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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군 이하전 무덤에 묘표가 두 개 있는 이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6. 25. 17:29
경원군(慶原君) 이하전(李夏銓, 1842~1862)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인터넷 프로필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의 왕족 종실, 문신, 정치가이다. 제14대 국왕 선조의 사친(私親)인 덕흥부원군의 13대 사손(嗣孫)이며 도정궁(都正宮) 사손으로 도정궁에 거주하였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봉이 되었으며, 종친부 전부(典簿), 경모궁령 등을 지냈다. 출중하고 기개 있는 인물로서 헌종조와 철종조에 왕위 계승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며,
안동김씨 세도 기간 중 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안동김씨의 나라입니까?"라고 항의하였다가 이 발언이 결국 문제가 되어 1862년 전 오위장 김순성과 이긍선 등의 반역 일당에 의해 왕위 추대를 받았다는 무고로써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끝내 사사되었다. 사후 1863년 복권되고 순종 즉위 후 1908년(융희 2) 흥록대부 경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짧지만 임팩트가 있는 프로필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친(私親), 사손(嗣孫), 도정궁(都正宮)이라는 단어가 좀 어렵다. '사친'은 그냥 '아버지'라고 풀어도 별무리가 없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었으므로 명종의 이복형인 덕흥부원군의 세 아들이 후계자 물망에 올랐고, 그중 셋째 아들 하성군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 14대 국왕 선조였던 것이다.
'사손'이란 '제사를 모시는 후손'이라는 뜻이며, '도정궁'은 선조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살던 집으로 선조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이기도 했다. (위치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사직로 한국갤럽조사연구소 본관 근방에 있었다) 그로 인해 도정궁은 조선 후기 왕실의 본가로 여겨져 특별 대접을 받았던 바, 사손들이 대를 이어 살며 덕흥부원군을 비롯한 불천위 6위의 제사를 모셨다. 도정궁은 후손들의 정치적 부침(浮沈)과 화재 등으로 인해 그야말로 명멸(明滅)을 반복하다 지금은 경원당(慶原堂)의 일부가 서울 능동 건국대학교 내에 남아 있다.
1979년 기증되어 건국대학교로 옮겨진 도정궁 경원당의 일부 경원당 역시 본래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만 남아 옮겨졌다. 경원당은 경원군 이하전의 살림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정궁 경원당의 안내문 덕흥부원군 13대 사손 경원군 이하전은 임금인 철종 앞에서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안동김씨의 나라입니까?"라고 따질 정도로 기개가 이었다. 이른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선 후기 안동김문의 족벌 세도에 기죽지 않고 부당함을 외친 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에 비하면 현재의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그야말로 샌님 양반이다. 작금의 개판의 인사에 누구 하나 부당함을 외치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바람이 불면 눕는 것은 어쩌면 공복(公僕)으로서의 조건반사 같은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복지부동(伏地不動)' 같은 사자성어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바람이 불기도 전에 알아서 누워버리니 아무리 몸보신과 출세도 좋지만 너무 지나친 듯해 눈살이 찌푸려진다.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의 판새까지 그러한 바, 그저 대한민국의 앞날이 걱정될 따름이다.
하긴 이하전의 최후를 보면 함부로 어깃장을 놓을 입장도 아니다. 왕족 이하전의 기세에 놀란 안동김문은 이하전을 무옥(誣獄)해 결국은 죽여버렸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안동김문의 전횡은 철종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니 이른바 '안동김씨 60년' 세도이다. 본격적인 시작은 헌종 때부터였다.
헌종은 아버지 효장세자(순조의 아들)가 일찍 죽는 바람에 1834년 7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순조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까닭에 왕대비 순원왕후의 오랜 섭정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문이 다시 발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헌종도 15세 때 친정에 임해서는 나름대로 정치력을 발휘해 안동김문을 억누르려 들었다. 한마디로 자기 정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이 너무 짧았다. 그리고 더욱 불행히도 후사조차 없었다. 헌종이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22세로 승하하자 강화도에서 데려 온 일자무식의 농사꾼 이원범이 왕이 되었다. 순조 이후 워낙 씨가 귀했던 탓에 헌종의 주변에서는 왕위를 이을 친족이 없었다. 이에 안동김문에서 1786년(정조 10) 강화도에 유폐됐던 은언군(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의 손자 이원범을 데려 와 왕위에 올리니 이 자가 바로 철종이다.
철종이 살던 강화도 용흥궁 초가집이었던 곳이 잠저(潛邸)가 되며 기와집으로 변했고 궁(宮)의 명칭이 붙여졌다. 강화행렬도 / 이원범을 데리러 온 관리들의 행렬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149x434cm의 12곡 병풍의 일부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이다.
