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가 아브라함을 불러낸 진짜 이유(I)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들었다. 물론 교회에서였는데, 처음 교회에 나간 날 학생부 모임에서 학생부를 지도하던 어떤 대학생 형이 물은 말이었다. 그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없었는지 스스로 그 답을 했다. 그의 대답인즉 이랬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이전에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유무, 깊이의 정도를 떠나서 지금도 그 질문과 답은 고등학생에게는 어려운 주제였다고 생각되는데, 아무튼 내게 아브라함의 이름은 그렇게 새겨졌다. 그런데 그 교회라는 데는 왜 가게 되었을까? 지금은 그 신앙 공동체를 떠난 지 오래지만 아브라함에 관해 쓰려니 갑자기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재미 삼아 몇 줄 적어보겠다.
"저,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나요?"
당시 집안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 조금은 어두운 집 앞 골목길에서 웬 여고생 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평소 없던 일을 당했던지라 그 여학생들의 얼굴을 놀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중 한 여학생이 배시시 웃으며 제 친구를 향해 말했다. "어머. 놀랬나봐?"
그러자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여학생이 자신들은 XX교회 학생부 소속이라며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는 이후 청산유수로 나를 가로막은 이유를 읊어댔는데, 정말이지 그토록 말 잘하는 사람은 지금껏 별로 겪은 적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 여학생의 말은 별로 기억에 담긴 것이 없고,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는 건 그 옆에서 시종 배시시 웃던 다른 여학생의 얼굴이다. 당시 초콜릿 선전을 하던 이미연, 채시라의 미소가 그만큼 이뻤을까....?
아무튼 나는 그렇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학생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지만,(굳이 활동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 여학생에게 다가가는 건 끝까지 넘사벽이었다. 그녀는 늘 많은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었으니, 그자들을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가는 건 큰 전투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전투력은 예전도 지금도 없었던 바, 훗날 읽은 이문열의 소설 <들소>에서 '산나리'를 바라보는 '소에게 밟힌 자'의 심정이 그러했으리라 새삼 공감했을 뿐이다.
'어찌 됐든 하나님의 소명(召命)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좋은 목회자가 되었다'가 도식적인 기승전결이 될 터,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좋은 목회자가 될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기독교의 반동분자(이 표현 오랜만이다 ^^)가 되었으며 나름대로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분쇄하려 노력하고 있다.(이 블로그 역시 그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일을 언급하면, 그 시절(고등학교 때) 담배를 배운 일이다. 당시는 지금보다 기독교가 훨씬 성세(成勢)였던지라 교회에 꼭 '바른생활을 하는 교회오빠'들만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중 나는 조금 껄렁대는 (하지만 천성은 착했고 오히려 위선적이지 않던) 친구들과 어울렸고 걔들에게 담배를 배웠는데 그것을 끊는 데 수십년이 걸렸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나 역시 힘들게 담배를 끊었으니, 비법(?)을 공개하자면 단번에 끊는 단연법(斷煙法)이 아닌 서서히 줄이는 감연법(減煙法)을 썼다.
~ 모두들 단번에 끊으라고 하지만 금단증상과의 전쟁에서 대부분 패한다. 경험상 그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천천히 기간을 정해 조금씩 개피 수를 줄이는 방법을 채택하심이 어떨는지....? 매일매일 줄여가는 쾌감도 있고 그럴 경우 성취도를 높이는데, 하루하루 해냈다는 그것이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요령은 시간배분이 중요하다. 만일 하루 다섯 개피라 한다면 식후 3대를 소비하고, 스트레스 가장 심할 때 한 대씩, 이런 식으로..... 뭐니 뭐니 해도 감연법의 가장 큰 장점은 강박과 금단현상이 적다는 것! (*나의 경우는 흡연욕구보다도 혓바닥 당김이 더 힘들었는데 감연법으로 극복했음)
~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이 글을 보시는 분 중 흡연자가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 끊어보시길! 우리 때는 그래도 흡연에 관대했고(아버지 대처럼 집집마다 안방에 재떨이가 있던 시절은 아니더라도) 흡연자가 주류이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흡연자가 비주류이니 흡연권은 어쩔 수 없이 밀릴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담배 끊는 놈을 독한 놈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여태껏 담배 피우는 자를 독한 사람이라고들 하는 세상이 됐다. (*의지를 가지고 감연하다 보면 거짓말이 아니라 어느 순간 정말 안 피우게 됩니다. 물론 의지는 수반돼야 합니다)
사설이 길었지만 한마디만 더 하고 가겠다. 과거 EPL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던 압디살람 이브라힘이라는 선수에 관한 이야기다. 유럽 축구가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 스페인의 유명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가 영어 발음을 좇아 줄곧 리얼 마드리드라고 불렸듯, 압디살람 이브라힘도 한동안 압디살람 아브라함으로 불렸다. 아마도 처음에 받아본 중계 아나운서의 EPL 자료에 그렇게 표기된 듯하였다.
