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소의문)을 찾아서
소서문이란 명칭은 한양 도성의 다른 소문들(동소문, 남소문, 북소문)과 달리 귀에 짝 달라붙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명칭이라는 뜻이니 지금도 서소문동, 서소문아파트, 서소문역사공원, 서울시청 소서문청사 등의 이름을 쉬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서문은 다른 소문들과 달리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앞서 말한 서대문(돈의문)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주변 성곽과 함께 철거된 것인데,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서대문과 달리 소서문은 정확한 위치마저 불분명하다.
소서문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 도성을 축성할 때 다른 문들과 함께 완공되었는데,(태조 5년) 그때도 서소문이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린 듯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는 기록이 보인다.(<태조실록>) 그리고 이에 의해 그 본래 명칭이 소덕문임을 알 수 있는데,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 24년 문루를 건축한 뒤 이름을 소의문(昭義門)로 바꾸었다. 즉 소의문의 명칭은 1744년, 문루의 건설과 함께 생긴 것이며, 그 전에는 문만 있고 문루가 없었음 또한 알 수 있다.
~ 아직도 일부 백과사전에는 소덕문의 명칭 변경이 '예종 비(妃) 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의 시호(휘인소덕장순왕후, 徽仁昭德章順王后)에 들어가는 글자를 피휘하기 위해서'라는 일설(一說)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성종실록>에서는 이에 관한 일언반구도 없으며, 또한 위 <영조실록>의 기록이 명확한 바, 장순왕후에 관련된 썰은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되겠다.
앞서 말한 광희문처럼 서소문도 성 내에서 죽은 자의 운구 통로로 이용되었다. 말하자면 도성의 동쪽에서 죽은 자는 광희문으로, 서쪽에서 죽은 자는 소의문으로 나온 것이었으니 1886년 7월 5일 육영학원의 교사로 조선에 온 호머 헐버트는 비망록에, '아침에 숙소 가까이에 있는 소의문이 열리면 매일 300~400명의 시체들이 들려 나왔다'며 당시 창궐하던 콜레라의 무시무시한 현황을 적었다.
그렇다고 죽은 자의 통로로만 이용되지는 않았으니 이 문을 드나드는 자는 당연히 산 자가 많았고, 주요 궁궐로의 첩경인지라 남대문보다 더 많은 통행량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 중앙일보 사옥 인근 AIA 타워 앞에 있는 순청 터 표석으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순라꾼들의 본부가 있어 야간순찰을 하며 도둑과 월장(越牆)하는 자 등을 살폈다. '월야밀회(月夜密會)'라고 이름 붙여진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순라꾼들은 야밤에 다닐 수 있는 특권을 이용해 딴짓을 한 것도 같다.
서소문은 1914년 일제의 도로 확장 계획에 따라 주변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물론 표석은 중앙일보 사옥 주차장 아래 설치돼 있으나 이것으로는 도무지 서소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다행히도 대한상공회의소 옆 도로변으로 남대문 쪽 성벽이 복원되어 과거의 서소문 자리를 더듬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즉 정동 이화여고 교정에 남아 있는 서대문 남쪽 성벽 흔적과 상공회의소 빌딩 옆 도로변에 복원된 남대문 북쪽 성벽을 구글 스카이맵에 대입시켜 연결하여 소서문로와 교차하는 지점을 찾으면 그곳이 곧 서소문이 될 터이다. 그렇게 찾은 곳이 아래 장소인데, 그중 맨 밑에 있는 택시 사진의 장소가 가장 정확한 서소문 위치로 여겨진다.
이 서소문을 나서면 용산강 백사장 새남터와 더불어 구한말 서학쟁이 ·천주쟁이들을 참살하는 장소로 쓰인 '서소문 밖 형장'이 나온다. 그래서 그 현장 앞 고개인 중림동 약현에는 한양 최초의 예배당인 약현성당이 세워졌고,(1892년) 근자에는 이곳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를 기리는 서소문역사공원과 성지 역사박물관이 조성됐다. 하지만 그로 인한 민원이 만만치 않으니, 요지인즉 이 장소가 어찌 특정 종교의 전유 공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011년 시작된 서소문역사공원과 성지 역사박물관 조성에는 국비 시비 구비를 망라하는 총 596억 원이라는 엄청난 사업비가 투여되었으나 결과는 오로지 천주교 순교성지가 된 까닭이었다. 이에 다른 단체에서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으니, 서소문역사공원바로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란 단체에서는 현양탑의 철거와 그것을 세우며 철거된 윤관 장군 동상을 되돌려 놓을 것을 요구했다. 윤관 장군은 여진정벌의 공로 외에도 남경(현 서울) 조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 이곳에 동상을 세웠거늘 그와 같은 역사성을 무시하고 왜 네 멋대로 철거했냐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단체협의회는 이보다 더 성토했으니, 이곳은 김개남 성재식 이필제 안교선 최재호 안승관 김내현 등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참형을 당하거나 효수된 곳인데 이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고 오직 천주교 관련 시설과 기념물 일색인즉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도 그러하니, 이곳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학교도 역시 상당수 이곳을 거쳐갔고, 전주감영에서 잘려 올라온 김개남의 목은 서소문 네거리에서 사흘 동안이나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