이원범은 말이 좋아 왕족이지, 귀양 간 왕족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된, 그저 하루 먹고 살기 바쁜 농사꾼에 불과한 자였다. 아울러 땔감용 나무를 벌목해 팔던 나무꾼에서 어느 날 아침 졸지에 왕이 된 자였던 바,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이에 부인(철인왕후)도 안동김문의 여식을 맞았고, 국정 역시 안동김문이 하라는 대로 따랐다. 반면 허수아비 왕을 세운 안동김문은 바야흐로 60년 세도가 만개하게 되었다.본론으로 다시 돌아와 말하면, 경원군 이하전이 사사되자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훗날의 흥선대원군)도 몸을 사렸다. 이하응은 경원군 이하전과는 24촌으로 왕실의 본류와의 거리가 먼 곁가지였으니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더욱 몸을 낮췄던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결국 기회가 왔던 바, 철종 역시 후사 없이 죽자 제 아들 명복이를 조선 25대 왕으로 올릴 수작을 신정왕후(조대비)와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왕이 된 자가 곧 고종이다.
고종의 잠저였던 운니동 운현궁 아무튼 경원군은 제주도에서 그렇게 불행히 숨을 거두었고,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마을에 있는 전주이씨 묘역에 마련됐다. 덕흥부원군과 그 후손들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 선조는 왕이 된 후 자신의 아비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무덤도 당연히 능이 되길 원해 능처럼 격을 높이고 덕릉이라 불렀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마을이름은 동네사람들이 선호로 덕릉마을이 되었던 바, 주변의 덕릉고개, 안릉마을 등도 모두 여기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덕릉로도 마찬가지다. 덕릉로 덕릉마을 버스정거장 옆의 거북바위 / 덕릉 이후 용바위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거북바위로 되돌아왔다. 덕릉고개의 덕흥대원군 묘 표지판 덕흥대원군과 하동군대부인 정씨 묘 묘표 봉분에는 8각의 호석을 둘렀다. / 봉분 크기는 지름 4.5m로 준수한 편이다. 부인 묘는 호석에 완곡을 두어 한번 더 손이 간 형태이다. 후경 장명등과 무석인 오른쪽 무석인 장명등 아래로 보이는 신도비 / 장명등은 2.2m 정도 덕흥대원군 신도비 / 대리석 비신 199.2cm, 전체 높이 334cm. 덕흥대원군 묘 안내문 덕흥대원군 신도비에서 본 하원군 묘 하원군과 남양군부인 홍씨 묘 /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의 첫째 아들로 선조의 맏형이다. 묘표 하원군 묘 문석인 하원군 신도비 / 대리석 비신 196cm, 전체 높이 320cm. 덕흥대원군 묘 표석 / 보이는 무덤은 하원군 묘이다. 역모로 몰려 죽은 경원군 이하전의 묘에는 묘표도 세우지 못했다. 하수상한 세월에 사후라도 어떻게 될까봐 그저 무덤만 만들어 시신을 묻었을 뿐이었는데, 그 후손들이 현대에 들어 묘표를 세웠다. 무덤은 덕흥대원군 묘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한적한 곳에 따로 위치한다.
그런데 2007년 덕릉마을 경원군 무덤 부근에서 160년 전 경원군의 묘 앞에 세우려 했던 묘표가 발견되어 다시 세워졌다. 당시에 무서워서 차마 세우지 못하고 땅 속에 묻어두었던 것이 2007년 가을 무덤 약 30미터 아래 지점에서 성묘를 하던 후손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인데, 그해 여름철 장마에 묻혀 있던 묘표가 겉으로 드러난 듯싶었다. 후손들은 그 묘표를 무덤 왼쪽에 세웠다.
옛 묘표를 살펴보니 글자가 없는 백비(白碑)로서 처음부터 글자를 새기지 않았던 듯싶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또 묘표가 너무 거칠어 누군가의 손에 의해 훼철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처음부터 땅에 묻혀 있다 발견되었다면 이렇게 거친 형태로서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경원군 이하전과 군부인 달성서씨 힙장묘 전주이씨 묘역 중 외진 곳에 위치한다. 이하전 묘의 신·구 묘표 2개의 묘표가 서 있는 풍경 아무튼 세도정치의 역사, 즉 노론 독재의 역사는 지금도 이렇듯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안동김문 60년 세도정치의 산실인 효자동 옥호정(玉壺亭)은 그 99칸 대저택이 홀랑 사라지고 지금은 솟을대문의 문을 고이던 돌 하나만이 남아 화려했던 옛 영화를 힘겹게 증명하고 있다. 예전에는(2019년까지) 그 돌이 좌우 양쪽으로 2개 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하나만 남았다.
화려했던 시절의 '옥호정도'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자 미상의 그림으로, 백악산 백련봉 아래 넓게 자리한 옥호정을 세밀히 그렸다. (150 x 193cm) 옥호정의 세부 / 원래 안동김문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김조순의 별서로(別墅)로 출발했다. 옥호정 터 표석이 있는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9길 표석 위치와 달리 옥호정 터는 골목 안에 있다. 이 돌이 옥호정의 유일한 흔적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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