어디선가 정정 요구가 있었는지 그의 이름은 얼마 후 압디살람 이브라힘으로 바로 잡혔다. 하지만 그리 큰 잘못은 아니니 아브라함이나 이브라힘은 같은 말이다.(자음만을 표기하고 모음은 알아서 읽는 아랍어 표기법이 빚은 관행이다) 압디살람 이브라힘 이외도 이슬람 권에서는 이브라힘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이 많은데, 다름 아닌 성서의 아브라함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우리가 영어권에서 아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링컨 정도?
무슬림들이 이브라힘이란 이름을 즐겨 차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들의 이슬람 원리주의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그러하지만 실생활에서도 종교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래서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이브라힘이라는 이름이 흔한데 놀랍게도, 이사(عيسى), 즉 예수라는 이름 또한 드물지 않다. 꾸란에서의 중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어권에서 지저스(Jesus, 예수)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헤수스(Jesús, 예수의 스페인어)란 이름은 또 흔하니 과거 박종팔, 유명우 선수와 싸웠던 중남미 권투 선수들의 이름도 헤수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어, 불어, 독어권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으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말한 대로 흔하다. 포르투갈어로는 제수스(Jesus)인데 역시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었던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의 가브리에우 제수스(Gabriel Fernando de Jesus)가 기억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남미에서 그 이름이 흔한 이유는 '특별히 금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그리스도를 업은 사람’이란 뜻의 크리스토퍼(Christopher)란 이름은 각 언어권을 뛰어넘어 고루 쓰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있겠다. 참고로 말하자면 콜럼부스의 국적은 도시 국가 제노아로, 요즘 국적으로 하면 이탈리아 사람이다.
글이 쓰기 싫은가, 오늘은 자꾸 이야기가 샌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바벨탑 스토리 다음에 이어진다. 까닭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북쪽 아르메니아 산지에서 시날 땅, 즉 메소포타미아 평원으로 이주한 이주자의 후손임을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선조들은 가장 남쪽인 우르 땅에 자리 잡았다. 역사를 빌어 추론하자면, 그들의 선조는 '기후의 변화와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으로 인해 기원전 6000년경 그곳을 떠나 기원전 5850년경 메소포타미아 우르에 정착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 당시 같은 이유로 생겨났던 수메르인의 민족 대이동 때 셈족인 그들도 수메르인을 따라 남하했던 것이었다.(☜ '수메르, 그 문명의 새벽을 돌아보다-고대의 민족 대이동')
이후 그들 셈의 후예들은 수메르인들과 함께 (아니 어쩌면 수메르인들을 리드하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문명의 새벽을 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선조들이 기원전 7000∼6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터키 아르메니아 남부로부터 북 이라크 자그로스 산록 일대까지)에 정주해 살며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생활을 영위했던 것은 분명하나 그들이 살던 곳이 자르모(Jarmo), 하수나(Hassuna), 사마라(Samarra) 중의 어느 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중 한 곳이었음은 분명하니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선진기술과 함께 시날 땅(메소포타미아)으로 남하해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북쪽의 셈인과 수메르인이 살았던 자르모, 하수나, 사마라는 그 지명이 그대로 후기 신석기 문명의 이름이 되는데, 그중 가장 큰 집단인 북 이라크 사마라를 대표로 들어 일반적으로 사마라 문화라고 통칭된다. 그 사마라 문화를 보유한 자들이 내려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충적토를 경작하였던 바, 새로운 문명의 탄생은 이제 필연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레너드 울리(☞ '아브라함이 만난 UFO와 가나안 이주의 진실 I')가 명명한 우바이드 문명이다.
