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성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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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주산론과 숭례문한양 성문 이야기 2022. 2. 6. 06:04
조선이 한양에 정도(定都)할 때 주산(主山)을 어느 산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격론이 있었던 듯싶다. 살펴보자면 크게 3가지 안(案)이 부딪혔다. 1. 모악주산론(母岳主山論) ㅡ 안산(신촌 봉원사, 연세대, 이화여대 등을 품고 있는 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것으로 하륜이 주장함. 2.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 ㅡ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과 목멱산(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것으로 무학대사가 주장함. 3. 백악주산론(白岳主山論) ㅡ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산과 타락산(낙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는 것으로 정도전이 주장함. 하륜은 계룡산 신도안(新都案)이 도성의 입지로는 좁고 궁벽한 위치라 하여 반대하고 한양 정도를 이룬 사람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주장한 모악주산론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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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뜨거운 밀회가 이루어지던 숙정문밖과 선잠단(先蠶壇)한양 성문 이야기 2022. 2. 3. 23:52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은 다른 성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세워졌는데, 당시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본래 한양의 방위는 유교의 이념을 좇아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신(信)에 충실하였으니 각각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의 이름이 되었고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을 두었다. 하지만 북대문에 의당 들어가야 할 지(智)자는 생략되었는데, 앞서 숙정문 개요에서 말했듯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설명을 찾을 길 없다. 혹자는 이르기를, 원래는 지(智)자를 삽입해 홍지문(弘智門)이었다가 이름이 변했다고도 하는데, 왜 숙청문이 됐고, 그것이 왜 다시 숙정문이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에는 궁색하다. 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다만 에 일대의 소나무의 채벌을 금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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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혹은 숙청문에는 문루가 존재했을까?한양 성문 이야기 2022. 2. 2. 23:59
가끔 백악산(북악산)을 올라 숙정문(肅靖門) 앞을 지날 때면 왠지 기분이 묘하다. 이 일대는 그 전에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 앞서 말한 1968년의 1.21사태 이후 청와대 뒤쪽 북악산 도성 구간은 군사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접근조차 불가능하였다. 그렇게 무려 38년 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던 곳이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삼청터널 인근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로 이어지는 약 1.1㎞ 구간이 개방되었다.(2006년 4월) 이후 점진적으로 개방 구간이 확장되었는데, 올해 2022년에는 50여년간 폐쇄됐던 성곽 남측면도 개방돼 전체 구간이 뚫린다하니 기대가 된다. * 백악일까, 북악일까? 문화재청은 2007년 북악산 일대를 사적 및 명승지 제10호로 지정하였다가 2009년 명승 제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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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문도 있었다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22. 23:58
위 사진은 1904년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린 혜화문의 모습이다. 남소문에 관한 타이틀을 달고 이 사진을 소개하는 이유는 과거 버티고개(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던 남소문이 이러한 모습이었지 않겠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혜화문이 있던 혜화동 고개에서나 남소문이 있던 버티고개에서나 이와 같은 비탈은 찾을 수 없다. 앞서도 설명했거니와 혜화동 고개는 1928년 일제가 레벨을 낮추기 위해 7m 정도를 밀어내 혜화문과 함께 고개마루가 사라졌다. 버티고개는 이 보다 앞선 1913년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며 5m 정도를 깎아내는 토목공사를 벌였다. 이때 일대의 성곽이 헐리며 남소문도 사라졌는데, 혜화문과 달리 남소문은 사진조차 없어 복원은 꿈도 꾸지 못한 듯하다. 17세기 말에 그려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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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과 혜화동 석굴암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20. 05:42
「한양 성문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설명은 해야겠으되, 혜화문에 대해서는 앞서 '낭만의 거리 혜화동에 숨은 어두운 역사(II)-동소문'에서 웬만큼 언급이 됐다. 그래서 새삼 부연하기가 좀 멋쩍은데, 마침 벽초 홍명희의 에서 혜화문을 충분히 설명해놓은 대목을 발견해 옮겨 적으려 한다. 동소문(東小門)은 원 이름이 홍화문(弘化門)인데 동관대궐(창경궁) 동편에 홍화문이 있어 이름이 섞이는 까닭으로 중종대왕 당년에 동소문 이름을 혜화문(惠化門)이라고 고치었다. 홍화문이 혜화문으로 변한 지 육칠 년이 지난 때다. 혜화문 문턱 옆에 초가집 몇 집이 있고 그중에 갖바치의 집 한 집이 있었다. 홍명희는 혜화문 문턱 밑에 사는 갖바치(가죽신 만드는 사람)를 비록 천민이나 매우 똑똑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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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소의문)을 찾아서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15. 02:27
소서문이란 명칭은 한양 도성의 다른 소문들(동소문, 남소문, 북소문)과 달리 귀에 짝 달라붙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명칭이라는 뜻이니 지금도 서소문동, 서소문아파트, 서소문역사공원, 서울시청 소서문청사 등의 이름을 쉬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서문은 다른 소문들과 달리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앞서 말한 서대문(돈의문)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주변 성곽과 함께 철거된 것인데,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서대문과 달리 소서문은 정확한 위치마저 불분명하다. 소서문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 도성을 축성할 때 다른 문들과 함께 완공되었는데,(태조 5년) 그때도 서소문이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린 듯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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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성과 창의문한양 성문 이야기 2022. 1. 6. 04:12
지금은 창의문 쪽에서 내리 이어지던 성벽 구간이 사라졌지만 탕춘대성(蕩春臺城)은 본래 창의문에서 북한산의 비봉까지 이어지던 성벽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도 방위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조선왕조는 숙종조에 이르러 청나라 몰래 한양의 도성(都城)을 보강하고 북한산성을 새로 수축했다. 그러면서 도성과 산성을 연결하는 성벽인 서성(西城)을 쌓았는데, 그중 서쪽 구간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이 탕춘대성이다. ~ 탕춘대성의 이름은 연산군이 놀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비롯됐다. 연산군은 왕명으로 모집한 기녀(妓女)들인 흥청(興淸)을 끼고 흥청망청했는데 북한산 계곡의 홍제천이 내려다 보이는 이 근방도 주요 놀이터로서, 봄을 탕진한다는 의미의 '탕춘대'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탕춘대성을 축조하는 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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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없어진 서대문(돈의문)한양 성문 이야기 2021. 12. 31. 00:37
한양 도성의 동서남북 사대문 중 서대문은 유일하게 사라진 도성 문이다. 서대문은 1915년 일제가 도로를 넓힌다며 철거한 것인데, 한때 서울시가 복원시켰다는 의지를 보인 적이 있었으나 결국 복원되지 못했다. (2019년 AR 앱을 다운로드하여 보는 디지털 복원인가 하는 애매한 무엇이 생겨나 자화자찬식으로 복작댔는데 정작 이용하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인터넷 백과사전의 돈의문(서대문)에 관한 설명은 괜스레 복잡하다. 아래는 의 설명인데 일단 한번 읽어보자. 1413년 6월 19일,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은 지리로 보면 도성의 장의동문(藏義洞門)과 관광방(觀光坊) 동쪽 고갯길은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하니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닫았다. 대신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