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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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현장을 가다 / 명성황후가 시해된 정확한 장소는?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3. 8. 19. 23:54
1895년(을미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은 삼국간섭과 맥을 같이 한다. 삼국간섭은 문자 그대로 세 나라가 간섭한 일로서,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챙긴 요동반도를 러시아·프랑스·독일 세 나라가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게 만든 사건이다. 만주에 대해 침을 흘리던 러시아는 그 만주의 한 구석을 빼앗은 일본을 심히 못마땅히 여겼던 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그와 같은 요구를 들이댄 것이었다. 그 세 나라를 상대해 싸울 힘이 없었던 일본은 애써 얻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열이 받는 판에 조선의 실세 왕비 민왕후가 얼씨구나 하며 러시아의 편을 들었다. 일본이 러시아에게 꼼짝 못 하고 당하는 상황을 목도한 민왕후가 청나라에서 러시아로 재빨리 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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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환향녀가 몸을 씻은 홍제천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3. 8. 17. 00:19
흔히 이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말할작시면 서울 북쪽의 홍제천을 빼놓을 수 없다. 홍제천은 종로구 평창동 위의 북한산 문수봉·보현봉·형제봉에서 발원, 서대문구 홍제동·남가좌동·성산동 등을 거쳐 서강(마포쪽 한강)에 합류되는 총 8.52㎞의 하천이다. 평창동은 앞서 말했듯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외곽 방위를 맡았던 총융청(摠戎廳)의 창고 평창(平倉)에서 지명이 유래됐고, 언뜻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남가좌동의 가좌라는 이름은 천(川)에 가재가 많아 생긴 가재울이라는 지명이 한자로 음차된 것이다. 홍제천은 그만큼 맑고 깨끗한 강이었는데, 중간에 특별한 오염원이 없으니 당연한 깨끗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그 홍제천이 당연히 마포 서강까지 이르렀겠으나 지금은 홍제동 유진상가 앞에서 끝난다. 1970년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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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의 현장 서대문 천연정과 청수장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2. 20. 20:20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은 영조 17년(1741)에 세워진 천연정(天然亭)에서 유래되었다. 천연정은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서지(西池) 곁에 세워졌으며,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맑은 물에서 연꽃이 피어나니 천연스러워 꾸밈이 없도다(淸水出芙蓉, 天然去雕飾)」라는 시구에서 이름을 빌렸다고 한다. 서지에는 시구처럼 연꽃이 가득했으나(아래 사진) 일제시대에 메워져 죽첨(다케조에) 공립보통학교*가 되었고 지금은 금화초등학교가 위치한다. * 다케조에(竹添進一郞)는 구한말의 일본공사 이름이다. 서지는 태종 7년(1407) 돈의문 서북쪽에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한 누각 모화루(慕華褸)를 세울 때 만들어진 연못으로 흥인지문 밖의 동지(東池), 숭례문 밖의 남지(南池)와 같은 풍수 차원의 연못이었다. 서지는 동서 380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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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조명해본 윤봉길 의사 순국기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2. 9. 20:55
오는 19일은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지 90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 무렵 고인이 느꼈을 고립무원의 절망감이 사무친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성공시킨 후 붙잡혀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5월 25일) 그곳 감옥에서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후 삼엄한 경비 속에 우편선 '타이요마루'에 실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로 옮겨졌고, 그곳 연병장에서 19일 총살되었다. 그 8개월 동안 외부인의 접견과 접근 또한 일체 불허되었으니, 그는 죽을 때까지 오직 일본군인들에게만 둘러 싸여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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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이 사형당한 이유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1. 4. 00:40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씨가 지난 10월 26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8년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빈소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현대사 비극의 1세대를 지나 2세대마저 저무는 것을 보며 더욱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분은 1991년 이후 부친 조봉암에 대한 사면 복권을 줄기차게 청원한 결과 20년 만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으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유족에게 24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던 바, 원 풀이는 하고 가신 셈이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한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이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던 그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더욱이 1심에서 불리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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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붙잡혀간 동관왕묘(동묘)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0. 23. 01:21
구한말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에 밀린 구식군대에 대한 푸대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구식군대는 녹봉까지 밀렸고 겨우 받은 녹봉미에는 겨와 모래가 잔뜩 섞여 있었던 바, 훈련도감 군인들을 주축으로 한 폭동이 일어났다. 1882년 임오년 6월 5일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그것이다. 이 군란(軍亂)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다룬 적이 있기에 앞서의 포스팅 가운데 개중 축약된 '오욕의 땅 이태원과 임오군란'의 내용을 보충해 싣기로 하겠다. 1882년 임오년에 조선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한 해 전인 1881년 고종은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겠다며 별기군이라는 신식 부대를 창설했다. 훈련은 초빙된 일본인 교관이 맡았다. 그러자 훈련도감을 비롯한 과거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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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포 경성감옥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9. 16. 23:51
1909년 7월, 대한제국은 일본과 '대한제국 사법 및 감옥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 이른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작성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죄수 수형에 관한 업무가 일본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과 1906년 조선통감부 설치 이후 죄수 수형에 관한 업무는 이미 일제에 의해 운용되고 있었으니 1908년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가 설계한 경성감옥(京城監獄)이 건립되었다. (그해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감옥이 건립됐다) 이 감옥은 1907년 8월 인왕산 기슭 금계동에 부지 약 13,000㎡(3,934평), 수용능력 500명 정도의 규모로 준공되었으나,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 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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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금호문 사건과 송학선 의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8. 27. 05:45
1920년 9월 2일, 당 65세의 강우규 의사는 조선의 3대 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도를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입구 광장에서 저격했다. 저격 수단은 영국제 폭탄으로,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 만주에서 러시아 군인에게 직접 구입한 물건이었다. 그는 이날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관저로 향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힘껏 폭탄을 던졌으나 그 일행만을 살상시켰을 뿐 정작 사이토 총독을 죽이지는 못했다. 폭탄이 마차 뒷 부근에 떨어지는 바람에 혁대에 폭탄 파편이 박히는 선에서 끝나고 만 것이었다. (☞ '화보로 보는 서울역과 강우규 의사의 의거') 그로부터 5년 여가 지난 1926년 4월 28일, 이번에는 한 건장한 조선인 청년이 사이토를 노렸다. 장소는 서울 창덕궁 금호문 앞이었고 살상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