자의 직함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돼 온 오래된 호칭이었다.
즉 박영효는 1872년(고종 9) 철종의 일점 혈육인 영혜옹주와 결혼함으로써 고종의 매제가 되었고,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를 받아 당 12세에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그가 철종의 딸과 결혼하게 된 데는 할아버지인 우의정 박규수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아울러 내각 총리대신과 주미전권공사를 지낸 박정양 역시 그의 집안이었다. 과거는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워낙에 집안이 빵빵하다 보니 굳이 볼 필요도 없었을 터, 1878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시작으로 판의금부사까지 한 걸음에 내닫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형통하지만은 않았으니 결혼 3개월 만에 아내 영혜옹주가 급서하며 돌아갈 수 없는 돌씽이 되고 말았다. 숙종 7년에 제정된 '부마 재혼 금지법' 때문이었다. 이후 고종이 불쌍하다며 특별 배려로서 궁녀 몇 사람을 하사해 이들로부터 자식을 얻었지만 모두 서출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며 자식들은 서출의 족쇄가 풀렸지만 박영효는 오랜 사회적 관습으로 인해 여전히 돌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와는 별개로, 본래 재주가 출중했던 박영효였던 바, 그는 당시의 조선총독부 어용 자문 기관이자 귀족 기관인 중추원 의장의 직함을 이용해 제 손녀 박찬주를 대한제국 황실의 적손인 흥영군(興永君) 이우와 결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우는 1912년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때가 일제강점기였는지라 왕공족(王公族)의 의무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서 복무하였다.
이우는 1936년 대위로 진급하였고 그해 박찬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복돼 사망하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청과 이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중 첫째 이청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서울 운현궁과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의 수 만평 임야 등, 그때까지 존속하던 이왕가 재산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종은 미국 브라운대학 유학 중 교통사고로 1966년 사망)
하지만 이왕가의 재산은 대한민국 건국 후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모두 국유화되었던 바, 박찬주가 이에 불복해 국회를 상대로 환수 소송을 벌였다. 박찬주는 이 재산이 고종의 형 흥친왕의 사유재산임을 소명해 운현궁과 남양주 화도읍의 땅을 되찾았고, 1966년 그 땅에 대한민국 최초의 대규모 사설 공동묘지인 모란공원을 조성했다. (운현궁은 이때 자금부족으로 매각됨)
이후 박찬주는 그곳 모란공원에 부산 다대동 '천하제일길지(吉地)'에 장사 지내졌다가 해방 후 친일부역자로 파묘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던 할아버지 박영효의 유해를 이장했다. (박찬주는 1995년 북아현동 자택에서 81세를 일기로 별세) 그런데 앞서 말했듯 유택의 장소가 궁벽하다. 아무튼 박영효는 다대포 명당을 잃고 이곳으로 왔는데 지금은 부인 영혜옹주와 합장돼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