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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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거사 이규보의 인생과 요즘의 정치 판사들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3. 28. 23:22
의 저자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한 마디로 평하자면 호탕한 성품의 명문장가이다. 이것은 그가 지은 글로도 증명된다. 이를 테면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지었다는 시(詩) 속의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몸 자잘한 세상살이 따지느니 그저 편안히 살다 가련다生死猶未知 細事安足算 하는 마음 자세나 평소 구름과 물을 사랑했나니 전생에 혹시 승려였는지 모르겠도다 素習愛雲水 前身莫是僧 하는 평소의 언급이 그러하다. 그는 자신의 아호도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러하고 실은 권력에 아첨해 관로(官路)를 열어간 전형적인 해바리기성 관료라는 평도 적지 않은데, 아래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자면 그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이규보는 1168년에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 황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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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중국 원정에서 연전연승한 최영 장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돌아온 이성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26. 22:05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와 거란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은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관해 논한 위의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을 옮긴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이나, '이성계의 요동 정벌로 우리가 남만주의 주인이 되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회자되는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도 그런 아쉬움이 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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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남은 개성 현화사와 연복사의 흔적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3. 24. 21:37
고려 수도 개경의 현화사(玄化寺)와 연복사(演福寺)는 개성을 대표하는 사찰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큰 절이었다. 이중 현화사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 돌아가신 부모 명복을 빌기 위해 경기도 개성군 영북면 영추산 남쪽에 지은 사찰이다. 앞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고려왕조의 근친혼'에도 말했지만, 현종은 부모의 근친상간 +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인 데다 어미 아비가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보호막이 없이 성장했다. 그럼에도 그 부모를 그리워해 즉위 후 대찰 현화사를 완공했다. 현종은 성장과정도 기구했으니, 당시의 실권자인 천추태후(981~997)는 불륜상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제위에 올리고자 왕손인 현종을 북한산 신혈사(지금의 진관사)로 보낸 후 여러 번 암살을 시도했다. 현종은 다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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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에 관한 전설과 진실 - 의정부 회룡사와 서울 경교장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3. 22. 23:11
의정부(議政府)는 조선 개국 초에 설치한 행정부의 최고 기관으로 1400년 이방원이 기존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성립되었다. 목적은 왕권의 강화로서, 1405년(태종 5) 의정부 구성원을 삼정승을 비롯한 고위관료로 확정했는데, 오늘날의 국무회의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경기 북부의 의정부시는 위 의정부와 한자까지 같은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와 호원동 전좌(殿坐) 마을에 머물 때 의정부 대신들이 찾아와 국정을 논의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좌마을의 이름 역시 그래서 생겨났다. 호원동 회룡사 입구 사거리 부근에 있는 '태조·태종의 상봉지' 표석에는 그와 같은 설명이 담겨 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대로 태조 이성계는 5자(子) 이방원이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제 형·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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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장수 · 새우젓장수가 살았던 마포 염리동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3. 20. 22:01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염리동이 소금동네(鹽里)라는 의미임을 알았지만 소금과 관계된 무엇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동네에 과거 염창(鹽倉, 소금창고)이 있어 유래된 말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염전(鹽廛, 소금시장)이 있어 그렇게 불려졌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후자가 좀 더 정확한 말인 듯하다. 소금창고에서 유래된 보다 확실한 지명은 강서구 염창동일 것이다. 조선시대 서해에서 올라온 소금이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이동되는 루트에 만들어진 임시 관영소금창고가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유래된 곳이 염창동이다. 사상(私商)들은 따로 지금의 동막역 부근에 창고를 지어 서해에서 올라온 소금을 저장했는데, 그 소금들이 염리동 염전에서 거래됐다. 근자에 설치된 염전머릿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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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3. 17. 00:02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노원구 백사마을의 철거가 시작됐다기에 빗속에 서둘러 현장을 다녀왔다. 백사마을의 마지막 풍경을 담기 위해서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철거가 결정 나면 곧바로 움직여야지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면 공터나 공사판과 대면하게 된다. 다행히 비는 오후 들며 그쳤지만 되돌아온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백사마을은 노원구 중계본동에 있다. 노원구는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에 속했는데 그 노원면을 지금은 남양주시(별내동), 구리시(갈매동), 서울시(상계동·중계동·하계동·월계동·공릉동)의 3개 지방자치단체가 나누어 가진 형국이 됐다. 옛 경기도 땅을 2개 지방자치단체가 나누어 가진 경우는 흔하지만 3개로 나뉜 곳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상계동과 중계동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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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금동반가사유상과 중국 사유보살상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15. 21:59
과거 우리나라 역사유산이 '한국미술5천년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과 미국 각 도시에 순회 전시될 때 가장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단연 금동반가사유상과 신라 금관이었다. 금관의 경우, 언뜻 흔할 듯 여겨지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출토된 금관의 수는 13개에 불과하다. 그중 9개가 한국에서 출토돼 현재 8개는 한국에 있고 나머지 1개가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있다. 신라의 화려한 금관에 세계인의 눈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자에 따라 숫자에 약간 차이가 있고, 신라의 것은 망자의 얼굴에 씌우는 데드 마스크라는 말도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금관보다 반응이 더 뜨거웠던 것은 금동반가사유상이다. 여기서 반가(半跏)는 반(半)가부좌의 뜻으로 가부좌 형태에서 한쪽 다리 자유롭게 내린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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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 철의 제국 히타이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11. 23:51
세계 최초로 철기 사용을 보편화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기원전 17∼13세기 이집트, 아시리아와 함께 '오리엔트 3대 강국'으로 군림했던 나라. 바로 히타이트다. 그 히타이트 제국의 유물 212점이 서울에 왔다 하기에 부푼 마음으로 전시장인 한성백제박물관을 찾았다. 히타이트의 유물을 직접 보는 것은 과거 히로시마대학 박물관 이후 거의 20년만이라 셀레이기까지 했다. 조금 연배가 있는 분들의 기억에는 인류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민족이라는 강력한 첫인상으로 남아 있으리라 여겨지는 히타이트다. 하지만 이후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인류 최초의 철기 사용 민족은 히타이트가 아니라 기원전 2천 년 경의 아르메니아인(人)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만 청동기와 철기 야금술을 보편화시킨 민족은 어디까지나 히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