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성임당 탑이 있는 남양주 흥국사

기백김 2025. 7. 3. 23:01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 '혹성탈출(Planet of Apes)'은 지금도 같은 제목으로 리바이벌된다. 원숭이가 다스리는 미래의 땅 지구가 그만큼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는 소리인데, 2024년 개봉된 뉴버전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한국 관객들을 위한 스페셜 포스터가 제작돼 눈길을 모았다. 폐허가 된 광화문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들이  폐허가 된 광화문을 배경으로 서 있을까?

 

 

광화문을 배경으로 한 뉴버전 '혹성탈출'의 포스터

 

이를 알기 위해서는 1968년 제작된 오리지널 '혹성탈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영화는 우주  여행길에 오른 주인공 챨튼 헤스턴이 우주선이 고장 나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곳은 원숭이가 다스리는 행성으로, 주인공은 그 행성에 머무르며 진화와 역행된 갖가지 일들을 겪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을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다름 아닌 지구였으니, 마지막 엔딩 장면은 주인공 챨튼 헤스턴이 바닷가에서 만난 ' 자유의 여신상'의 잔해를 보고 절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주인공 챨튼 헤스턴
부숴진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절망해 쓰러지는 주인공 (오른쪽 말 앞)

 

이 영화의 바탕이 된 것은 당시 설왕설래되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과거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질량을 가진 물질은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질량을 가진 물질은 공간을 휘게 하고 그 휘어진 공간 사이로 물체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했다. 그런데 그 이론에 따르면 질량은 빛과 시간도 휘게 한다.(상대성이론의 핵심인 중력장 방정식은 빛이 휘어야 성립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중력장(중력이 작용하는 공간)에서는 시간이 느려진다. 아주 정확한 두 시계를 가지고 보면 아래 층의 시계는 위 층의 시계보다 늦는데, 지구의 중심에 가까운 아래층이 중력을 더 받기 때문이다. 질량을 가진 지구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잡아당기는 것이다. 아래 그림처럼 휘어진 공간 사이로 물체가 이동을 하면 시간도 느리게 가는 것이니, 시간과 공간은 독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붙어 있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은 같은 물리량'이라는 것으로, 이 시공간을 민코브스키(독일의 물리학자/4차원 공간)라 부른다. 

 

 

민코브스키의 도해 / 중력이 세지면 시공간이 더욱 많이 휘게 돼 시간 간격이 늘어난다.

 

예전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왜 갑자기 '자유의 여신상'의 잔해가 튀어나오는가, 그리고 그걸 본 주인공이 왜 절망하는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주인공은 원숭이가 지배하는 미지의 행성(사실은 지구)에서 탈출하지만 고속으로 이동하는 우주선 안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게 되므로 우주여행을 하며 2000년 후의 지구로 되돌아오게 된 것인데, 이후에 제작된 후속 편 '혹성탈출'도 일반 상대성 이론을 기본으로 제작되었던 바, 한국판 포스터에는 폐허가 된 광화문이 특별 출연하게 된 것이다. 

 

 

'혹성탈출'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한 'WAR'의 포스터 / 2001년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는 '종(種)의 전쟁'으로 번역됐다.

 

서설이 길었다. 사실 이 얘기를 하는 것은 '혹성탈출'이 불교의 기본교리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행무상은 '모든 흐르는 것은 무상하다'고 일반적으로 해석된다.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정확히는 '우주만물은 항상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윤회하므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제행무상은 '공'(空)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空은 無가 아니고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뜻이다. 

 

그 '공'은 형체적으로 표현하면 '원'(圓)이나 '구'(球)에 가깝다. 원래는 형상이 없으나 굳이 형상을 만들자니 각(한계)이 없는 '원'이나 '구'가 되는 것이다. 이에 열반한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 구체(球體)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홍법국사탑이다. 홍법국사는 고려 목종 때의 고승으로 충청북도 충주시 정토사에 그를 기려 세웠던 승탑이 정토사가 폐사된 후 옮겨진 것이다. 

