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 -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

기백김 2022. 1. 30. 13:49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은 구한말의 관료로서 대한제국이 일제에 합병되는 19010년 경술국치 때 이에 앞장선 이른바 경술8적의 한 사람이다. 그의 혁혁한(?) 공로를 앞서 '대한제국 최후의 날(III) - 마지막 어전회의와 통감부 합병 비화'에서 언급한 바 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아래의 조칙에 어보(御寶)를 눌렀다. 국가의 주권을 일본제국의 황제에게 넘길 것이니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일 합병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서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위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민생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여 대일본제국 통감 데라우치와 회동하여 상의 협정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은 짐이 뜻을 세운 바를 체득하여 봉행토록 하라.
 
순종은 일제를 무서워해 매사에 끽소리 못하고 하자는 대로 따른 위인이었다. 따라서 합병의 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는 소리를 하기가 차마 낯 뜨겁다. 다만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후가 되시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다. 당 16세의 어린 황후께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들고 있다가 위임장에의 날인을 막고자 치마 속에 어보를 감추었던 것이다. 신하들은 어보가 황후의 치마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그 틈에 황후는 대조전 뜰로 냅다 뛰어 달아났다. 

 
좌중에서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큰아버지 시종원경(侍從院卿) 윤덕영이 유일했다.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 윤덕영은 황후의 치마 속에 손을 넣어 강제로 어보를 빼앗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들어 바쳤고, 이완용은 다시 그것을 순종에게 건네 위임장에 도장을 찍게 했다.(시종원은 황제의 의전과 건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시종원경은 시종원의 최고 책임자이다) 
 

위 사건이 일어난 장소 /오른쪽에 현판 건물이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흥복헌이고 가운데 건물이 내전인 대조전이다.
야무진 생김새의 순정효황후(1894-1966) 사진
생긴 것도 얄미운 윤덕영
유명한 윤덕영의 벽수산장 / 1951년 사진이다.

 
윤덕영은 이 일로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 5만원, 공채증권 46만원(현 시세 110억)을 받았으며 1940년 죽을 때까지 내내 요직을 섭렵한다. 윤덕영은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 조선시대의 양반가 서촌(西村)에 끌려 경복궁 옆 옥인동으로 이사를 오는데, 당시 그가 매입한 땅이 19,467평으로 축구장 8개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옥인동 전체 땅의 53.5% / 이완용도 1913년 옥인동 19번지 일대의 땅을 구입해 이사를 오지만 부지는 윤덕영의 땅보다 작았다)
 
이 거대한 터를 사들이고 저택을 지은 비용은 윤덕영이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총독부로부터 받은 46만원의 공채증권에서 주로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지은 집이다. 윤덕영은 순종의 둘째 부인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이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 때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옥새를 빼앗았으며,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로 꼽히기도 한다. 일제 때 가장 악질적인 친일반역자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 21>)
 
 

옥인동 46번지에 있던 윤덕영의 땅은 옥인동 19번지 이완용의 땅보다 훨씬 넓었다.

 
서촌은 조선말의 세도가 장동김씨들이 모여 살았고, 이른바 위항문학(委巷文學, 조선 중·후기 서울 중인층이 이끌던 문학 운동)의 거두였던 시인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의 집 '송석원(松石園)'이 있던 곳이다. 천수경은 서촌을 흐르는 옥류천변 소나무와 바위 울창한 곳에 집을 짓고 이곳을 '송석원'이라 했는데, 훗날 추사 김정희가 와서 글씨를 남길 정도로 이름 높던 장소였다. 윤덕영은 바로 그곳을 차지해 집을 지었으니 이곳이 그 유명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다. 
 
 

단원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 (부분) / 당대 최고 화가였던 김홍도가 정조15년(1791) 유둣날 저녁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 모인 위항문학가들을 그렸다.
추사 김정희의 '송석원' 글씨 / 이 각자는 한국전쟁 후 옥인동에 주택이 밀집되며 사라졌고 지금은 인근에 서울시에서 세운 표석만 있다.
제 집 마당에 앉은 윤덕영 / '벽수산장' 각자 옆으로 김정희의 '송석원' 글씨가 보인다.(화살표) 이 바위는 난개발의 와중에 깨졌을 것이라고도 하고 옥인동 주택가 어디쯤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도 한다.
흡사 유럽 궁전과 같은 벽수산장의 위용 / '벽수'는 윤덕영의 호(號)임.
1956년 영화 '서울의 휴일'(감독 이용민) 속의 벽수산장 / 사진 속 여성은 여주인공 남희원 역할을 맡은 영화배우 양미희.
홍만자회 임대 당시의 벽수산장 / 깃발은 나찌 문양이 아니라 만(卍)자 표식임.
'한양 아방궁'으로 불리기도 했던 벽수산장 / 1926년 5월 24일자 조선일보

