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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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4. 1. 10. 23:54
앞서 '일본에 기독교를 전래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좌충우돌기(記)'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일본의 기독교 전래 연도는 1549년으로 미국보다 70년, 한국보다 230년 빠른 선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기독교인의 수는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바,(천주교 포함) 일본의 기독교 전래는 실패 사례로서 지금도 연구 대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 기독교는 개신교의 경우, 언더우드(장로교)나 아펜젤러(감리교)와 같은 미국 선교사의 전파 아래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여긴다. 물론 그 영향이 크니 한국 개신교 교파의 지배적 점유율을 보이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은 아니니,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인인 이수정은 일본 기독교의 영향으로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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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둥이들을 돌본 오웬과 윌슨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12. 15. 21:02
지난 10월 29일 오스트리아 국적의 고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 한국명 백수선) 간호사가 오스트리아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한덕수 총리는 이날 대한간호협회 회관 앞의 고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 분향소를 찾아 방명록에 "고인께서 보여주신 고귀한 사랑과 헌신의 삶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다.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적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한 피사렉 간호사는 동창생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 한국명 고지선) 간호사(89)와 함께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봉사하다 고령에 활동이 여의치 않자 2005년 11월 21일 편지 한 장만을 남김고 소록도를 떠났다. 스퇴거는1962년에, 피사렉은 1966년에 각각 한국땅을 밟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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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쌀 박사 2대 고든 어비슨 & 참전용사 3대 버드 어비슨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11. 4. 22:48
오늘 말하려는 고든 어비슨과 버드 어비슨은 앞서 말한 올리버 어비슨의 아들과 손자이다. 고든 어비슨은 189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으나 1893년 7월 16일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3살이었다. 고든 어비슨은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 캐나다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1919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국YMCA가 조선에 파견한 농업지도관의 자격으로서였다. 그는 28년 전의 올리버 어비슨처럼 부인 및 두 아이와 동행했다. 우연인지, 아니면 조선의 상황에 맞게 진로를 설정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한국에 온 것은 선교사가 아닌 농업전문가로서였다. 과거 갑신정변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변수(1861~1891)*가 미국에서 전공한 것도 농학으로, 변수가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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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어비슨 가(家)의 3대에 걸친 봉사 - 1대 올리버 어비슨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11. 3. 22:30
한국을 사랑하여 일생을 바친 외국사람은 수없이 많다. 나아가 대(代)를 이어 봉사한 가문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어비슨 가문은 특별하다. 한국을 위해 봉사한 가문의 경우 대개 의료나 교육, 선교 같은 분야에 집중돼 있는 반면 어비슨 가(家)는 3대에 걸쳐 각기 다른 방면으로 한국 사랑을 표현했다. 1대 올리버 어비슨은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자임에도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올리버 어비슨은 1860년 영국 요크셔 재거그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방직공장 노동자였으나 산업혁명의 기계화에 밀려 어느 날 갑자기 실업자가 되었다. 막연해진 그는 당시 대다수의 영국 빈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과 함께 신대륙행 배의 3등 칸에 몸을 실었다. 그의 가족은 미국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했고, 어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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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포크 두 번째 이야기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7. 30. 01:30
오랜만에 포크에 대해 쓴다. 뭔가 테마를 잡아 쓰려고 했는데, -이를 테면 조선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위안스카이에 맞서 싸우다 미국정부에 의해 조선공사대리에서 해임된 이야기 같은 것- 딱히 분량이 나오는 스토리가 없어 그냥 이것저것 쓰기로 했다. 그가 조선의 개혁파와, 그중에서도 서광범과 친했다는 얘기는 앞에서도 한 적이 있다. 그는 일찍이 방미사절단(보빙사)의 일원인 민영익, 서광범, 변수를 데리고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이 그들에 대한 배려로 내준 트렌튼호를 타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돌아 조선의 부산항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그 여행기간 동안 서광범과 변수는 서구의 문물에 관심을 갖고 모르는 것은 묻고 배우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민영익은 허구한 날 중국의 고전만 읽었다. 포크는 민영익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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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봉사에 매진하다 요절한 성공회 선교사 랜디스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4. 11. 00:09
인천광역시 개항로 45번길에 있는 중세 유럽풍의 교회 건물은 1890년 영국 성공회 존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당이다. 본래의 교회 건물인 성미카엘 성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은 중구 내동 성누가병원 자리에 1956년 6월 다시 세워진 것이며, 겉보기와는 달리 지붕은 한국의 전통 목구조에 기와를 앉은 한·양(韓·洋) 절충의 건물이라는 것이 안내문의 설명이다. 성공회와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1890년 9월 29일, 조선 초대주교로 서품을 받은 영국인 존 코프(한국명 고요한) 신부가 제물포 항에 도착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전국에 100여 개의 교회를 두게 되었는데,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성공회 서울 주교좌교회 건물을 비롯해 모두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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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미국공사대리 조지 포크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7. 8. 00:31
1882년(고종 19) 5월 22일 조선국 전권대관 신헌 (전권부관 김홍집)과 미국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 제독 사이에 수교조약문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서양제국 중 조선과 국교를 체결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는데, 양국이 국교를 맺는 데는 의외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알선의 대가(1860년 북경을 점령했던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게 만든 대가)로 흑룡강 이북과 연해주의 거대한 땅을 러시아에 빼앗긴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러시아는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이렇듯 열강의 침입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에도 조선만은 속방으로 두어 대국의 체면을 지키고 싶어 했던 바, 어떻게든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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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니스트 베델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2. 3. 9. 05:26
는 1904∼1910년 사이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으로, 당시 발행되던 일간지 가운데서는 거의 유일한 신문다운 신문이었다. 이 신문의 발행인이자 사장이던 베델은 놀랍게도 영국인 청년이었다. 그는 22살 때인 1904년 3월 10일, 영국 신문 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내한했다. 베델이 조선에 온 것은 의 임시특파원 자격이었다. 당시 일본 고베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청년 베델은 러일전쟁 취재에 흥미를 느끼고 특파원 모집에 응했는데, 러일전쟁 직후 파견된 토마스 코웬에 이은 두 번째 임시직 특파원이었다. 일본 업체들의 소송과 형제 간 불화 등으로 일시 사업을 접고 있던 베델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 조선에 온 것이었다. * 1872년 창간된 은 1930년 와 합병해 로 바뀌었고, 1960년 에 흡수 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