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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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에서 세상 떠난 이재명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4. 11. 25. 22:02
앞서 원태우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양 석수동 현장을 찾아보았다. 언급한 대로 이 일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를 처단하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그런데 안중근에 앞서 이토를 처단하려는 또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던 바, 그가 바로 이재명이다.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날(1910년 9월 30일) 는 '교수대에서 세상 떠난 이재명'이라는 제목으로 아래 사진과 함께 그의 의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실었다. 하지만 이재명 의사가 처형을 당한 것은 이토를 단죄하려는 사건 때문이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기 때문으로, 이에 관한 내용을 당시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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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이등박문을 저격한 원태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4. 11. 24. 22:11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조약문에 서명 날인함으로써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해서는 앞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과 고종'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당시의 분위기만을 다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17일 밤 8시, 덕수궁 중명전에 는 참정대신 한규설 · 외부대신 박제순 · 내부대신 이지용 · 법부대신 이하영 · 학부대신 이완용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 군부대신 이근택 ·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대한제국의 대표로, 일본국 전권특사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일본국의 대표로 마주 앉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제한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을사조약에 관한 협상을 하기 위함이었다. 협상은 자정을 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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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조명해본 윤봉길 의사 순국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2. 9. 20:55
오는 19일은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지 90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 무렵 고인이 느꼈을 고립무원의 절망감이 사무친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성공시킨 후 붙잡혀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5월 25일) 그곳 감옥에서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후 삼엄한 경비 속에 우편선 '타이요마루'에 실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로 옮겨졌고, 그곳 연병장에서 19일 총살되었다. 그 8개월 동안 외부인의 접견과 접근 또한 일체 불허되었으니, 그는 죽을 때까지 오직 일본군인들에게만 둘러 싸여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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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이 사형당한 이유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1. 4. 00:40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씨가 지난 10월 26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8년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빈소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현대사 비극의 1세대를 지나 2세대마저 저무는 것을 보며 더욱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분은 1991년 이후 부친 조봉암에 대한 사면 복권을 줄기차게 청원한 결과 20년 만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으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유족에게 24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던 바, 원 풀이는 하고 가신 셈이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한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이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던 그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더욱이 1심에서 불리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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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전투와 용산의 왜·명 강화비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6. 15. 23:31
16세기 후반 센고쿠(전국)시대라는 오랜 내전을 종식시켜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아 정복이라는 과대망상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로 만들어진 사무라이의 가타나(장도)가 잘 드는가 어쩐가를 시험하기 위해 목이 잘린 빈천한 자였다. 히데요시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쇼군)의 자리에 오른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자였으니 그와 같은 망상을 품을 법도 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명나라는 물론 인도 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총독에게도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고했다. 조속히 항복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 정복해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였다. 조선에는 선조 24년(1591) 통신사 편에 보내온 서신을 통해 상호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치자고 했다. 이와 같은 공갈과 권유가 먹힐 리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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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쌍권총 김상옥 의사의 활약 루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2. 16. 04:48
지난 1월 22일은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지 99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 그날에 맞춰 그의 일생에 관한 글을 포스팅하고 싶었으나,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숨었던 행당동 사찰 및 일본 경찰과 1 : 1000의 총격전을 벌였던 효제동 현장을 찾는 일이 늦어져 날짜를 맞추지 못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그곳들을 찾게 되었던 바, 그간 찍은 사진, 수집한 자료들과 함께 글을 올린다. 김상옥 의사의 일생에 대해서는 그간 , 등에서도 다뤄 많이 알려져 있으나 약술(略述)하자면 다음과 같다. 1890년 서울 종로의 한 가정에서 4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난 김상옥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며 가계를 도와야 했다. 그는 14세 때, 당시 나이로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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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2차 침입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11. 01:16
1866년 9월 30일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물러나자 조정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이양선이 침입했을 때 싸울 생각은 않고 오히려 먹을 것을 전달해준 수령방백들을 처벌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에서부터 김포 부평 행주 양천을 거쳐 서강에 이를 때까지 정신 나간 지방관들로부터 소, 닭, 돼지, 계란, 청태, 백채 등을 전달받아 잘 처먹으며 진군하였던 바, 함선이 진입했을 때 강력 항의한 영종도 첨사 심영규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벌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며칠 후 이상의 처벌론은 모두 없던 소리가 되었으니, 물러간 줄 알았던 이양선이 10월14일 다시 강화도 해상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마당인지라 수령방백들을 처벌하고 어쩌고 할 짬이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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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1차 침입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10. 22:27
병인양요는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서양 오랑캐의 소요라는 뜻이다. 글자가 말해주듯 병인년의 외침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모양새가 달랐으니 양코쟁이 오랑캐의 등장은 5천년 역사에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오랫동안 외침을 겪어 나름대로 내성을 지닌 민족임에도 병인년 프랑스의 침범에는 쉽게 무너졌다. 과정을 보자면 프랑스군의 화력도 화력이었지만, 사령관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의 치밀한 계획도 한몫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년 프랑스의 침입은 그해 일어난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겉으로의 구실이었다. 흔히 병인박해로 불리는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조선인 신자 8,000명뿐 아니라 몰래 포교하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 9명도 붙잡혀 처형당했는데, 이때 펠릭스 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