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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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에서 맞아죽은 조선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5. 23:56
김홍집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구한말 4차에 걸쳐 내각을 이끌었던 총리 대신으로 역사 교과서에 등장한다. 김홍집의 자(字)는 경능(敬能), 호(號)는 도원(道園), 초명(初名)은 굉집(宏集)으로 1882년 미국과 수교할 때 부사(副使)로써 인천에 파견됐던 김굉집이 바로 그다. 본관은 경주, 계림군의 16세손으로 나의 직계 선조이기도 하다. 아울러 내가 역사를 공부하며 만난 조선의 역대 관료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그 경위는 아래와 같다. 김홍집은 1842년 서울 안국방 경운동에서 개성 유수를 지냈던 김영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영작은 인원왕후(숙종의 계비)의 아버지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으로, 당대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박규수와의 친분이 주목된다. 여러 번 말했지만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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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祖)와 종(宗), 세조의 경우 & 오늘의 헌법재판소 앞 풍경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2. 22:06
조선왕조 역대 임금 27명의 묘호(廟號)는 조(祖)와 종(宗)으로 분류된다. 즉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의 일곱 명은 조(祖)이고 나머지 스무 명은 종(宗)이다. 이와 같은 구분에 대한 정의를 일찍이 국가유산청 산하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내린 바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굵직한 업적이 있는 왕에 조(祖)를 붙입니다. 앞선 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왕성하게 한 왕은 대개 종(宗)으로 부릅니다. 「예기」의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는 데 따른 것입니다. 조선의 27 왕 가운데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만 조자를 썼습니다. 죽어서 왕으로 대접받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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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중국 원정에서 연전연승한 최영 장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돌아온 이성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26. 22:05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와 거란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은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관해 논한 위의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을 옮긴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이나, '이성계의 요동 정벌로 우리가 남만주의 주인이 되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회자되는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도 그런 아쉬움이 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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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금동반가사유상과 중국 사유보살상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15. 21:59
과거 우리나라 역사유산이 '한국미술5천년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과 미국 각 도시에 순회 전시될 때 가장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단연 금동반가사유상과 신라 금관이었다. 금관의 경우, 언뜻 흔할 듯 여겨지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출토된 금관의 수는 13개에 불과하다. 그중 9개가 한국에서 출토돼 현재 8개는 한국에 있고 나머지 1개가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있다. 신라의 화려한 금관에 세계인의 눈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자에 따라 숫자에 약간 차이가 있고, 신라의 것은 망자의 얼굴에 씌우는 데드 마스크라는 말도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금관보다 반응이 더 뜨거웠던 것은 금동반가사유상이다. 여기서 반가(半跏)는 반(半)가부좌의 뜻으로 가부좌 형태에서 한쪽 다리 자유롭게 내린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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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 철의 제국 히타이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11. 23:51
세계 최초로 철기 사용을 보편화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기원전 17∼13세기 이집트, 아시리아와 함께 '오리엔트 3대 강국'으로 군림했던 나라. 바로 히타이트다. 그 히타이트 제국의 유물 212점이 서울에 왔다 하기에 부푼 마음으로 전시장인 한성백제박물관을 찾았다. 히타이트의 유물을 직접 보는 것은 과거 히로시마대학 박물관 이후 거의 20년만이라 셀레이기까지 했다. 조금 연배가 있는 분들의 기억에는 인류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민족이라는 강력한 첫인상으로 남아 있으리라 여겨지는 히타이트다. 하지만 이후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인류 최초의 철기 사용 민족은 히타이트가 아니라 기원전 2천 년 경의 아르메니아인(人)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만 청동기와 철기 야금술을 보편화시킨 민족은 어디까지나 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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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학아세의 전형 國家安康 君臣豊樂과 헌법재판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3. 23:26
곡학아세(曲學阿世)는 '학문을 왜곡하여 권력과 인기에 영합하는 일'을 이르는 말로, 학문을 하는 자가 가장 경계하고 금기시해야 할 행동으로 꼽힌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릇된 행동으로 권력에 야합한 예는 비일비재하다. 학문을 하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있으란 법은 없기 때문인데, 그중에서 일본 전국시대 말기에 벌어진 호코지(方広寺)란 절의 범종에 새겨진 글씨를 잘못 해석한 일은 대표적 곡학아세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세력을 누르고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는 히데요시 파의 잔존 세력을 누르기 위한 작업을 획책한다. 그중에 교토 호코지 대불전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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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생각해본 낙랑국 왕조(王調)의 독립운동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3. 1. 23:22
낙랑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고토에 세운 4개의 군(郡)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했던 번국이며 또 고대 한민족에 영향을 큰 영향을 미친 번국으로, 우리나라의 북방 고대사는 이 낙랑국(혹은 낙랑군)과의 패권 다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설이긴 하지만 낙랑국 멸망을 배경으로 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운의 러브 스토리는 고구려의 낙랑국 멸망이 얼마나 힘든 역정이었는지를 대변한다. 낙랑공주가 사랑하는 고구려 왕자를 위해 찢었다는 자명고(自鳴鼓)는 '스스로 울리는 북'이라는 뜻이다. 낙랑국이 보유하고 있는 이 북은 적군이 칩입하면 스스로 울려 위급을 알렸다. 이에 방비가 용이할 수 있었던 바, 고구려군은 낙랑 공략에 번번이 실패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고구려 대무신왕(재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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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야청청했던 태종의 8자 근녕군 이농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2. 18. 18:28
앞서 태종의 일곱째 아들 온녕군 이정과 그 후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언급했다시피 온녕군의 아들 우산군과 그 아들 6형제는 연산군의 폭정에 뇌동하지 않은 죄로 모두 귀양을 가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한 가문이 이와 같은 절의를 보인 예는 사적(史的)으로도 드문 경우이니, 이들 7공자(公子)를 배향한 고양시 대자동의 혜덕사 안내문에는 온녕군의 4대손까지 명시해 가문의 충절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7공자의 절의와 반골 성향은 온녕군이 아닌 태종의 8자 근녕군(謹寧君) 이농(李襛, 1411~1462)에게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서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근녕군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충의지사(忠義之事)로서, 왕권 제일주의의 조선시대에 정말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