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의 무덤 사릉과 임시 개방된 소나무 숲속의 무덤들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는 여산 송씨 송현수의 딸로 1454년(단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순왕후는 당시 열 다섯 살로 단종보다 한 살 위였는데, 야무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 같은 데서도 야물딱지게 나와 수양대군이 오히려 쩔쩔매는 장면이 그려지곤 한다. 실제로도 왠지 그러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양대군을 위시한 한명회 · 권람 · 신숙주 · 홍윤성 · 양정 등의 기라성 같은 문무 책사들의 음모인 계유정난을 극복해 낼 수는 없었을 터, 혼인한 지 이듬해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그리고 3년 뒤,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며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갔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으로 격하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가는 남편과 헤어진 장소가 청계천 영도교(永渡橋)로,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 두 사람이 함께 한 마지막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이 다리의 당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단종과 정순왕후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한 곳이라고 해 훗날 '영영 건넌 다리'라는 의미의 영도교가 되었다.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은 1457년 11월 결국 교살되었고, 정순왕후는 동대문밖 청룡사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단종 사후 64년을 홀로 지내다 1521년(중종 16) 6월, 82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곳에 훗날 궁중에서 나온 궁녀들이 모여 살며 불공을 드렸다는 사찰 정업원(淨業院)이 생겨났는데, 1771년 정순왕후가 살던 곳을 기려 "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淚書(정업원구기 신묘년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고 새긴 영조대왕의 어필 비석을 세웠다. (☞ '단종애사 사릉 소나무')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삶에 대해서는 이미 '전설 따라 삼백만리/ 단종애사 사릉 소나무'에서 읊은 바 있어 새삼 부언할 것은 없지만, 정순왕후가 동네 뒷산에 올라 동쪽 영월 땅을 바라보며 슬퍼했다는 동망봉(東望峰)을 보문동에서도 발견해 부기한다. 그는 단종 사후 서인(庶人)이 되었지만 세조가 노비로 사역하지 못하게 했다 하는데, 인터넷 백과에 쓰여 있는, 신숙주가 노산군(단종)의 아내를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만일 사실이라면 신숙주 그 새끼는 사람도 아님!)
숙종 때에 단종이 왕으로 신분이 회복되자 부인도 왕비의 신분을 회복했고, 시호를 정순왕후라 정한 후 종묘에 신주가 모셔졌다. 그가 묻힌 남양주시 진건읍의 무덤도 사릉(思陵)으로 승격됐다.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한 점을 기려 생각 사(思) 자의 사릉이 된 것이다. 하지만 따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을 조성하지는 않았고 다만 봉분을 크게 키우고 상설 몇 개와 곡장을 설치하는 정도로 꾸몄다.
남양주시 진건읍에 정순왕후의 무덤이 마련된 이유는 남편인 단종과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던 까닭에 시누이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아들인 외조카 정미수를 시양자(侍養子)로 두었던 데 연유한다. 이런 연유로서 사후 해주정씨 선산인 지금의 사릉에 묻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사릉 주변으로는 해주정씨 가문의 개인 묘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한시적으로 개방된 사릉 뒷길 소나무 숲속에서 발견한 수양아들 정미수(1456~1512)의 묘와, 해주정씨 정효준(1577~1665)의 묘, 진산군부인 류씨(1506~1532)의 묘소 터 등을 실어본다. 따로 울타리를 두르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가지는 못하게 하는 듯해 굳이 내려가 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