 
벽수산장은 프랑스 공사를 지낸 민영찬이 가지고 있던 유럽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1913년부터 1917년까지 3년 반의 공사 끝에 완공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건평 795평의 프랑스식 건물이었다. 건축자재 역시 수입하여 사용했으나 수급이 원할하지 못해 내부 인테리어까지는 채 끝내지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아니면 주변의 눈이 무서워인지 본인은 정작 이 집에 입주하지 못하고 뒤쪽에 지은 한옥에 거주했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여론이 엄청나게 나빴다)
 
윤덕영은 이 건물을 중국 종교 단체인 홍만자회(紅卍字會) 조선지부에 임대했는데, 1940년 그가 죽은 후 일본 미쓰이광산주식회사에 건물과 부지 일체가 매각되었다. 그러다 해방 후에는 덕수병원 건물로, 한국전쟁 중에는 미8군 장교 숙소로 사용되다 전쟁 후에는 한국 원조단체인 언커크(UNCURK, 한국통일부흥위원단) 건물로 쓰였다. 그러다 1966년 4월 5일 지붕 수리 중 화재가 났고, 1973년 6월 일대에 도로정비와 함께 주택이 들어서며 건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벽수산장 화재 기사 / 1966년 4월 5일자 동아일보

 
앞서 말한 대로 윤덕영의 재산은 엄청났으니 후손들이야 아직도 호의호식히며 살겠지만 그의 자취는 남은 게 거의 없다. 위의 벽수산장이 있던 옥인동은 현재 주택이 가득 들어차 흔적이라고는 겨우 그의 집 정문 기둥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그의 호화별장 '강루정'(降樓亭)이 있었다는 구리시 교문동에서는 당시의 연못이었다는 곡수정(曲水井)만을 볼 수 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곡수정은 구리세무서 뒤 야산에 위치한 <바람이 분다>라는 카페 정원에 있는데, 눈을 씻고 보면 주변 주택가와 야산에서 당대의 석물 몇 개를 찾을 수 있다)
 
 

옥인동 벽수산장 정문 기둥
옥인동 벽수산장 정문과 벽돌 아치 흔적 (화살표)
벽수산장 정문 옆 벽돌 아치
다리가 있던 곳 / 대문을 지나 오르막이 시작되는 이곳에 벽수산장으로 가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양 옆의 노란 페인트 칠해진 부분 만큼으로 긴 맨홀 뚜껑이 천(川) 위임을 말해준다.
벽수산장이 있던 곳 / 옥인공영주차장 가기 전 도로에 벽수산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신 얄궂게도 I편에서 말한 남산 한옥마을에 그의 첩이 살던 한옥집이 복원돼 있다. 이 집 역시 옥인동 벽수산장 내에 있었다 하는데, 벽수산장의 대지가 어마아마했던지라 첩도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던 것 같다. 이 집은 처음에는 순정효황후(위에서 언급한 그분)의 친가(親家) 건물이라고 설명되었으나 나중에 윤덕영의 첩이 살던 가옥임을 밝혔다.
 
한눈으로 보아도 잘 지어진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옛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복원이라 하기보다는 재현이라 함이 옳을 것 같다. 옥인동에서 옛 건물을 해체해 오긴 했으되 부재가 너무 낡아 옛 모습 대로 새로 지은 까닭이다. 대신 원래의 모습에 충실히 재현되었다고 하는데, 그 말은 틀림이 없을 듯하다. 이 집을 들어서면 건축에 대한 문외한이라도 "집을 왜 이렇게 지었지? 답답하게."라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니 떳떳지 못함에 스스로 폐쇄적인 가옥 구조를 지향한 탓이리라. 
 
아래 <한겨레 21>에 실린 '옥인동 윤덕영의 집 지도'에서 가운데 소실댁으로 표시된 장소가 원래 이 가옥이 있던 곳이다. 괄호 안에 '윤덕영 소실 이성녀 한옥 별채 남아 있음'이라고 쓰여 있어 윤덕영 첩의 이름이 이성녀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한겨레 21>의 기사는 친일파 윤덕영의 소실댁 처리 문제를 놓고 고심하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이 남산골 한옥마을에 '옥인동 윤씨가옥'으로 재현된 것이다. 
 
 

《한겨레 21》에 실린 지도
밖에서 본 소실댁 / 언뜻 지나치기 쉬운 개흘레는 안에서 벽장으로 쓰게 만든 공간의 외부 돌출 부분이다. 대부분의 주택은 개흘레가 흰 판벽으로 처리되나 이 집은 촘촘한 격자무늬 문살 장식을 넣었다. 이 집에 투자된 공력이 옅보이는 부분이다.
안에서 본 소실댁 / 보다시피 ㅁ자의 폐쇄적 구조이지만 익공(翼工)의 기둥머리 장식 등, 전체적으로는 고급 주택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안내문
최근 소실댁을 한번 더 살펴봤다. /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외국 관광객들과 조우함.
소실댁의 또 다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