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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 눈의 쌀 박사 2대 고든 어비슨 & 참전용사 3대 버드 어비슨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2023. 11. 4. 22:48

     

    오늘 말하려는 고든 어비슨과 버드 어비슨은 앞서 말한 올리버 어비슨의 아들과 손자이다. 고든 어비슨은 189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으나 1893년 7월 16일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3살이었다. 고든 어비슨은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 캐나다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1919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국YMCA가 조선에 파견한 농업지도관의 자격으로서였다. 그는 28년 전의 올리버 어비슨처럼 부인 및 두 아이와 동행했다. 



    고든 어비슨 (Gordon W. Avison,1891~1967)

     

    우연인지, 아니면 조선의 상황에 맞게 진로를 설정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한국에 온 것은 선교사가 아닌 농업전문가로서였다. 과거 갑신정변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변수(1861~1891)*가 미국에서 전공한 것도 농학으로, 변수가 당시의 조선에 가장 필요한 학문을 선택해 공부한 것처럼 어비슨도 조선의 사정을 고려해 농학을 전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  갑신정변 후 변수는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피했으나 일본 정부의 냉대를 경험한 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학문에 뜻을 두고 베어리추 랭귀지 스쿨을 거쳐 메릴랜드대학 농학과에 입학하였고, 1891년 수석 졸업을 하며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기도 하였다. 변수는 졸업 후 연방농무부에 취직을 해 공무원의 길을 걸으며(동양인 최초의 미연방정부 직원) 국내에 복귀한 날을 기다렸으나 31살이던 1891년 워싱톤 구내에서 열차에 치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다. 

     

     

    메릴랜드대학 시절의 변수 / 웨스트포인트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에 온 어비슨은 전라도 광주YMCA에 배정되었다. 이후 그는 광주를 중심으로 하여 농업전문가로서 농업활동을 벌였으니, 벼의 증산 외에도 토양학·종묘학·우생학 등을 바탕으로 토양을 좋게 하는 법, 우량종자 보급, 종자 고르는 법, 온실농업, 목공 등을 가르쳤다. 아울러 야학을 통한 농촌지역의 문맹 퇴치에 힘썼으며, 환경개선을 통한 말라리아 퇴치에도 진력했다. 그리고 각처에 신용협동조합과 농우회를 결성, 생활개선과 문화보급에 나섰다. 

     

    어비슨은 당시 조선 어린이들의 체력과 건강상태가 너무 열악하다는 데 놀라 청소년들의 체력증진을 위해 축구, 유도, 권투 등의 사회체육 보급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간호사 출신의 그의 아내 프란세스는 영·유아 사망을 줄이고 청소년들의 체력을 기르고자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콩우유의 보급에 앞장섰다. 프란세스는 당시 생산이 거의 없었던 우유를 대신해 젖산으로 발효시킨 두유를 보급하였고, 이것이 유아 사망률을 크게 낮추었던 바, <뉴욕타임즈>에 기사화되기까지 했다.  
     

    또 그들 부부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가 머물면서 통조림 기술을 배워 조선 농촌에 보급하기도 했는데, 춘궁기에 배고픔을 호소하는 아이들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어비슨 부부의 이 같은 헌신적인 노력은 미국YMCA로부터 조선에서 농촌 사업이 현저한 성공을 거둔 곳은 광주, 서울, 함흥 세 곳뿐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광주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일제에게는 당연히 눈엣가시였을 터, 결국 1939년 어비슨과 그의 가족 일행은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었다. 어비슨은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태극기를 집에 게양하며 살며 한국을 그리워하다 1967년 영면했다. 

     

    한국에 있을 당시 어비슨의 별명은 '파란 눈의 쌀박사'였다. 이는 어비슨이 농업전문가로서 혁신을 이루었음을 말해주는 실례(實例)가 되겠지만 그의 활동은 그동안 저평가되었다. 아마도 그가 종사한 일이 농업분야이고, 활동무대가 농촌이어서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활동이 조명되어 그가 세웠던 양림동 광주YMCA 농업실습학교(일명 어비슨 농업학교) 터에  2010년 4월 11일 어비슨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광주 양림동의 어비슨기념관
    어비슨에 대해서는 광주에서도 조명이 늦었다가 2010년에 이르러 비로소 기념관이 건립됐다.
    기념관 앞의 어비슨 동상
    광주 사직도서관 앞의 어비슨 안내문

     

    올리버 어비슨의 아내 제니가 1893년 7월, 부산에 상륙한 지 1주일 만에 출산한 셋째 자식 더글라스(Douglas B. Avison, 1893~1951)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더글라스 역시 한국에 봉사하였으니 토론토대학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20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1920~1923년까지 평안도 선천 선교부 소속으로 의료활동했다. 이후 더글라스는 서울 선교부로 옮겨와 세브란스의학교의 교수와 병원장으로 봉직했다.

     

     

    서울 양화진의 더글라스 어비슨과 부인 캐서린 묘

     

     

    올리버 어비슨의 손자이자 올리버 어비슨의 외아들인 버드 어비슨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적 광주에서 자랐던 버드 어비슨은 성장해 미국으로 간 후 한국인 2세와 결혼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 보병으로 입대했다. 또 간호사였던 버드의 부인도 미군 간호장교로 자원 참전하여 한국군 간호부대 고문으로 간호 인력 양성에 힘썼으며, 더불어 전쟁 고아들과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광주 어비슨기념관의 가족사진 / 오른쪽 위에 버드 어비슨이 보인다. 어비슨의 봉사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다가 막내딸 진 어비슨의 어린 시절 일기가 그의 언니에 의해 발견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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