~ 우바이드 문화라는 명칭은 1920년 경 영국의 홀(H.R. Hall)과 레너드 울리가 우르 서쪽 '텔 엘 우바이드'에서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며 붙여진 것으로,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 시대의 문명이었다. 이때 발견한 것들은 우바이드기(期)의 표준 유물과 유적이 된다.
그 안정된 생산 위에서 그들은 가지고 내려온 선진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문명을 아낌없이 탄생시키니 이것이 바로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이라 불리는 수메르 문명이었다. 그 빛은 농경, 관개(灌漑), 법률, 건축, 음악, 수학, 문학, 제련술, 천문학 등 실로 미치는 않은 곳이 없었다.(후세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어느 날 갑자기 도깨비처럼 출현한 '완벽한 거짓말' 같은 문명이었지만, 따지고 보자면 아담 이후로부터 이어진 외계 선진문명의 반영이라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중에서도 수메르어(語)에서는 운하, 제방, 관개, 저수지 등 치수(治水)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발견된다. 다시금 말하지만 수메르인들은 북부지방에서 이미 충분한 농업 기술을 습득하고 내려온 자들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수메르 지역 가운데서도 우루크와 함께 가장 기름진 땅인 우르(Ur)를 차지했던 점을 미루어, 창세기 11장에 길게 나열돼 있는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매우 일찍 남하를 하였고, 더불어 선진 문화를 시날 땅에 입식(入植)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까닭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수메르 문명 창달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을 터, 아브라함의 집이 우르의 중심인 지구라트 곁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상은 내가 '아브라함이 만난 UFO와 가나안 이주의 진실 I'에서 질문한 아브라함 집이 지구라트 곁에 있는 이유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해본 것이다.(하지만 그들이 정확한 위치를 지적해 말한 점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다. 이렇다 할 유물이 나온 것도 아니고.....)
우르 다운타운 상상도
유프라테스 수량 풍부한 강이 감아 도는 천혜의 땅 우르 시는 모든 면에 풍족했고, 그 풍요함은 시민들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셈의 아버지 노아가 먹고 뻗은) 와인이 주류였던 북쪽 지방과 달리 맥주의 식음이 대중화됐던 남방사회였던 바, 이주해온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맥주가 개발되었는데, 오늘날의 발효방식과 같은 호프맥주와 흑맥주 등 총 16종의 맥주가 생산되었으며 그것들을 파는 가게들 또한 오늘날의 치맥 집만큼이나 많았다. 그 술집 골목에서 구슬피 들려오는 아래 상심(傷心)의 연시(戀詩)가 아니라면 지상 낙원이 따로 없을 듯싶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생겨났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여호와라는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1-2)
왜 그랬을까? 그야말로 수천 년 동안 침묵하던 여호와는 왜 갑자기 나타나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린 것일까? 다음 회에 그에 대해서 집중 분석을 해볼까 하는데, 먼저 힌트를 드리자면 위 연시(戀詩) 속에 그 답이 있다. 조금 더 힌트를 드리자면 우르 난나 여신 신전은 거의 공창(公唱)과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여사제들은 신전에 공물을 바친 남자와 섹스를 할 의무가 있었다. 난나의 다른 이름인 이쉬타르 자체가 아래의 설명처럼 미의 여신이자 섹스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이자 정치적인 힘을 상징했다.
게다가 이쉬타르는 봄에 죽음에서 부활하는 다산(多産)의 여신이었던 바, 위의 연시도 단순한 섹스와 쾌락보다는 농경사회인 수메르의 풍요와 다산을 보장하는 신성한 행위에의 요구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호와가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가게 만든 것은 이와 같은 병리현상이나 모랄과는 별 상관없는 순혈(純血)에의 보호 의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