 

 

홍법국사탑

 

구체를 조형화한 조선 초 탑으로는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이 유명하다. 탑에 봉안된 사리의 주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학자들의 연구 결과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했던 불탑임이 밝혀졌다. 근자에 조성된 탑으로는 예산 수덕사에 만공스님을 기려 세운 만공탑, 합천 해인사에 성철스님을 기려 세운 성철스님 사리탑, 서울 화계사에 숭산스님을 기려 세운 숭산대종사탑 등이 깊은 인상을 준다.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수덕사 만공탑
해인사 성철스님 사리탑
화계사 숭산대종사탑

 

최근에 본 승탑으로는 남양주시 별내면 흥국사에 자리한 성임당탑(聖任堂塔)이 인상 깊다. 성임당탑은 경내 동북쪽 낮은 능선 상에 위치하는데, 절내에서는 보이지 않고 표지판도 따로 없으므로 스님에게 물어보던지 경내 오른쪽에 위치한 나한전의 오른쪽 산길로 잠깐 오르던지 해야 한다. 형태를 보면 지대석을 제외한 기단부와 지붕돌은 팔각, 몰돌과 상륜부는 원형인 전통적인 팔각원당형 양식으로서 특별할 것은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식의 탑은 최근에 춘천 청평사 뒤 숲속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16나한상 등의 국가유산청 지정 보물이 모셔져 있는 나한전 / 그래서인지 꽁꽁 닫혀있다.
성임당탑
승탑 옆의 안내문
남양주 흥국사 성임당탑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203호
춘천 청평사의 환적당과 설화당의 승탑

 

이 승탑에 눈길이 가는 것은 우선 규모로서, 높이가 3m 30cm에 이른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보다시피 균형미가 뛰어나다. 그리고 몸돌에 안상문과 연화문을 새긴 솜씨가 보통이 아닌 까닭인데, 몸돌 상부 구체에 '성임당축존지탑'이라는 명문이 있어 주인공 당호가 성임당이며, 법명이 축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성임당축존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어 승탑이 세워진 시기 또한 알 수 없는데, 조각 수법으로 보아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임당축존지탑'의 명문
절 입구에도 비슷한 형식의 승탑이 있으나 이 또한 주인공을 알 수 없다.

 

성임당탑을 보유한 사찰 흥국사의 창건 시기 또한 알 수 없다. 들리는 말로는 599년 신라 원광법사가 창건했다 하는데 그건 그저 하는 소리 같고, 기록에 나타난 가장 오랜 연혁은 1568년 선조가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짓고 흥덕사(興德寺)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곳에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가 있는 까닭에 어쩌면 그것이 이 절의 가장 오랜 사적(寺跡)일지도 모르겠다.

 

이후 인조 4년 흥국사(興國寺)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대웅보전 안내문에 따르면 흥국사는 여느 절과 달리 처마의 양끝에 용머리 장식이 있으며 지붕 기와 끝에도 궁중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잡상이 올려져 있는 바, 처음부터 왕실과 밀접한 사찰로 건립됐을 가능성이 크다. 

 

 

흥국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및 대웅보전 목조석가삼존불 안내문
기둥과 처마 사이 각 4곳에 용머리 공포를 두른 특색이 돋보이는 대웅보전 / 1793년(정조 17년) 최초의 중수 기록이 있으나 이후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17년 지어진 것이다.
대웅보전 처마 장식물
대웅보전 잡상
만월보전 잡상
대웅보전 목조석가삼존불 / 정확한 조성 시기를 알 수 없으나 1755년 조각된 양주 회암사 불상과 닮아 18세기 조각승 상정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웅보전 극락시왕도/ 작자를 알 수 없으나 수작(秀作)이다.
약사여래상이 모셔진 만월보전
화려한 공포의 육각 만월보전
흥선대원군이 주련을 쓴 영산전
주어 온 약사전 삼존불 / 강에 버려진 움직이지 않는 불상을 흥국사에 모시겠노라 하자 비로소 움직였다는 절설이 어려 있다.
영산전에 걸린 흥국사 만월보전 중수기
시왕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시왕전 앞 안내문
산신각인 단하각
단하각 옆 흥국사 삼층석탑
흥국사 대방
조선후기 양식인 대방은 염불 수행 공간과 누ㆍ승방ㆍ부엌 등의 부속 공간을 함께 갖추고 있는 복합 공간으로서의 특징을 지닌다.
H자 모양새의 대방은 서울 화계사, 흥천사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흥국사 대방 안내문
흥국사 일주문
흥국사에서 멀지 않은 덕릉계곡
점점 깊어지는 계곡
구멍 바위와 자연이 만든 계단 / 날씨가 흐리더니 결국 비가 와 멀리 폭포가 보이는 이곳 계단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비가 오고 나면 계곡이 더욱 장관일 것 같다. 내일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