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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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조선군의 전력이 급락한 이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22. 20:58
앞서 '망국의 서곡이 된 강화 진무영의 문관 지휘관과 안규백 후보'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프랑스군과 싸운 1866년의 병인양요와 미군과 싸운 1871년의 신미양요를 모두 승전의 역사로 기억한다. 그런데 불과 4년 후인 1875년(고종 13)의 운요호(운양호) 사건 때는 일본군에 무참히 패했다. 그 패전은 결국 이듬해 2월, 일명 강화도조약으로 불리기도 하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으로 이어진다. 그 조일수호조규가 맺어진게 된 구체적 경위에 대해서는 어제 '우리가 강화도조약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에서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앞서 한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을 해보려 하는데, 가장 큰 궁금증은 역시 급 약화된 조선군의 전력이다. 다시 말하지만 불과 4년 전의 신미양요 때 미군을 물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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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강화도조약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21. 23:45
강화도조약은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조약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다. 앞서 말한 대로 강화도조약의 빌미가 된 사건은 한 해 전인 1875년(고종 13)에 일어난 운요호(운양호) 사건이다. 이때는 강화도 진무영 군대는 일본군에 무참히 패했고, 결국 힘에서 밀린 조선은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며 그 뒤 한반도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불행한 역사가 진척된다. 1. 잘못 알려진 장소 그런데 우리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그 역사적 장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나는 교과서 등에 기재된 체결 장소의 오류에 대해 2019년 이래 본 블로그를 통해 제시하고 있지만 조회수가 낮아서 인지 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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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 허완이 지휘한 쌍령전투 / 무능한 자가 군통수권자가 되었을 때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18. 21:24
쌍령전투는 병자호란 중에 일어난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로서, 밀리터리 덕후들이 임진왜란 중의 칠천량 해전, 6.25전쟁 중의 현리전투와 더불어 한국 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3대 패전으로 꼽는 전투다. 하지만 쌍령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밀리터리 덕후나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사람은 대부분 모를 것 같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을뿐더러 그 밖에 특별히 언급되거나 가르쳐주는 데도 없기에.... 쌍령전투는 1637년 음력 1월 3일,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서 벌어진 청나라 군대와의 싸움으로,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투이다. 그리고 그 내용도 처참하고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데, 요점만 간단히 짚자면 쌍령전투는 문관 출신의 총사령관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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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자가 군통수권자가 되었을 때 / 김경징의 경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17. 19:22
광해군은 재위 기간 동안 여진족과 원만한 외교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신흥강국 후금(後金)과의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 후 사정이 급변했던 바, 새 임금 인종과 반정세력은 철저히 친명배금(親明排金)함으로써 결국은 전쟁을 불러왔다. 1627년 2월 23일, '전 임금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쳐들어온 후금은 불과 보름 만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점령했다. 놀란 조정은 서둘러 강화도로 도망간 후 후금과 협상에 나섰고, 후금도 선뜻 협상에 임했다. 원래 겁을 주기 위한 침공일뿐 정복을 위한 원정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협상은 조선 측에서 보낸 국서에 쓰인 명나라 연호 '천계'(天啓)가 문제시된 것 외에는 그럭저럭 풀려, 향후 양국이 형제의 나라로 지낼 것,(물론 조선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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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서곡이 된 강화 진무영의 문관 지휘관과 안규백 후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16. 17:34
우연찮게도 강화도 관방유적을 둘러볼 때면 늘 날씨가 궂다. 아래 초지진 사진을 찍었던 몇 년 전 역시 날씨가 궂어 매표소 여직원이 뜻밖의 입장객에 깜짝 놀라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날은 초봄임에도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추웠다. 연일 비가 내리는 한 주인데 이번 주말에도 강화도 관방유적 탐사가 예정돼 있다. 주말에는 비가 그쳐 줄 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옛 초지진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1973년 옛 초지돈대의 흔적을 복원해 초지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옛 초지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옛 관방유적들을 '호국문화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정비할 때 엉터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증에 불충실한 경우가 적잖았은데, 초지진도 그와 같은 예(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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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가는 중국의 서해구조물 / 우리는 서해를 지켜낼 수 있을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12. 23:18
올해 2월 26일 한국 해양조사선 온누리호가 서해에 설치된 중국의 고정식 구조물에 접근하자 중국이 해경 함정 2척과 고무보트 3척 등 5척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접근을 방해했다는 뉴스가 지난 6월 27일 뒤늦게 보도됐다. 이는 nate 뉴스가 국민의힘 유용원 의원실에 의뢰해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보도한 것으로, 온누리호는 2월 26일 서해 잠정조치수역(PMZ)에 무단 설치된 중국 대형 철제 구조물 인근해역 조사에 나섰다가 중국의 무력시위에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아래 사진은 온누리호가 물러나며 찍은 중국의 해경 함정이다. PMZ에서는 조업 이외 자원 개발 등 다른 활동과 시설물을 설치해선 안 된다는 것이 국제법이다. 하지만 앞서 '중국으로부터 서해와 서(西)격렬비도를 지키자' 등에서 말한 대로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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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낙산아파트와 아직 남은 회현제2시민아파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7. 11. 23:29
예전의 서울시 아파트는 대부분 산 위에 있었다. 1968년 6월 18일 이 땅 최초의 시민아파트 단지였던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시민아파트가 그랬고, 1968년 남산자락에 건립됐다 2003년 철거된 회현제1시민아파트가 그랬고, 1970년 마포 와우산 위에 세워졌다 붕괴된 와우시민아파트가 그랬다. (☞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이어 1971년 산자수명한 인왕산 계곡에 세워졌다 2011년 철거된 옥인시범아파트가 그랬고, 1972년 건설돼 부촌의 대명사로 쓰이다 2021년 폭파 철거된 남산외인아파트가 그랬고, 1970년초 지금의 낙산 한양성벽 자리에 있던 동숭동 시민아파트와 창신·숭인동의 판자촌을 밀어내고 건립됐다 2000년 철거된 낙산시민아파트가 그랬다. 남산외인아파트 철거 장면 이상의 아파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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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흔적을 남기나 때로는 아예 사라지기도.... 부정선거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10. 19:53
매우 신기하게도 서울대방초등학교 높은 축대 담벼락에는 조선시대 왕자의 비석이 있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아들 연령군(延齡君) 훤(昍) 묘의 묘비로 정확히는 '肅宗王子延齡君昍墓碑趾'(숙종왕자연령군훤묘비지)라고 새겨져 있다. 묘비 내용대로라면 이곳에 숙종의 아들 훤의 묘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연령군은 조선 19대 숙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숙종 25년(1699) 태어났다. 어머니는 명빈박씨다.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을 지냈으나 조선시대 임금의 아들은 세자를 제외하고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던 바, 그가 지낸 도총관 역시 녹봉을 챙기기 위한 벼슬이었다. 연령군은 21살의 젊은 나이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이 등창을 얻어 고생할 때 극진히 간호하다 자신도 병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