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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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부군당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25. 06:48
용산 원주민으로 짐작되는 연세든 사람에게 부군당(府君堂)의 위치를 물어보면 모두가 잘 알고 있을뿐더러, 더러는 어느 부군당을 찾느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용산에는 그만큼 부군당이 많다는 뜻이니 대충 짚어봐도 이태원, 동빙고동, 서빙고동, 한남동 등에 있다. 용산구 용문동 고개에 있는 남이장군 사당이나 보광동 오산중·고등학교 부근의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도 부군당에 속한다. 까닭에 용산에만 유독 부군당이 많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것은 서울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신당(神堂)이라 더욱 그러한데, 2008년 용산문화원에서 펴낸 이라는 책에는 각 부군당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에 관한 설명은 따로 없다. 하긴 용산문화원이라고 그 이유를 알 리 없을 터, 사실 부근당이라는 단어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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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왕과 윤치창이 살았던 가회동 집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23. 06:58
반계 윤웅렬의 나머지 두 아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순서대로 둘째인 윤치왕(尹致旺)부터 말하자면 그는 1세대 해외유학파 의사로서 1919년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의학부(Faculty of Medicine)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영국 왕립아동병원 정형외과 의사로 근무하다 귀국하였다. 언뜻 보자면 요즘 어떤 의학도의 프로필인 듯하지만, 그가 유학을 갔다는 1919년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95년 전이다. 그가 유학했다는 글래스고 대학교의 사진은 시대감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윤치왕은 돌아와 세브란스 의전 교수(1927~1944년)와 제2대 세브란스 병원 원장(1938~ 1939년)을 역임했으며, 제1대·2대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세브란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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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윤웅렬과 그 아들 윤치호가 살던 집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22. 06:15
반계(磻溪) 윤웅렬(尹雄烈)은 1840년(헌종 6) 아산에서 지중추부사를 지낸 윤취동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웅렬은 후취에게서 난 서자이기는 하나 본부인의 불임으로 인해 얻은 아들인지라 적자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윤취동의 나이 마흔에 얻은 자식인지라 더욱 애지중지했는데, 연이어 동생 영렬(英烈)이 태어났다 (먼저 말하자면 윤영렬의 손자가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이다) 형제는 의가 좋았고, 또 힘이 좋아서 동네 어깨로 행세하였던 바, 내친김에 둘 다 무과를 보아 입격했다. 윤웅렬은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이후 아버지 윤취동이 고종에게 뇌물을 주어 별기군 부교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으니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별기군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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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당 최영경과 송강 정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9. 21:35
수우당(守愚堂) 최영경(1529∼1590)의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이고 본관은 화순이다. 수우당은 병조좌랑을 지낸 세준(世俊)의 아들로 중종 24년 한성 원동리(창경궁 인근)에서 태어났다. 수우당의 집안은 선친 최세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명문가이나 수우당은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일찍이 진주로 가 남명(南冥) 조식의 문하에 들어갔다. 수우당은 훗날 기축옥사에 연루돼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진주로 간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국이 위태롭고 사론(士論)이 둘, 셋으로 나뉘며 명예와 이익의 경쟁은 날로 심해졌습니다. 이 몸은 화가 제 몸에 미칠까 두려워서 을해년(선조 8, 1575) 4월 경에 진주 동생 집으로 가서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정인홍이 지은 최영경 행장에는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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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생가 터와 별장 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6. 23:40
2년 전 대통령 선거 이후로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과 백현동은 전국민이 모두 다 아는 유명한 동네가 됐다. 작년 11월 말 그 백현동의 한 유치원 앞에 화강암 몸체에 까만 오석(烏石) 명판의 비석 하나가 세워졌다가 5일 만에 철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만고역적 이완용 생가 터에 세워졌던 기념 비석이었는데, 성남시가 백현동 아파트 공사로 생가를 철거한 후 뭔가 허전함에 비석 하나를 세웠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고 철회했던 것이다. 성남문화원장 김대진의 이름으로 세워진 가로 75센티미터·세로 112.5센티미터 크기의 이 비석에는 이완용의 친일 행적 등이 425자로 담겨 있었다. 문화원 측은 이완용의 친일 행적을 알려 후대에 역사적 교훈을 전하고 경각심을 주자는 취지로서 세웠다고 했으나, 주민들 사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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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 & 극단의 정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5. 22:49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로 정배 된 이유는 이른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된 때문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윤상도라는 사람이 호조판서 박종훈 등의 관리를 탐관오리로 탄핵했다가 역공을 받아 국문 중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문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前) 세도가의 좌장인 경주김문의 김노경을 지목했던 바, 바로 김정희의 아버지였다. 이에 김노경은 전라도 절해고도인 고금도로 유배가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는 윤상도가 제출한 탄핵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죄로 뒤늦게 잡혀갔는데, 안동김문은 그의 죄가 아비 김노경보다 더 깊다 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문 과정에서 관련된 증인들이 모두 고문치사하는 바람에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었다.(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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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테브레이와 하멜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2. 23:54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표류한 하멜 일행을 조사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은 매우 열린 마음의 사내였고, 또 당대의 세계를 알고 있던 드문 관료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원진이 하멜 일행에게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吉利是段, 크리스찬)인가?" 물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는 하멜 일행을 과거 광해군이 유배되어 살던 집에서 생활하게 했다. 광해군은 그들이 도착하기 12년 전인 1641년 세상을 떠나 집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이원진은 최대한의 배려였다. 어쩌면 그는 하멜 일행을 객관인 영주관(瀛州館)에 묶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는지 모르겠으나 차마 그렇게까지는 해줄 수 없는 터, 광해군이 살던 넓은 집을 숙소로 내주었던 것이다. 앞서 '광해군의 제주 유배지를 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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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의 역사적 건물, 충정·성요셉·서소문아파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9. 23:58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는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을 기려 명명한 도로이다.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칼로 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그와 같은 죽음은 많지 않다.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의 유교사상은 죽음에까지 적용되었으니 할복과 같은 결기를 보여주는 죽음은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민영환은 차고 있던 긴 칼을 빼 유혈 낭자한 죽음의 길을 택했다. 망국의 신하로서 처절한 죄값음을 하겠다는,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굴복이 아니라 강한 저항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충정로는 이렇듯 지명의 유래가 분명하니 충정로역 부근의 충정아파트는 처음에는 그 이름이 아니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