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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종애사 사릉 소나무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10. 20. 07:31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결국은 목숨까지 빼앗긴 이른바 단종애사는 널리 알려진 사실임에도 지금도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사실 조선 역사에서 이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드물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린 이유는 그 자신이 야심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단종의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문종은 부인들의 엽기 행각에 질려서인지 현덕왕후(단종의 모) 사후 새로 부인을 맞지 않았다. (☜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문종 부인 레즈비언 썰은 사실일까?'

     

     

    1956년 영화 '단종애사' / 배우 엄앵란의 데뷰작으로 단종 비 정순왕후 역을 맡았다.
    위 '단종애사'의 포스터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의 캐릭터를 잘 살린 이정재
    잘 만든 영화 '관상' / 벌써 10년이 돼가지만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대사는 지금도 회자된다.

     

    그래서 문종은 부인이 없던 조선의 유일한 왕이었다. 차라리 계비라도 들여 단종의 계모가 존재했다면 수양대군은 감히 쿠데타를 꿈꾸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할머니 소헌왕후(세종의 비)가 생존했더라면 아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종은 친엄마도 양엄마도 할머니도 모두 없었고 게다가 겨우 10살이었다. 야심가 수양대군이 침을 흘릴 법한 상황인데, 여기에 한명회와 같은 모사꾼들이 신장된 신권(臣權)을 대신하는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찬탈을 부추기고 나선 것이었다.

     

     

    단종의 가계도 / 홀로된 단종 곁에는 수양대군을 비롯한 숙부들만 득실댄다.

     

    역대의 <단종애사>를 쓴 작가들은 모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대결구도를 채택했다. 그 두 사람은 한 살 터울의 형제들로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는데,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와 권람은 안평대군의 책사인 이현로를 능가하였던 바, 결국 수양대군은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일당을 처단하고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이것이 1453년(단종 1) 10월 10일에 일어난 이른바 계유정난이다. 

     

    이상은 모두 사실 같으나 이중 맞는 것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한 살 터울의 형제라는 것밖에 없다. 그 나머지는 모두 수양대군의 권력욕에서 빚어진 일이며, 수양과 안평의 갈등을 조장해 흥미를 돋운 작가들의 펜 끝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이다. 실록에서 안평이 권력을 잡으려 애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아니다.(아래 내용) 하지만 <단종실록>은 세조 때 편찬된 승자의 기록이니 전부를 믿기 힘들고, 또 전부를 믿는다 해도 아래의 내용 외 다른 것은 없다. 그것이 이광수를 비롯한 작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던 셈이다. 

     

    "(안평대군) 이용은 시문과 서화를 좋아하고 소예(小藝)에 능한 것이 많았으며 세종조 때부터 권세 있는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간사한 소인들이 이에 아부하였는데 이현로가 으뜸이었다. 무릇 문사(文士)로 유명한 자를 모두 불러 들여서 서로 사귐을 맺고 선물을 주니, 사람들이 모두 이용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황보인·김종서 등이 정사를 천단(擅斷)하게 되니 이용이 이를 인연하여 뇌물을 주고 바라지 못할 것을 엿보고 있는데, 이현로가 술수(術數)로써 요사한 말을 꾸며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공공연하게 꾀를 쓰니, 유식한 자는 분해서 이를 갈지[切齒] 않는 자가 없었다."  <단종실록 3권>

     

    이후 김종서, 황보인 등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의 청에 의해 관작이 회복되고, 안평대군 역시 김재로, 조상건 등의 청에 의해 복권되는데, 이때 김재로가 한 말은 "안평대군은 다만 글을 잘하여 이름이 높았고, 따르는 선비들을 모아 연회를 즐긴 것이 화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었고, 부수찬 조상건은 "황보인·김종서 두 신하의 죄는 이용(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을 명분 삼았으니, 이제 만약 두 신하의 일을 억울하다고 여긴다면 이용도 마땅히 두 신하와 다름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다.

     

    단종은 이미 전 임금인 숙종대왕 때 복권되었고, 단종의 부인 송씨 역시 정순왕후로 복위되어(1698년/ 숙종 24) 묘소가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되었다. 이것이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산 65-1에 위치한 사릉(思陵)인데, 억울하게 죽은 남편 단종을 평생 사모하였다 하여 사릉이라 이름 지어졌다. 정순왕후 송씨는 1454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457년(세조 3)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될 때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동대문 밖의 비구니 사찰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정업원 뒷산(동망봉)에 올라 동쪽 영월 땅을 바라보며 한 많은 세월을 보내다 1521년(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떴다.

     

    영월 장릉에 묻힌 단종과, 사릉의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인지라 그저 사릉의 소나무 한 그루를 정령송(精靈松)이라 이름 붙여  장릉으로 옮겨 심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1999년 4월) 정순왕후의 님 향한 일편단심 때문인지 사릉의 소나무는 모두 동쪽으로 향해 있다는 말이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런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입구의 소나무만 그러할 뿐, 대부분의 소나무는 직립해 있다. 능 안에는 궁궐과 능에 필요한 소나무를 기르는 솔숲이 조성돼 있는데 그 숲길이 매년 이맘때 한시적으로 개방된다. 올해는 10월 1일~11월 30일이다. 

     

     
    청계천 영도교 /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갈 때 정순왕후와 이곳에서 이별한 까닭에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리다가 성종 때 다리를 보수하면서 한자명으로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다.
    숭인 근린공원 정순왕후 기념처 안내문
    비구니 절 정업원 자리에 세워진 청룡사 / 두 사람이 마지막 하룻밤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숭인 근린공원의 동망봉 동망각

    동망각에서 바라본 동쪽 밤하늘
    동망봉 표석 / 영조 47년(1771)에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자를 써서 이곳에 있는 바위에 새겼으나 일제시대 채석장이 되며 깨져 사라졌다.
    정업원 옛 터 비각 /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前峰後巖於千萬年)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에는 '정업원구기 신묘년(영조 47)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淚書)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모두 영조대왕의 어필이다.
    자주동샘(紫芝洞泉)을 볼 수 있는 비우당(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초당) 뒷담 / 자주동샘은 정순왕후가 의류 염색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는 샘물이나 코로나 사태 이후 출입을 막아놓았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자주동샘 사진
    동쪽으로 향한 사릉 입구 소나무
    사릉 표석
    사릉 솔숲
    사릉 / 복위 후 왕릉으로 승격되었으나 당시의 가뭄과 기근으로 병풍석 난간석 등이 없이 조졸하게 조성됐다. 상설도 문무인석 한 쌍, 석양 석호 1쌍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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